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 45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유엔군 측 제3초소 앞에서 미군 장교 2명과 사병 4명,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으로 이루어진 11명의 장병은 한국인 노무자들 미루나무 가지치기 절단 작업을 호위하고 있었다. 이때 북한군 장교 2명과 여러 명의 사병이 나타나서 가지치기 작업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UN 측은 거부했다. 얼마 후 자동차로 증원된 북한군 30여 명이 몰려와서 미리 준비해 온 도끼와 쇠망치를 휘둘러 2명의 미군 장교를 죽였다.
온 나라가 텔레비전 뉴스와 라디오 속보를 들으며 북한 괴뢰군에 대한 분개로 치를 떨고 있을 때, 엄마도 라디오 스피커에 삿대질하며 쌍스러운 분을 참지 못하다, 갑자기 진통이 시작되어 나를 낳았다. 내 위로 여섯 살 위 언니와 네 살 위 오빠가 있었고, 태어날 때부터 심장 질환을 앓은 병약한 오빠가 없었다면 아버지 엄마는 나를 낳을 계획 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옛말 때문이었는지! 언니에게 아버지와 엄마는 심적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언니는 그런 아버지 엄마 신뢰에 보답이라도 하듯, 우수한 성적표와 상장으로 안방 벽 한쪽을 도배해 주었었다. 오빠는 태어나서부터 서울 큰 병원을 오가는 것이 일상이었고, 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끝내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다고 했다. 약한 아들을 둔 아버지와 엄마는 내 태동이 하도 요란해서 76년 병진년(丙辰年) 붉은 용띠, 건강하고 튼튼한 아들을 출산할 것이라 굳게 믿었고, 내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용띠 아들이라는 이름의 ‘용남’이라는 이름을 지어놓고 불렀다. 나는 울음소리가 우렁찬 딸이었고, 할머니는 드센 용띠 딸년이 태어나서 쥐띠 오빠를 잡아먹었다며 나를 곱게 보지 않았지만, 내 이름은 용남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시절 아들을 얻기 위해 여자아이 이름을 남자 이름으로 지어 부르는 일이 흔했었고, 딸을 그만 낳기 위해 불리는 이름에 기원을 담는 집이 많았었다. 정남이는 정애로 남덕이는 남주로 복덕이는 정은이로 막순이는 은주로 어른이 되어 개명했지만, 나는 그냥 용남으로 살았다.
내가 딸로 태어나는 바람에 엄마 아버지는 할머니 손자 욕심을 거스르지 못하고 동생을 계획해야 했었다. 몸이 약한 79년생 양띠 여동생 영미가 태어났을 때도 팔자 사나운 붉은 용띠 언니 기(氣)에 눌려 동생도 약하게 태어났다는 어이없는 소리를 듣곤 했지만,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
엄마는 군인들이 동원된 나라에서 하는 도로 공사 현장에 돌 골라내는 일을 주로 했고, 그런 공사판에 영미와 나를 데리고 다녔었다. 우리는 흙먼지에 뒤엉켜 자갈을 만지고 빨며 우리처럼 나와 있는 애들과 엉겨 붙어 놀았지만, 다행히 몸이 상할만한 사고 같은 것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하고부터는 영미만 데리고 다녔지만, 엄마는 학교 끝나는 대로 엄마 일터에 와서 동생을 돌보라는 엄한 명령을 내렸고, 나는 책가방을 맨 채로 엄마 일터에 가야 했었다. 영미가 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더는 오지 말라는 엄마 잔소리가 있었지만, 오후 쉬는 시간에 엄마에게 별 사탕이 들어 있는 군인 건빵과 우유가 나오는 간식을 노리고 우리는 한동안 엄마가 일하는 곳을 찾았었다. 엄마가 간식을 집으로 챙겨 갈 테니 오지 말라고 여러 번 야단쳤지만, 엄마의 간식은 집으로 오는 순간 공부 잘하는 언니 입으로 들어갈 것이 뻔했기에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었다. 엄마 일터에 가서 놀고 있다 보면 더운 여름날은 쭈쭈바를, 추운 겨울날은 따뜻한 호빵을 사주는 날도 있었고, 엄마와 친한 조장 아줌마가 돌리고 남는 간식을 우리 가방에 슬쩍 쑤셔 넣어 줄 때도 있었다. 가끔 군인 아저씨들이 아이들 무리에 와서 목마도 태워주고 재밌는 장난을 치기도 하는, 우리는 엄마 일터에 비비고 있는 것이 이득이었고, 군인 아저씨들이 놀아주는 놀이터를 포기하지 않았었다. 내가 조금 자라서 엄마 돌 바구니에 보탬이 됐을 때, 엄마는 나를 본격적으로 부려 먹을 요량으로 바구니 하나를 슬쩍 안겼지만, 나는 엄마 계략을 알아차렸고 엄마 일터로의 발길을 멈췄었다.
1970년부터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범국민적 지역사회 개발 운동으로, 근면·자조·협동을 내세워 주민들을 동원한 운동이었다. 새마을 운동의 성격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농촌지역 개발 정책으로 보는 견해와 도시지역까지 포함하는 사회개발의 일환으로 보는 견해, 총체적인 국가 발전을 지향하는 범국민운동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었다. 정부의 지원 아래 농촌개발 사업으로 시작했지만, 공장·도시·직장 등 점차 한국 사회 전체의 근대화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생존에 허덕여야 했던 가난한 서민들의 노동력 착취와 고용주의 죄의식 없는 인권유린이 팽배했던 것도 숨길 수 없는 시대의 그늘이었다. 80년대 이후 정부 지원이 감소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향력이 줄어들었지만, 국가사업이라는 허울 속에 민영화 기업들의 횡포는 쉬이 근절되지 않았었다. 고속도로 공사판에 주민들과 군인들을 동원했던 시절, 엄마는 젖먹이 영미를 등에 업고, 아장아장 걷는 나를 데리고 다닐 수 있었던 공사판 일자리가 소중했고, 나라에 고맙기까지 했단다.
엄마는 지독하게 가난한 집 맏딸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미싱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야학에서 중학교 졸업장을 딸 수 있었다고 했다. 사실 야학에 가게 되었던 것은 학업에 대한 뜻이 있었다기보다는 대학생 선생님들이 잘생기고 예뻐서 당신도 그런 지적인 대학생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공장이 문을 닫는 바람에 고등학교 졸업장은 따지 못했고, 약방 잡부 일을 소개받고 갔던 한의원에서 아버지를 만났다고 했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던 아버지가 엄마의 마음을 붙잡고 말았다고... 엄마는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 교복에 홀라당 넘어갔다고 말하곤 했었다.
아버지는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료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가끔 퇴근길에 동네 공터에서 남자애들과 말뚝박기를 과격하게 하는 나를 불러 태우고 동네 한 바퀴 자전거 드라이브를 시켜주며 말했었다.
“용남아, 여자애가 남자애들하고 말뚝박기가 뭐냐?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아버지, 내가 다친다고? 남자애들이 나보다 작아서 어이없이 처박히고 넘어진다니까, 얼마나 웃기다고.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는 괜찮아?”
아들이 아닌 아쉬운 딸이었지만, 또래보다 몸집이 크고 거침없는 성격으로 활력이 넘쳤던 나를 아버지는 어디든 데리고 다니고 싶어 하셨다. 가끔 엄마와 다툼이 있는 날 밤이면 동네 삼거리에 있는 포장마차에 가서 닭똥집과 소주를 마실 때도 나를 옆에 앉혀 놓고 맛있는 라면을 시켜주었었다.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거친 손에 빨간 매니큐어를 바르고 포장마차 손님 아저씨들에게 요상한 콧소리를 내는 포장마차 주인아줌마가 내 옆에 앉아 내 입에 닭똥집 하나를 넣어 주려 했지만, 내가 입을 꼭 다물고 노려보는 것을 보고 말했었다.
“노려보는 네 눈이 무서워서 네 아버지 술도 한 잔 못 따라 주겠다. 네 아버지는 너 같은 딸이 있어 좋겠다. 딸 없는 사람 서러워서… 네 아버지 빈 술잔은 네가 채워드려라.”
아버지가 가끔 침울한 얼굴로 마실을 나설 때면 나는 그냥 아버지 뒤를 따랐고, 내가 아버지 걸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는 엄마가 눈치 주며 아버지를 따라나서게도 했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왜 그리도 싸웠는지 모르겠지만, 자리를 피해 집을 나와서 줄담배 연기를 연신 띄우는 아버지가 목소리 큰 엄마에게 늘 지는 것 같아 어린 내 눈에는 측은해 보였었다. 내가 아버지를 쫓아와 아버지 손을 잡으면 아버지는 그제야 담뱃불을 끄고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었다.
“뭐 하러 나왔어?”
“아버지, 담배 좀 그만 피워. 엄마는 목소리만 크면 장땡이라니까, 나한테도 맨달 뭐라고 해.”
“엄마가 그래?”
“응, 언니는 공부도 잘하고 엄마 마음에 쏙 들게 하는데, 내가 맨날 엄마 속만 뒤집어 놓는다나? 괜히 미워서 그러는 거지 뭐.”
엄마는 언니에게는 말도 꺼내지 않는 집안 살림을 내게 시키면서 엄마식으로, 엄마 방법대로 하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야단을 치고 잔소리를 했었다.
설거지할 때는 수세미에 퐁퐁을 붓지 말고, 설거지통에 퐁퐁을 풀어 거품을 만들어 며칠을 사용해야 했고, 빨래는 고무다라에 하이타이(가루비누)를 풀어서 옷가지를 담겨두었다가 다라에 빨래판을 넣어 옷을 하나하나 건져 치대야 했었다. 나는 수돗물을 콸콸 틀어 놓고 수세미에 퐁퐁을 푹푹 짜가면서 설거지했고, 빨래도 빨랫비누를 척척 발라가며 대충 치대서 후다닥 헹궈서 널었다. 엄마는 그런 내게 뭐든 대충 하는 버릇이 있다고 내가 해둔 설거지와 빨래를 다시 하면서 오만가지 잔소리를 퍼붓곤 했었다. 그러면서도 매번 언니가 아닌, 내게 시키려는 엄마가 정말 이해되지 않았었다.
“용남아, 저 길가에 있는 잡초들이 쓸모없어 보이지?”
“잡초는 쓸데없는 풀이라서 뽑아 버리는 거잖아.”
아버지는 길가에 있는 풀도 각기 제 쓸모가 있어 그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민들레는 소염, 해독, 이뇨 작용에 도움을 주고, 강아지풀은 한방에서 구미초라 하여 중풍, 종기, 부스럼, 충혈된 눈에 사용한다고 했다. 바랭이풀은 눈과 귀를 밝게 하고, 탈모 치료, 기억력감퇴를 억제하고, 동방사니 풀은 주로 호흡기, 신경계 질환 등을 다스리는 데 쓰인다고 했다. 쥐어뜯어 뽑아 버려도, 어느새 담장 틈 사이를 뚫고 생겨나는 민들레, 강아지풀, 바랭이, 동방사니 같은 잡초 풀을 엄마는 징그럽다고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떤 풀도 버릴 것이 없다며, 사람도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세상에 쓰임이 있다고 말했었다. 그때는 아버지와 내가 같은 편을 먹는 동지 같았었다.
나는 열등생에 가까운, 아니 지독한 열등생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 아이들 대부분은 유치원에 다니지 않았고, 나는 국민학교 입학 전 아버지를 통해 내 이름 석 자 정도만 익히고 학교에 들어갔었다. 국민학교 1학년 때는 받아쓰기 10문항 100점 만점에서 10점 20점으로 매일 나머지 공부를 해야 했고, 2학년 때는 구구단을 제대로 외우지 못해 교실 마룻바닥을 초 칠해서 닦는 체벌을 자주 받았었다. 우리 반 마룻바닥은 나와 몇 명의 열등생이 광을 냈다고 할 만큼, 우리는 마룻바닥 광내기에 능숙한 광순이 광돌이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반들반들한 교실 마룻바닥이 우리 최고의 놀이터가 되었다. 힘껏 뛰어 미끄러지고, 가위, 바위, 보로 마룻바닥 닦는 마른걸레 썰매를 타고, 끌고 밀며 넘어져 뒹굴며 놀았었다.
내가 언니가 다녔던 국민학교에 1학년으로 입학했을 때, 언니는 중학생이 되어 학교를 떠났다. 국민학교 6년 내내 반장과 전교 회장을 도맡았던 언니는 지나온 자기 명성 때문이었는지! 중학교에 가서도,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뭔가 심기가 불편한 날은 30센티 자를 매로 들고 나타나, 갑자기 영미와 나를 불러 앉혀 놓고 숙제 검사를 하거나, 배우지도 않은 교과서 내용 선행 학습을 시키며 괜한 신경질을 부리곤 했었다. 나는 그런 언니의 통제적이고 억압적인 독재 행태에 맞설 자신도 없었지만, 굴복하고 싶지 않아 언니가 학교에서 올 때쯤 되면 언니 눈에 안 띄는 곳에 숨어 있거나, 동네 아이들과 해 질 때까지 놀다 들어가곤 했었다. 영미는 큰 언니 30센티 자의 공포에 붙잡혀 눈물을 훌쩍이면서도 큰언니 부당한 독선을 참아냈고, 그 덕에 영미는 나보다 학업 성적이 좋은 편이었다. 언니는 공부도 못하고 성질도 제 멋대로인 내가 창피하다며 어디 가서도 누구에게도 자기 동생이라 말하지 말라고 했었다. 나는 언니 말을 듣지 않았다. 친구들에게는 전국 학력고사에서 늘 도에서 일등을 놓치지 않는 언니 자랑을 늘어놓으며 우쭐댔고, 선생님들에게도 학교를 떠나 없는 언니 이름을 들먹이며 우등생 언니를 둔 동생임을 각인시켰었다. 어떤 선생님은 언니와 내가 터울이 멀어 엄마는 같으냐고 물어보기도 했지만, 대부분 선생님들은 내게 좋은 머리로 언니처럼 공부는 하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한다며 걱정스러운 관심을 표현했었다. 전국 수재 우등생의 열등생 동생이라는 꼬리표가 나는 그리 싫지 않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