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국민학교 4학년을 시작할 때쯤,

by 조은이

내가 국민학교 4학년을 시작할 때쯤, 아버지는 다니던 사료 공장을 그만두고 농사일을 시작하겠다는 고집으로 엄마와 다툼의 강도가 심해졌었다. 아버지 출퇴근 자전거에 붉은 천 조각에 ‘투쟁’이라는 검은 글자가 적힌 띠를 달고 다닐 무렵이었다. 어른들 말로는 공장에 다니는 아저씨 한 사람이 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있었고, 그 일로 공장 파업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아버지 자전거에 묶긴 붉은 띠를 보고 아버지에게 물었었다.

“아버지, 이건 왜 달고 다니는 거야?”

“아버지 하고 같이 일했던 아저씨가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다 사고 나서 죽었는데, 회사에서는 그 아저씨 부주의로 난 사고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아무런 보상을 해 줄 수 없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아버지 같은 동료들이 회사에 항의하는 거야.”

“회사 사장 나쁜 사람이네? 나도 책가방에 띠 묶어 다닐까? 내 친구들한테도 달고 다니라고 할게.”

아버지는 나를 번쩍 들어 자전거 뒷자리에 앉히며 말했었다.

“용남아, 네가 어른이 되면 이런 세상에서 안 살아야지. 이런 건 안 배워도 된다.”


한 달 한 달만 채우면 월급이 나오고 잔업 수당이 쏠쏠한 공장을 그만두고 갑자기 농사를 짓겠다는 아버지를 엄마는 할머니와 합세해 공장으로 돌아가길 설득했지만, 아버지는 결국 집에서 멀지 않은 산골에 홀로 들어가 농사일을 시작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자발적 퇴사가 아닌 일방적 해고를 당한 것이었다. 그 당시 아버지가 다녔던 사료 공장은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는 지방 소기업이었다. 근로자들의 불행한 사고와 임금 체납이 빈번했고, 근로자들 복지는 열약했었다. 근로자들의 정당한 파업을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불법 폭동으로 취급되는 시대였다. 파업에 동참했던 근로자들에게 앞으로는 절대 파업하지 않겠다는 반성문을 제출하도록 했고, 살길이 막막했던 근로자들은 반성문을 쓰고 공장에 복귀했지만, 아버지는 반성문을 쓰지 않았었다. 아버지는 불법 폭동 주동자로 몰려 해고당하고 말았었다.


합의한 별거도 두 집 살림도 아니었지만, 엄마는 가끔 내게 아버지 반찬과 옷가지를 챙겨 가져가게 하면서 오만가지 불평을 쏟아내며 팔자타령을 했었다.

“네 아버지 말 없는 표정으로 몸에 좋지도 않은 담배만 피워대는 거 보면 내 속이 얼마나 화딱지 나는지 알아? 도대체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가 있냐고! 내 팔자에 무슨 월급쟁이 남편 밑에서 호사를 부리겠어. 반찬은 도착하는 대로 냉장고에 넣고, 냉장고에 있는 빈 통은 바로 챙겨서 가방에 넣어. 그리고 빨래 담아 놓은 가방은 그냥 들고 오면 돼. 팔자에도 없는 두 살림을 뭐 하는 짓인지...”

“엄마는 맨날 똑같은 말을 잊어버리지도 않고 해?”

“시끄러워 네가 뭘 알아.”

엄마는 꼬박꼬박 아버지가 잘 먹는 반찬을 만들어 챙기고, 구멍 난 아버지 옷가지를 꿰매고 깨끗하게 빨아서 보내면서 왜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엄마는 버스비에 불량식품 하나 정도 사 먹을 수 있는 얼마의 돈을 더 주었고, 나는 버스표를 끊고 남은 돈으로 별사탕이 들어 있는 뽀빠이 과자와 딸기 맛 풍선껌 앞에서 망설이지만, 갈 때는 풍선 껌을 올 때는 아버지 주머니 동전을 얻어 뽀빠이 과자를 사 먹었었다.

탁한 매연을 뿜어내는 엔진 소리가 요란한 버스는 터미널을 벗어나 잠시 1차선 아스팔트 도로를 지나고, 비포장 길로 들어서면 하천을 가로지르는 오래된 낡은 교각을 지나간다. 수풀이 우거진 교각 아래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개울 물소리에 화음을 맞추듯 사뿐거리고, 돌부리를 밟고 지나치는 버스에게 성난 아우성을 외치는 길가에 빼곡한 중구난방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보면서 나는 웃음이 터지곤 했었다. 풍선껌을 씹으며 덜컥거리는 산골길 버스를 타고 삼십여 분 정도 가는, 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시골 풍경과 버스 안 산골 마을 어른들 수다를 듣는 것이 내게는 소풍 가는 것처럼 즐거웠었다.


산골 마을 몇 안 되는 가구들은 모두 약초 농사를 짓고 있었고, 아버지도 얼마의 땅을 빌려 익모초(益母草) 재배를 시작했었다. 산 중턱 아래 볏짚과 흙으로 지어진 양철 지붕 쓰러질 것 같은 집에서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허름한 작업복 차림으로 밭에서 땀 흘리는 아버지 모습을 보고 짠한 마음이 치밀어 불쑥 말했었다.

“아버지, 아버지가 거지야? 왜 그러고 있어?”

이런 내 말이 아버지를 민망하게 했던지, 내가 올 때쯤이면 면도 정도는 하고 말끔한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었다. 토요일 오후 버스를 타고 가서 일요일 오후 버스를 타고 나오면서, 나는 아버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자식이었다. 산골 어둠이 무서워 아버지 옆에 꼭 붙어 잠이 들었고, 오줌이 마려울 때는 아버지를 깨워 마당인지 밭이였는지 모르는 흙바닥에 용변을 보면서 아버지를 옆에 세워 두었었다. 산짐승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는 아버지에게 무슨 이야기든 하라며 닦달했고, 아버지는 약초꽃에 얽힌 설화나 전설을 들려주었었다.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온다.’라는 익모초의 전설.

옛날 어느 마을에 가난한 과부와 아들이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낳고 긴 세월 병이 들어 의원이 주는 약초를 달여 먹었지만, 형편이 어려워서 약을 계속 쓸 수 없었다. 아들은 의원에게 약초를 구할 수 있는 곳을 알려 달라 간청했지만, 의원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소년은 약초를 찾기 위해 여러 날 산에 올라 약초를 찾아다녔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무더위에 약초를 찾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길가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마침, 지나던 스님이 소년을 발견하고 밭 옆에서 뜯어온 풀을 짓이겨 즙을 내어 소년에게 먹였다. 그러자 소년은 회복되었고, 스님은 사라졌다. 자신을 살린 풀을 보니 의원에게 받은 약초와 똑같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고, 소년은 밭 옆에 널려있는 흔한 풀을 비싸게 팔던 의원이 원망스러웠다. 풀을 한 짐 배어들고 와 어머니에게 달여 먹이자 얼마 후 어머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그래서 효자가 어머니를 이롭게 한 풀이라는 뜻에서 '유익할 익(益) 자와 어미 모(母) 자를 합쳐서 익모초(益母草)'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당귀의 전설.

옛날 어느 산골짜기 작은 마을에 마음씨 고운 소녀가 살았고, 소녀는 어여쁜 처녀가 되어 산 너머 큰 마을 부잣집으로 시집가게 되었다. 시집살이가 고단했는지! 풍토나 기운 때문이었는지! 여인은 냉병이 생겨 아이도 못 낳고 병 앓이만 하다, 결국 시집에서 소박맞게 되었다.

여인은 친정으로 돌아가는 길에 산을 넘으며 허기진 배도 달랠 겸, 향 좋은 어떤 풀을 뜯어먹었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병증이 호전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친정에 와서도 계속 그 풀과 뿌리를 달여 마시며 냉병을 치료했고, 건강한 몸을 되찾아 다시 시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고 한다.

하여 사람들은 그 이후에 몸이 약해 시집에서 소박맞고 온 여인들은 이 풀을 먹으면 당연히 시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으로 ‘마땅할 당(當)’에 ‘돌아올 귀(歸)’ 당귀(當歸)라 불렀다고 한다.


'할미꽃'이라고 붙여진 꽃의 유례가 있다.

옛날 깊은 산골에 할머니와 두 손녀가 살고 있었다.

두 손녀 중 첫째는 예쁘지만 마음씨가 고약했고, 둘째는 못났지만 마음씨가 굉장히 고왔다. 시간이 흘러 시집갈 나이가 되어 첫째 손녀는 이웃 동네 부잣집에 시집을 가게 되었고, 둘째 손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성실한 산지기에게 시집가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 할머니가 병들고 쇠약해져 혼자 살기가 힘들어져 이웃 동네 큰손녀 집을 찾아갔지만, 큰손녀는 할머니를 푸대접했다. 할머니는 큰손녀 집에서 나와 먼 곳 높은 산꼭대기에 사는 작은손녀 집으로 향했고, 굽이굽이 험한 언덕을 오르다 고갯마루에 쓰러져 그대로 숨을 거두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마치 늙고 병들어 힘없는 할머니와 꼭 닮은 꽃이 피었는데, 그것을 '할미꽃'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름도 모르는 풀을 찾겠다고 매일 산속을 헤매지 말고, 일해서 돈 벌어서 약초를 사면 되지? 병약한 며느리를 내쫓는 시댁에 왜 돌아가야 해? 힘도 없는 할머니가 왜 험한 산골길을 가다 죽냐고? 착한 손녀딸에게 편지 보내서 오라고 했으면 왔을 텐데…. 아버지는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알게 됐어?”
“대구 어른댁에 살 때 주워들은 이야기지.”

“아버지는 왜? 대구 어른 집에서 살았어? 아버지의 아버지, 우리 친할아버지는 어디 있었어?”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는 6.25 한국 전쟁 때 헤어졌다고 했다. 피난 올 때 할머니는 아버지를, 할아버지는 큰아버지를 데리고 대구 친척댁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끝내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는 오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어려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할아버지는 왜 큰아버지만 데리고 가서 돌아오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약방을 했던 대구 친척댁에서 할머니와 아버지는 오랫동안 더부살이를 했고, 약방 댁 친척 어른을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했다. 아버지가 중학생 때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월북자 명단에 있음을 알게 되었고, 살던 친척 댁에서도 나와야 했다고...

“대구 어른이 할머니 하고 아버지 쫓아냈어? 대구 어른이 미웠겠다! 근데, 월북자가 뭐야?”

“전쟁 나서 피난 왔다가, 고향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란다. 고향 집이 북에 있어서”

“할아버지 하고 큰아버지 공산당이야?”

“할아버지는 농사꾼이었고, 형님은 7살인가 그랬지.”

“공산당이 아니잖아. 집에서 살다가 전쟁이 나서 잠시 피했다가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게 죄야?”

“그때는 지금보다 더 엄혹한 시절이었지.”

아버지는 친척 어른이 학비를 보태주어 학업을 겨우 마칠 수 있었다고 했다.

나는 전쟁 통에 헤어진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왜 ‘월북자’라 말하고, 어떤 문제가 되어 할머니와 아버지가 친척댁에서 나와야 했는지 이해되지 않았었다. 아버지는 옛 생각에 잠긴 듯 더는 말이 없었다.


집에 와서 언니와 엄마에게 아버지가 들려준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이야기를 말해 줬을 때, 엄마는 쓸데없는 소리를 애한테 했다고 옆에 있지도 않은 아버지에게 화를 냈고, 언니는 엄마 눈치를 살피고 나를 흘겨보며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 옮기지 말라고 했었다.


나는 아버지 농사일을 가장 잘 돕는 아들 같은 딸이었고, 아버지는 이웃들에게 딸이라도 용띠라서 아들 못지않다고 했었다. 아버지는 그런 내가 자주 오길 바랐지만, 엄마는 내가 아버지에게 가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약초 농사를 한해 망치면 돌아올 것이라 여겼지만, 아버지는 내가 6학년을 시작할 때도 산 동네에서 나오지 않았고, 엄마는 방이 3개인 집에 방 한 칸을 배가 불뚝한 신혼부부에게 세를 주었었다.

이전 01화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 4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