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상실의 숲 12화

12. 폭우가 지나간 숲

by 조은이

미선은 아침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봉지 커피를 타서 서재로 들어가는 동호 뒤통수에 대고 나지막하게 혼잣말했다.

“밥을 제대로 먹고, 커피를 드시지…”

김동호는 들고 들어온 머그잔을 책상에 올려놓고 박 권사의 말을 떠올렸다.

“목사님, 부목사님에게 6개월 정도만 머물도록 말씀드리고 집을 빌려 드렸는데, 아직도 집을 비워 주지 않아 어찌해야 할지… 참 난감합니다. 당장 다음 주에 사돈댁 내외가 들어와서 3개월 정도 지내실 예정이라 이번 주에는 집을 비워 주셔야 청소라도 좀 해 둘 텐데… 얼마 전에 부목사님에게 밀린 렌트비는 안 주셔도 괜찮다고 말씀드리고 저희 형편 여쭙고 양해를 구하였는데, 아직도 별말씀이 없어서 속이 탑니다. 부목사님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집 비워 달라는 말을 꺼내는 것이 꼭 교회 상황 때문인 것 같아 더는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1년 전 박 권사는 두 아들을 위해 땅을 사서 두 채의 집을 지어 올렸다. 한 채는 결혼한 첫째 아들 내외가 들어가 살고 있었고, 다른 한 채는 여자 친구를 둔, 둘째 민철을 위해 비워 두었다. 그때 부목사 신은석이 한국에서 입국할 예정이었으나, 지낼 만한 거처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땅한 집을 찾을 때까지 지낼 수 있도록 내어주었었다. 신은석은 6개월 안에 집을 얻어 나가겠다 약속했지만, 6개월을 넘기고도 박 권사에게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박 권사는 민철의 졸업도 아직 남아 여유가 있다고 여기며 그저 목회자 가정에 대한 배려로 지켜볼 뿐이었지만, 신은석에 대한 불신의 불편함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동호는 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사님, 접니다. 시간 되시면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네, 말씀하십시오.”

“박 권사님께서 집 때문에 걱정이 되는 모양입니다. 어떻게? 지낼 곳은 구하셨습니까?”

“목사님, 저희 형편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 집에 계실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대책은 있습니까?”

“권사님과 직접 이야기하겠습니다.”

“부목사님, 박 권사님 댁에 다음 주에 손님이 오는 모양입니다. 권사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도 많은 배려를 하신 겁니다. 부탁합니다. 잘 마무리해 주실 것이라 믿겠습니다.”

“제가 권사님과 이야기 나누고 알아서 하겠습니다.”


은석은 같은 목사로서 현실적 어려움을 원칙적으로 풀어가려는 동호도 야속했고, 남편은 한국에서 사업하느라 거의 한국에 나가 있고, 민철과 둘만 생활하는 박 권사의 넓은 집은 비어 있는 방이 여러 개였다. 그런데도 사돈댁을 핑계 삼아 오갈 곳 없는 가난한 목회자 가정을 내몰고 있는 박 권사가 원망스러웠다.

언제나 위급한 상황에 닥치면 조급해진 주희 역할로 처갓집에서 해결해 주었었지만, 이번에는 주희 반응이 예전 같지 않아 은석도 속으로는 무척이나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주희는 두 딸만 데리고 한국 처가로 들어갈지도 모르는, 은석은 불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상황에 직면하면 자신도 예전처럼 주희 기분을 맞추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혜란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목사님, 목사님을 보면 안타까워요. 누군가가 조금만 도와주면 정말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분을 사모님은 왜 목사님을 지원해 주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사모님을 대신해서 목사님 후원자가 돼 드릴게요. 사모님과 아이들 한국 보내고, 몇 년만 공부하고 돌아가세요. 지금은 목사님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목사님이 공부 마치고 돌아가면 환영해 줄 거예요. 저는 정말 목사님처럼 유능하신 분이 생계를 걱정하며 뜻을 펼치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요.”

은석은 어린 혜란이 30대 남자 목사를 회유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어쩌면 혜란이라는 도구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은 아닐까! 착각마저 들었다. 때론 하나님 계획은 세상에서 설명할 수 없는 방법론이 있다 여기며, 혜란의 전화번호를 찾아 눌렀다. 혜란에게 자기 상황에 대해 하소연하며 주희와 아이들은 한국으로 가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흘렸다. 혜란은 자신에게 어떤 기회가 온 듯, 자기는 친구네 집에서 지낼 터이니 한국 가기 전까지 지낼 만한 마땅한 집이 없으면 자기 아파트에 와서 지내라는 말을 남기고 끊었다.

박 권사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어, 주영아,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니?”

“목사님 전화가 계속 통화 중이라…”

“아 그랬구나.”


두어 시간 전 주영과 인숙은 본채에서 콘과 로라의 식탁에서 늦은 아침을 같이 먹었다. 주영이 이사 오고 인숙은 주영의 원활한 영어 실력 덕을 여러모로 받고 있었고, 본채에서 시간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주영은 콘에게 부목사 은석의 부적절한 소문과 딱한 처지를 이야기했고, 콘은 주영을 데리고 은석의 집으로 향했다.


“목사님, 우리 집주인 할아버지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은석 신입니다.”

“반갑습니다. 나는 콘이라고 합니다. 주영에게 목사님 상황을 대충 들었습니다. 우리 집에 비어 있는 방이 몇 개 있습니다. 당분간은 우리 집에서 지내는 게 어떨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 제 아내와 아이들이 외출 중입니다. 아내와 의논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이 집을 비워줘야 한다는 주영의 말에, 멀지 않은 곳이라 제 마음이 급하여 무작정 왔습니다. 오늘 오후라도 연락 주시면 제가 다시 오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콘.”


은석은 자신이 잠시 전에 했던 생각은 까맣게 잊고, 주희에게 전화 걸어 아이들과 빨리 집으로 올 것을 지시하듯 통보했다. 그리고 박 권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권사님, 오늘 중으로 집 비우겠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저희 상황이 그렇습니다. 마땅한 거처는 구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좋은 곳을 예비해 두셨네요. 집 열쇠는 옆집 며느님에게 전하고 가겠습니다.”

“네, 우리 며느리에게 전화해 두겠습니다.”




주영이 심란한 얼굴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인숙: 주영아, 어떻게 됐어?

주영: 언니, 이 입이 문제예요.

인숙: 왜?

주영: 제가 아침에 할아버지에게 부목사님 이야기를 괜히 해서, 부목사님 우리 집으로 이사 오게 생겼어요.

인숙: 할아버지 정말 대단하시다.

주영: 그러니까요. 아침에 할아버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앞장서라고 하는데, 저 정말 당황했다니까요.

인숙: 부목사님은 이사 오시겠대?

주영: 사모님 하고 의논해 보겠다고 하셨지만, 당장 갈 곳이 없으니 오시겠죠.


주영은 전화기를 들고 집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청년부 친구들에게 새롭고 놀라운 소식을 중계하고 있었다. 인숙은 선희가 들려준 신은석, 부목사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가난 때문에 부모의 다툼은 일상이 되어 있었고, 허기진 배와 초라한 차림의 어린 선희는 지은 죄도 없이 언제나 주눅 들어 살았다는 말에 신은석은 그 가난보다 무서운 것은 신분이라고 했단다.


은석은 초등학교 때부터 학업 성적도 우수했고, 출중한 외모만큼이나 사교성이 좋아 교우 관계도 좋았었다. 하지만, 부모의 직업과 형편 때문에 학교 임원으로 선출되고서도 담임선생의 권유로 선출된 자리를 부모 직업이 좋거나 부유한 친구에게 양보해야 했었다. 은석이 중학생이 되어 학기 초에 조사하는 가정형편 설문지에 부모 직업란에 가난한 소작농[小作農]이 아닌, 회사원으로 적었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중소기업 임원으로 기재했었다. 중학교 때부터는 선출된 임원 자리를 양보해야 할 일도 없었고, 성적이 좋은 은석에게 어떤 교사는 기업 임원 아버지 머리를 물려받아 똑똑하다는 칭찬을 동급생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하곤 했었다.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들은 은석이 왜 그런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뭐든 우수한 학생이었던 은석을 굳이 대적하지 않았었다. 서울에 있는 명문대를 입학했을 때, 은석은 부모 직업이나 형편에 대해 더는 숨길 필요가 없다 여겼지만, 드러내지도 않았었다. 어느 날 학교 앞에서 시골에서 올라온 초라한 행색의 어머니 모습을 발견하고, 은석은 친구들과 도망치듯 피해 갔었다. 늦은 저녁 학교 앞으로 다시 갔을 때 변함없이 그 자리를 서성이고 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자취방으로 와서 어머니 앞에서 은석은 울분을 참지 못했었다.


“배운 게 없으면 돈이라도 좀 많이 벌지… 돈 벌 재주가 없으면 배우기라도 하지. 왜 어머니 아버지는… 배움도 재력도 신분도... 어느 것 하나 내 세울만한 게 없어요?”
“은석아, 미안하다. 부모가 돼서 아들 부끄럽게 해서… 다시는 학교 앞에 가지 않으마. 아니 서울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으마. 우리 잘난 아들 정말 미안하구나.”


그날 이후 은석은 부모와의 왕래를 거의 끊고 살다시피 하며, 본인 힘으로 신분 상승을 하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했었다. 고액 과외로 학생 신분으로 큰돈을 벌어 가난의 허물을 벗듯 겉모습 가꾸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었다. 졸업을 앞두고 대기업 취업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모난 좌절감으로 신을 원망했었다. 은석은 실패를 경험하면서 배움이 있어도 돈이 있어서 신분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받아들였고, 더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었다. 소작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소작농의 집에서 자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가난한 소작농의 삶을 묵묵하게 사는 부모는 그저 신이 정해 준 삶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순종적인 종이었다.
은석은 신에게 묻고 싶었다. 육신의 부모처럼 환경에 순응할 수 있는 성품을 자기에게 주지 않고, 왜? 영리한 머리와 과욕으로 가득한 품성을 주어 자신의 신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수에 맞지 않는 세상과 사람들 무리 속을 기웃거리게 하냐고…


인숙은 가난 때문에 초라했다는 선희 이야기도, 신분 상승을 위해 질주해 온 은석의 삶도 자신을 비추는 거울인 것 같아 애처롭게 느껴졌었다.




주영: 언니, 어디세요?

인숙: 주희 사모하고 아이들 데리고 놀이터에 있어. 왜?

주영: 사모님 모시고 빨리 오세요. 집에 혜란이가 부목사님 만나러 왔어요.


주희는 남편, 은석과의 관계를 지속할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스칠 때마다 어린 두 딸이 아빠 이야기를 꺼내곤 했었다. 그리고 친정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은석이 하나님의 종다운 목사가 되기를 기도했었다. 은석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집으로 들어가서 짐을 챙겨 도망치듯 나와 도착한 곳은 오래된 집 방 한 칸이었다. 왠지 모를 안도감과 친정 부모님을 떠오르게 하는 두 백인 노인의 친절함에 주희는 말없이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었다. 로라의 따뜻한 위로와 콘의 용기를 북돋아 주는 직언을 들으며 굳어 버린 마음이 조금씩 녹아내렸고, 은석과의 대화를 통해 부부 관계도 조금씩 회복해 가고 있었다. 은석은 ‘S’ 교회를 그만두고 콘이 소개해 준 호주 교회 파트타임 목사로 섬기기 위한 준비에 분주했었다.


집 앞에 혜란의 승용차가 밉살스럽게 주차되어 있었고, 마당에 있던 로라는 주희에게 다가와 나지막하게 말했다.

“주희, 교회 청년이라는 여자가 와서 은석을 찾길래 은석을 불러 주었는데, 내가 실수한 거야?”
“아니에요. 로라, 제가 알고 있는 교회 청년부 자매예요.”

주희는 로라에게 두 딸을 잠시 부탁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인숙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뒷마당 건너, 본채가 훤히 보이는 주방 창문에 매달려 있다, 인숙을 돌아보며 주영이 말했다.

주영: 언니, 사모님 기분 어때요?

인숙: 자기감정을 잘 드러내는 분이 아니라서 모르겠어.

놀이터에서는 집에 목사님 찾아온 자매가 있다고 했더니, 바로 아이들 챙겨서 집에 가자고 하셨어.

집 앞에 세워진 승용차 보더니, 표정 없는 얼굴이 사늘해지는 정도….

주영: 언니, 저기 봐요. 사모님이 왜 나오지? 헐 이쪽으로 오는 것 같아요.


주영은 헐레벌떡 창문을 닫고 현관 앞으로 갔지만, 벨은 울리지 않았다.

주영이 다시 뒷마당 건너 본채가 보이는 창문을 살며시 열었을 때, 은석이 뛰어나와 두리번거리고 혜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영: 언니, 무슨 상황이지?

인숙: 주영아, 나는 주희 사모 찾아볼 테니까, 너는 로라에게 가서 아이들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려.

목사님 하고 혜란이 둘만 두면 안 될 것 같다.

주영: 알았어요, 언니.


주희가 거실 문을 노크하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을 때, 주희는 얼굴을 돌리고, 급한 걸음으로 들어온 현관문으로 나가 그냥 걷고 또 걸었다.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기를 외치고 소리치면 칠수록 또렷해지고 있었다. 은석과 혜란은 소리 없는 몸싸움 중이었고, 심하게 헝클어진 혜란의 옷매무새와 머리카락 뒤편으로 일그러진 은석의 표정….

주희는 돌아가고 싶었다. 빗속에 갇힌 은석의 차 속으로, 그때 처절하게 밀어내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사모님, 정신 차려요.”

인숙은 차도를 휘청거리며 걷고 있는 주희를 찾았고, 인숙이 주희 팔을 잡는 순간 주희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나를 그냥 내버려 둬요. 그냥 나를 보내줘요.”

“사모, 저 인숙이예요. 저라고요.”

“미안해요, 인숙 자매.”

“사모님,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막 걸어 다녀요.”

“어머, 여기가 어디예요? 우리 애들은요?”

“애들은 집에 있죠.”

“어머, 로라에게 애들 맡기고 왔는데, 빨리 가야겠어요.”

주희와 인숙은 아무 말 없이 걸었고, 주희는 두어 달 전 처음 이사 왔던 그날처럼 로라 앞에서 두 딸을 품에 안고 한참을 울기만 했다.


혜란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차를 몰고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한국으로 보내야 할 것 같다는 은석의 말은 곧 혜란 자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간다는 말로 들렸다. 전화 통화 후 혜란은 은석을 맞이하기 위해 집안 곳곳을 정리하고 커튼과 이불, 소파와 주방 용품까지... 신혼집을 꾸미는 것처럼 들뜬 마음으로 은석을 기다렸지만, 두어 달이 넘도록 은석에게는 한 통의 전화도 오지 않았고, 몇 번이고 은석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번번이 통화가 되지 않았다.

혜란의 부모는 둘 다 유능한 의사였지만, 혜란이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이혼 소송을 시작하면서 혜란의 친권은 아버지가, 양육권은 어머니에게 판결이 났다. 혜란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기숙사가 있는 사립학교로 보내졌고, 중학생이 되었을 때 해외 유학길에 올랐다. 부모의 영향으로 의대에 진학했고, 호화로운 아파트에서 비싼 자동차를 몰며 남 부러운 것 없는 유학 생활을 함에도 혜란은 언제나 외로웠다. 은석은 그런 혜란에게 다정하고 의지 되는 든든한 존재로 자리 잡았고,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고 격려해 주는 은석에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자신도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정을 갖게 되었다. 그런 감정이 튀어나올 때마다 은석은 혜란을 밀어냈지만, 은석이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혜란의 감정은 뿔난 못 땐 아이가 되어 은석을 괴롭히고 있었다.

거실 문 쪽, 조용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 짐을 느낀 순간 혜란은 스스로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헝클 이고, 은석에게 바짝 다가가 노크 소리와 문이 열리자, 몸을 밀착시켜 은석을 곤란하게 했다.
혜란은 자기를 힘으로 제압하고 주희를 따라 나간 은석을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이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지 못한 죄 아닌 죄로 법정에서 서로 자기를 맡지 않겠다 싸우는 부모로부터 버려져도 항변할 수 없었다. 자신이 선택받는 존재가 아닌, 선택할 수 있는 자로 살고 싶었다. 자신이 선택한 은석을 놓치지 않겠다 다짐하며 차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주영: 언니, 사모님이 뭐래요?

인숙: 그냥 아무 말 안 하셨어.

주영: 진짜요?

인숙: 무슨 말을 하고 싶겠어.

주영: 거실 문 닫아 놓고 혜란이와 목사님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모님이 저렇게 울기만 하실까요?


마당에서 두 딸을 품에 안고, 소리 죽여 눈물만 흘리는 주희를 바라보며 로라의 두 눈도 붉어졌다.


그날 이후 주희 얼굴은 표정 없는 사늘함이 지속되었고, 어느 날 새벽 소리 소문 없이 두 딸과 함께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은석은 호주 교회 파트타임 목사로 섬기기 위해 교회 건물 안에 있는 게스트 룸으로 이사 갔고, 콘과 로라의 늦은 아침 식탁에는 변함없이 주영과 인숙이 함께 했지만, 주희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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