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당신은 마지막까지 자기 역할을 다한 육신마저도 흙의 필요를 채워주어 세상의 이로운 영양소를 공급하고 가는군요. 그리고 당신 창조주 이야기는 인류 지침서 같은 존재로 세상에 널리 읽히고 있더군요.
우리 플라스틱은 이제 세상 환경의 공포가 되어 버렸어요. 소멸하지 않고 땅속에 묻혀 유해가스를 배출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일류의 재앙이 되어버렸죠. 처음 개발되었을 때의 내 존재감과 지금 나의 처지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라 할 수 있어요. 내 쓸모와 사용은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각가지 형태들은 사라지지 않고 온 세상 쓰레기로 쌓여가고 있어요. 내가 만난 여자 노년의 모습은 초라했지만, 말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당신이 남기고 간 그 무엇과 또 다른 아련하고 찡한, 세상에 필요한 흔적을 남기고 가는 것 같았어요.
나는 많은 세기를 플라스틱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인생 속에 머물렀지만, 우리는 지금 없어지지 않는 개체로 남아 온 인류의 고민거리로 전락했어요. 우리로 인해 부자가 되고, 편리함에 길들여져 살아온 그들이 이제는 우리를 어떻게 소멸시킬지를 고민하고 있죠. 우리가 기어 한 성장과 발전에 대해 재앙이라 말하면서요. 우리 때문에 경제적 풍요와 세상 지위를 가졌던 그들이 이제는 우리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개발해서 돈과 지위를 지키려 하죠. 하지만, 앞으로 아주 오랫동안 우리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개발하고 비용을 절감해 세상 사람들 일상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을 찾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나는 ‘여자’ 당신이 떠난 이 세상의 마지막이 오는 순간까지 가장 오래 남는 존재가 될지도 몰라요. 아니면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아도 우리는 남아 있을지도 몰라요. 여자가 엄마가 되고 엄마가 어머니로 또 노모가 되어 떠났지만, 여자가 시작한 인생이 노모로 끝이 나도 우리처럼 눈에 보이는 재앙이 아닌,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지만, 세상을 훈훈하게 채운 흔적이 세상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세상의 온기를 더욱더 울창하게 하는 여자 당신들의 향기야말로 참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영희 당신은 창조된 여자도 아니고 나처럼 개발품도 아니라고 했죠? 당신의 마지막이 나는 무척 궁금하군요. 여자로 세상에 존재하면서, 플라스틱 나와 같은 대체 할 수 없는 존재의 삶을 살아 내는 당신은 무엇인가요?
플라스틱의 개발은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빠뜨린 것이라고 했던가요? 우리 창조주는 플라스틱으로 인해 창조주께서 만들어 놓은 세상이 피폐해질 수 있음을 알고 계셨지요. 창조주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겉모습 이상으로 영리하고 명석한 머리와 마음을 허락하셨기에 플라스틱을 대체할 수 있는 겸손함이 깃든 대체품을 분명 만들 수 있음을 믿어요.
남자는 세상의 시작이고, 여자는 생명의 시작이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우리는 생명의 존엄과 가치를 증명해 내고, 영적 세상을 일류역사에 남기고 기록한 유일한 인간입니다.
플라스틱은 소멸하지 않는 형태로 자기 존재를 영구적으로 드러내 세상의 근심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지만, ‘영희’ 당신은 당신이 어떤 형태로 어떻게 살았던, 이 거대한 세상 한 여자로 생명을 생산하고 돌보아 지켜 내온, 당신은 결코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아니에요. 당신은 나와 같이 귀히 여김 받아 마땅한 여자입니다. 고단한 삶의 끝에서 당신이 모든 것으로부터 쉼을 얻을 수 있는 헤덴동산에 대한 소망을 품기를 바랄게요.
내 시작이 어떠했든, 내 존재가 ‘여자’ 당신처럼 귀한 존재라 말해 주니 기분은 좋군요. 이제는 내 시작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살아요. 시작은 지나간 날의 일부일 뿐, 지금 내게 있는 것, 내가 머무는 곳, 내가 갈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에 내 하루를 채워가는 것이 그저 내게 주어진 삶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민석이와 연락이 닿지 않아 민석이와 은서가 사는 살림집을 찾아갔어요. 우편함에는 몇 달째 밀린 우편물이 넘치고 집안은 오랜 기간 사람이 살았던 흔적 없이, 두 아이의 결혼사진만 덩그러니 나를 맞이했어요. 민석이가 일했던 학원으로 찾아갔을 때, 기막힌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요. 나는 수소문 끝에 민석이가 감금되어 있는 정신병원을 알아냈고, 경찰과 함께 찾아가 민석이 법적 보호자 신분 어머니로서 민석이를 퇴원시켰어요. 민석이는 매일 은서를 찾아갔지만, 은서 어머니는 우리 민석이를 번번이 내쫓았어요. 얼마 뒤 은서의 싸늘한 시신 앞에 민석이의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원통함이 치밀어 올랐어요. 민석이와 은서는 그냥 사랑했을 뿐인데… 그토록 민석이가 은서에게 어울리지 않는 아이였는지 나는 민석이 어머니라, 은서 어머니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내 아들 민석이를 정신병원에 강제로 가두고, 찾아갈 때마다 폭력을 행사했던 그녀에게 그대로 갚아 주고 싶어 그녀의 집을 찾아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들겼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어요. 나는 이상하게도 그냥 발길을 돌릴 수 없었어요. 알 수 없는 불안한 기분이 들어 경찰에 신고했고, 강제로 문을 뜯고 들어간 집안에는 은서 어머니가 쓰러져 있었어요. 그녀는 은서를 따라가고 말았어요.
민석이는 오랜 시간 함구증과 대인기피증으로 집안에만 있었어요. 표정 없는 얼굴로 생각에 잠겨 아무것도 하지 않는 민석이를 보면서 혹시 은서 뒤를 따라가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되었지요. 그런 민석이 옆을 지키며 종일 혼자 수다를 떨었어요. 옛날이야기부터 텔레비전 드라마, 이웃집 아기 이야기까지 생각나는 대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냥 떠들었어요. 그런 시간이 반년 가까이 지나고 있었지만, 나는 힘들지 않았어요. 민석이의 그 마음을 내가 대신 감당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수고도, 무엇이든 해 주고 싶었으니까요.
“어머니 이제 그만하세요.”
“민석아, 지금 말했니? 내가 헛소리를 들은 게 아니지?”
“네 어머니, 이제 제 마음 다 정리됐어요.”
“민석아, 너 혹시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지?”
“어머니 제가 어머니를 두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은서가 어머니가 참 좋으신 분 같다 했었어요. 은서도 어머니 같은 어머니가 되고 싶다고 했었어요. 어머니 이제 저 괜찮아요.”
그렇게 겨우 회복한 민석이는 손수 신혼집 살림을 정리하고 은서의 흔적을 태워 보냈어요. 그리고 세상 구경 다니고 싶다며 작은 트럭을 구입해 이것저것 잡동사니를 싣고 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죠. 내가 걱정하지 않도록 연락도 자주 주었고, 지방 특상품을 택배로 보내주기도 했어요. 민석이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어요. 목소리도 커지고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웃고 떠드는 것이 즐겁다고 했어요.
매일 들이마셔도 줄어들 줄 모르는 공기는 시간을 먹고사는 모양이에요. 휴일 없이 떠오르는 해는 사라지는 세월의 조각 속을 채우며 확장해 가나 봅니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은 자기 자리를 찾아들 때 비로써 빛을 내고, 바람이 재촉하고 구름이 떠밀어 흘러온 곳은 정해진 그 자리인가 봅니다.
민석이가 보낸 택배 박스를 들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나를 그날따라 동건이는 뛰어나와 내 손에 들려 있는 박스를 건네받지 않고, 멍하니 내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어요. 나는 동건이가 무엇을 알게 되었나 싶었지요. 나는 그저 동건이 옆에 가서 앉았어요.
“어머니, 아저씨께서 몇 달 살지 못하신대요.”
내 예상을 벗어난 이야기 앞에 나도 멍해졌어요. 기철 씨가 간암 말기로 삼 개월도 살지 못해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된다는 편지를 받아본 동건이는 상심이 큰 듯했어요.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어요. 동건이에게 기철 씨,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내가 해야 할 영역이 아니라 여기고, 부자 관계의 연결 고리는 운명에 맡겨 보려 했건만, 남은 시간이 없다는 것이 나를 조급하게 했어요.
숨을 쉴 때마다 공기는 시간을 먹어 치우는 것 같고, 눈 부신 해는 떠오를 때마다 세월의 조각을 태우는 것 같았지요. 미나와 동건이가 바람의 재촉과 구름의 떠밀림으로 흘러와 정해진 그 자리에 별이 되어 찾아들 때가 서서히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어요.
나는 기철 씨가 입원하고 있는 병원 병실 문 앞에 서서 기철 씨 야윈 몸이 침대를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발길을 돌렸어요. 기철 씨 모습이 참으로 낯설어 보였지요. 병원 건물을 나와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기철의 옛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때, 멀리서 병동 건물로 들어가는 동건이 모습이 보였어요. 동건이 모습이 기철의 젊은 시절과 참 많이도 닮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지요. 나는 일어나 병원 밖 버스 정류장을 향해 천천히 걸으며 옛 기억을 떠올렸어요.
둘째를 임신했다고 했을 때, 기철 씨는 하나도 성가신데 임신을 왜 했냐고 반문했어요. 그리고 병원에 가서 수술하라고 했죠. 그의 변질한 모습이 소름 돋게 싫었고, 미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그의 차가움에 둘째가 세상 빛을 본들 아버지라는 인간에게 자식 취급도 못 받을 것 같았어요. 나는 수술하기 위해 산부인과 입구까지 갔다가 발길을 돌렸어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의 성적 학대를 피하고 싶어 태중에 있는 생명을 방패 삼았어요. 그는 임신 중인 나와는 성생활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요. 아이를 출산하는 날도 그는 거리에 나가 있었고, 나는 겁에 질린 미나 손을 잡고 산통을 견디며 택시에 올라 병원으로 가야 했어요. 원하지 않았던 그 생명이 동건이라는 것을 그는 상상이나 할까요? 병원에 누워있는 기철 씨는 참으로 측은해 보였고, 그날따라 동건이에게 더욱더 죄스러웠네요.
그날은 동건이가 집에 들어와 기철의 병실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꺼냈어요.
“어머니 오늘 아저씨 병원 다녀왔는데,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없으신 것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오늘은 아저씨께서 헛것을 보았다고 하시지 뭐예요.”
“이보게 오늘은 내가 기분이 참 좋다네, 꿈을 꾼 것인지 내가 갈 때가 되어 헛것을 보았는지 그 여인이 내 병실에 왔었다네. 몇 번을 눈을 감았다 떴는데 저기 저곳에서 계속 나를 보고 있더군…”
나는 그날 동건이에게 아버지와 누나 미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동건이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방바닥만 응시했어요.
“동건아, 어미가 잘못했니? 어떻게 하는 것이 모두를 위한 것인지 어미는 잘 모르겠더구나… 그냥 살아오다 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더구나…”
“어머니, 어릴 때부터 왜 내가 아버지 이야기를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는지 아세요? 내 기억에 술에 취한 아버지가 나를 학대했던 흐릿하고 어렴풋한 영상이 있어요. 아버지가 어떤 분이든 어머니께서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은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기억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젠가는 아버지에 대해 알게 되겠지만, 어머니의 고통을 되새김질하는 기억이라면 굳이 알고 싶어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어요.”
“네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 사람은 네 친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너를 잠시 입양 보냈던 집 양아버지였을 게다. 학대받는 너를 보는 순간 너를 그 집에 둘 수 없어 데려왔었단다.”
“그랬군요. 어머니가 내가 답답하다고 할 때까지 품에서 내려놓지 않고 안고 계셨던 기억이 있어요.”
“그래, 너를 데려와 절대 내 품에서 떨어뜨려 놓고 싶지 않아 며칠 동안 너를 내 품에서 내려놓지 않았지. 그랬더니 네가 고개를 들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보며 답답하다고, 하더구나.”
“감옥에서 아저씨를 처음 만났을 때, 아저씨는 외로움이 전체를 뒤덮고 있어 보였어요. 어머니 혼자 나를 키웠다고 했더니, 아저씨도 어머니 홀로 자기를 낳아 키웠다고 했어요. 아버지 없이 자랐는데 이리도 잘 자랐냐며 자신은 홀어머니를 원망하다 사랑하는 여인도 자식들도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스스로 외로움 속에 갇혀 버렸다고 고백했어요. 어머니, 교도소에서 그 어른을 통해 나는 내 자리를 찾았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아버지라고 말해 주지 않았지만, 출소 후 지난 십여 년간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고 대화 나누는 것처럼 면회와 편지로 우리는 벌써 부자 관계였던 것 같아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내게 아버지 기억은 좋은 것으로 채워진 것 같으니 말이에요. 아버지에게는 내가 아들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당신께서 성별도 이름도 모르는 자식이 앞에 있었다는 것을 알 때, 나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떠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날 이후 동건이는 기철의 병실에서 살다시피 했고, 바람이 잔잔한 가을 햇살이 예쁜 날, 동건이는 집으로 들어와 검은 양복을 꺼내 입고 내게 병원으로 갈 것을 권했어요. 나는 담담한 마음이었지만, 웬일인지 다리에 힘이 나지 않았어요. 아들을 따라 병원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교도소 앞에서 만났던 고운 김 할머니를 스쳤어요. 백발의 머리카락도 고와 보이는 김 할머니는 많이 야윈 모습으로 검은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있었고, 승용차 뒤에는 응급 차량이 준비되어 하얀 천이 덮인 시신 한 구를 싣고 있었어요. 김 할머니 사연이 문득 떠올랐고, 할머니 아들도 수감 중에 사망했나 싶었지요. 동건이 안내로 시신 보관실에 내려갔을 때, 기철 씨의 시신은 보호자에게 인계되었다고 했어요. 나는 그때 서야 김 할머니가 기철 씨 어머니, 내 시어머니였음을 직감할 수 있었어요. 빠른 걸음으로 병원 건물 밖으로 나갔지만, 차는 이미 사라진 뒤였어요. 동건이는 인계해 간 보호자 신분을 알아보고 싶었지만, 병원에서는 개인정보를 유출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어요.
우리는 걸어온 길을 다시 걸어가 택시에 올랐어요.
“동건아 그 사람 마지막 말은 뭐라고 하든?”
“그냥 편안하시다 하셨어요. 그리고 제게 고맙다고 하셨어요.”
“너는 괜찮니?”
“어머니,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했다는 것은 진실이에요. 그 방법이 어머니를 힘들게 했겠지만… 아버지는 우리를 외면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와 속해지는 법을 몰랐을 뿐이에요. 수감 생활하면서는 떠올리고 생각하는 것조차 우리에게 면목이 없었을 거예요. 아버지도 이제 자유로움으로 가셨으니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는 괜찮아요?”
“글쎄다, 왜 이리 그 사람이 가엾고 고마운지 모르겠구나…”
내가 여자 당신과 플라스틱에게 말했던 것처럼 나는 기철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사랑했던 사람에게 버려져 변화를 꾀한 내가 선택한 수단에 불과했지요. 그 속에서 얻은 미나와 동건이를 위해 그저 살아왔을 뿐인데, 오늘은 미나와 동건이 같은 생명을 내게 주고 간 기철 그 사람에게 참으로 고맙고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