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에 집착하는 논쟁은 끝내자
운전기사가 있는 11인승 승합차를 빌릴 수 있는 모빌리티 서비스 ‘타다'를 두고 ‘공유경제'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논쟁을 보고 있자니, 좀 답답하다.
공유경제라는 단어는 한국 사회에 어떻게 유입되었나. 우리는 사실 그 이전까지는 없던 산업의 등장, 그리고 그런 기업들의 빠른 성장에 열광했다. 공유경제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사람들이 열광하던 내용 중 한 대목은 이렇다. “에어비앤비는 225억 달러의 기업가치로 힐튼과 같은 글로벌 호텔기업을 앞질렀다. 우버도 기업가치 510억 달러로 세계 스타트업 기업 중 2위다.”(세계일보 2016년 2월17일)
다시 말해 우리가 이른바 공유경제에 대해 열광했던 이유는 산업 구조가 어떻게 재편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세계 시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에 대한 해석'이 중요했다. 전 세계적인 트렌드를 읽고, 거기에 맞춰 우리 산업도 맞춰야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트렌드 읽기란 매우 중요했다.
그렇다면 그런 서비스가 왜, 어떤 연유에서 성공했으며,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게 맞지 않을까? 이들에게 붙여진 ‘공유경제'라는 단어는 사실 새로운 산업의 형태를 좀 더 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무수히 많은 시도 중의 하나였고, ‘공유경제’라는 단어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며 자리를 잡았을 뿐이다. 사실 트렌드를 읽고 분석하려는 이들 중 남는 자원을 활용하는 측면을 보는 이들의 경우에는 “공유경제”, 플랫폼적 측면을 강조하는 이들은 “플랫폼 경제”, 온라인과 오프라인 간의 연결에 초점을 맞추고 싶어하는 이들은 “오투오(O2O) 산업” 등 알아서들 자신들이 주목하는 부분에 맞춰 이 새로운 현상에 대해 이야기 해왔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찌된 것인지 이런 ‘현상의 해석’보다는 다른 쪽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 ‘공유경제'라는 단어에 집착하고 있다. 현재 등장하는 산업, 그 현상에 해석은 하려 하지 않고, 다시 말해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그저 “공유경제"라는 ‘섹시한' 단어에 집착하고 있다. 그래서 각각이 나름대로 규정한 정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공유경제가 마치 현대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이 등장했다. 여기에 더해 “두레와 같이 나눠쓰고 함께 해야 한다” “공유란 무릇 ~해야 한다"는 등의 당위론까지 등장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회적경제'와 같은 선상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 모든 논의가 현상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단어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게 참으로 조선시대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유경제로 ‘인증’을 받으면 어떤 특혜를 받는다고 한다면, 그 기준을 명확히 하고 그 개념 자체에 대해 논란을 벌이는 게 온당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게 아니지 않은가.
잘 생각해보라.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가. 처음 공유경제에 대해 환호하고 주목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산업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그 변화상을 주목해 우리 산업의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려고 했던 것 아닌가? 그렇다면 현재 존재하는 산업들, 특히 이미 산업으로서 경쟁력을 갖추거나 검증된 산업들의 특징을 분석해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적절하지 않나? 그걸 어떤 이름으로 말하느냐는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하려는 시도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가 바라보는 이른바 최신 산업동향은 이렇다. 남는 자원을 활용하려 애쓰고, 스마트폰 기반 플랫폼 기술을 활용해 시간 점유의 방식으로 자원 활용의 극대화를 꾀한다. 이는 저성장 시대가 불러온 당연한 귀결이다. 빈곤하던 시대에는 다 나눠썼다. 청소기도 빌려쓰고, 냄비도 빌려썼다. 한 방에 여럿이 모여 잤고, 화장실도 공유했다. 다만 그때는 스마트폰이 없었고, 문화적으로도 빈곤했다. 공유라는 단어를 쓰기보다는 ‘극복해야 할 한계'로 받아들여지던 때였다.
그러다 돈을 벌기 시작하고 대량생산시대로 접어들며 자원이 남아돌게 되자 사람들이 프라이버시를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나하나 다 분리되기 시작했다. 프라이버시를 지키려는 것은 본능이다. 나만의 공간, 나만의 자동차, 내 소유의 물건들…
그런데 금융위기로 저성장이 닥쳤다. 예전처럼 돈을 마구 쓰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마구잡이로 생산할 수 없다. 그러니 다시 예전처럼 갈 수밖에 없다. 집을 그냥 혼자 쓰면 편하고 좋지만, 남는 방을 활용해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걸 도와주는 플랫폼이 등장했고, 높아진 문화적 수준에 맞춰 함께 쓰는 데 대한 문화적 포장을 입힐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의 대규모 공유주택의 공유공간은 화려하다.
이 관점으로 공유를 넓게 바라보면, 사실 버스도 택시도 공유경제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차가 아니지 않나. 다만 매칭 방식이 다를 뿐이다. 매칭을 플랫폼으로 하게 되면 플랫폼 경제다. 여기서 차이는 플랫폼 뿐이니 새로운 산업을 플랫폼 경제라고 부르면 된다.
목욕탕도 공유경제다. 집에서 혼자 소유한 목욕탕을 매번 가동해 각종 이벤트탕을 즐길 수는 없지 않나. 시장참여자들(목욕탕 이용자)이 함께 N분의1로 자본을 투입해야 작동하는 공유경제 모델이다. 호텔 로비도 공유경제의 특징을 갖는다. 로비는 숙박객 모두가 공유하는 공간이 아니던가. 호텔과 공유주택은 구조가 서로 판박이처럼 유사하다.
플랫폼의 특징은 개인이 세상의 중심에 나올 수 있게 한 데 있다. 유튜브 플랫폼이 생기면서 유튜브 스타가 생기지 않았나. 에어비앤비가 생기면서 누구나 자기 취향의 공간을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플랫폼의 특징은 개인의 시대를 반영한다. 이는 새롭게 주목하고 있는 ‘롱테일 시장’을 어떻게 끌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에어비앤비의 숙소는 다양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취향을 ‘저격'한다.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며 소셜미디어를 어릴 때부터 써왔던 이들이 주도하는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예전과 같은 대량생산의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개개인의 다양한 특성이 상품화되는 플랫폼만이 이들 새로운 소비층을 공략할 수 있다.
(나의 해석에 동의할 지는 모르겠으나) 이 같은 트렌드를 읽고, 산업구조를 이 쪽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중요하지 않나? 그 ‘현상의 해석'을 통해 우리가 나아갈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었나? 왜 우리는 단어에 집착하면서 ‘푸르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각자가 마음대로 정해 놓은 단어에 모든 것을 맞추려고 할까.
음성원 도시건축전문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