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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킴 Nov 01. 2019

이젠 내가 꿈을 심을 차례니까....

어머니의 '꿈을 심는 아내', 그 이후.

내가 10살 때의 일이었다.


엄마는 밤 늦게까지 연필로 눌러쓰며 글을 써 내려갔던 그때를 난 생생히 기억한다. 난 옆에서 엄마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고 있다가 잠들어 버렸다.

하루 종일 가사와 세 자녀 육아로 힘들었을 텐데,

군인 가족들에게 소정의 상품을 걸고

아마도 글짓기 대회가 있었던 모양이다.


엄마가 쓴 수필의 제목은 '꿈을 심는 아내'였다.

엄마는 3년 터울로 아이 셋을 낳고 직업군인이던

 아버지 때문에 매년 이사를 다녀야만 했다.

해마다 엄마가 홀로 박스에 책들과 의류를 담,

 새벽에 도착한 대한통운 트럭에 짐을 실어

전국을 이사 다녔던 기억이 다.


 부산에서 태어나 강릉, 속초, 양구, 인제, 원통, 삼포, 양양, 대구, 영천, 철원, 갈말 등등


영천에서 철원으로 갈 때에는 너무 멀고

길이 꼬불꼬불해서 먹는 것마다 멀미를 했다.

 당시에는 8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엄마는 트럭 안에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고 있었다.

내 멀미 냄새가 역해서 우시거나

 지루해서 우시는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 강원도 접경지역인 철원의 군인 가족으로

관사에 살 때인 10살 때였다.

그때부터 엄마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남편의 직장 내 영전과 아이들의 참 교육을 위해 기도하셨다.

가족을 위한 그 간절한 마음들을

손 가는 대로 담백하게 쓰신 것이

엄마의 첫 수필이었다.


결국 그 글이 최우수상이 되었고, 여러 수상작들을 모아서 산문집 책을 내서 보급했는데,

그 책 표지 제목이 '꿈을 심는 아내'였다. 

그래서 난 그 제목을 잊을 수 없었고

마음 한구석에 항상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30여년이 넘게 흐른 지금.

나의 어머니는 '꿈을 이룬 아내'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충분히 그렇다.


6학년 때 갈말읍에 있는 대곡 분교(지금은 폐교 상태임)에서 서울에 있는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분교는 한 반이었는데, 서울은 16개의 반이었다.

분교는 반에 16명이 전부였는데,

서울은 한 반에 60명이나 있었다.

 나에겐 서울의 모든 게 문화적 충격이었다.

전자 오락실도, 미니 카세트도,

친구들과 선생님의 폭행 수준도....


그렇게 강원도 촌놈이 서울이란 곳에

우여곡절의 적응 속에서 어느덧 세월이 흘러갔다.

깡패 학교라고 소문난 중학교로 전학 가서

뒷자리에 앉은

 키 큰 친구들에게 괴롭힘도 당했고,

같이 어울리기 위해 브레이크 댄스를 추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일탈 행동도 하고, 불량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내신 성적이 3등급이나 떨어진 적도 있었다.


또한 처음 합격한 대학에서는,

 합격통지서와 등록금 고지서를 열어 보니

 과 차석이었다.

나는 장학금 혜택으로 대학을 다녔으나,

거만한 20세의 무한자유를 누리다가

1학년 성적을 확인해 보니 대부분이 'F 학점'.


난 그 대학을 휴학 후 재수를 결심하고,

 수능 1세대로 다른 대학에 진학했으며

거기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행정고시 합격 후 현재 공직에 몸을 담고 있다.


이 모든 휘청휘청한 순간마다 어머니는 내 마음을 돌리고

정상 범위로 돌아오도록 역할을 하셨다.


잔소리를 한 것도 아니요, 매를 때린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주말 부부였기에 자녀 셋의 교육은

 어머니가 거의 도맡아 하셨다.


 그저 몸소 모범을 보이고 희생하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 자체만으로 난 철이 들 수밖에 없었다.

추운 겨울에 새벽 기도 가는 모습,

남동생어학연수, 여동생해외 유학비를 보충하기 위해

늦게까지 고된 일을 하시는 모습....



그렇게 꿈을 하나씩 실천하고 완성해 가신

 어머니가 어느덧 70세가 되어

벨기에에 와서 함께 유럽을 여행하였다.


 당신께서는 여전히 감성이 여린 소녀 같았다.


스위스의 설산을 바라보고 눈물을 머금을 때도,

독일 몽샤우의 예쁜 마을을 총총 걸으실 때도,

파리 에펠탑 앞에서 사진 포즈를 잡을 때도,


어머니는 '꿈을 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때 결심했다.

나도 그 시절의 어머니처럼 진지한 글을 써야겠다고.

내 글은 '벨기에에서 천일동안'이라 이름 지었고,

한국으로 귀국 전, 그리고 귀국 후 꾸준히 써 가고 있다.



우연히도 내 아들 허니는 지금 10살이다.


내가 글을 쓸 때마다 옆에서 아들 허니는 이렇게 물어본다.


"아빠는 왜 그렇게 열심히 글을  써?"


그럼 나는 대답한다.


"응. 이제는 내가 꿈을 심을 차례라서....


너도 나중에 크면 알게 될 거야.


그리고 쓰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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