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 인숙 언니 생일이라는데, 어떻게 하지?
지연: 언니 생일을 어떻게 알았어?
주영: 주인 할머니 생신 다음 날이 언니 생일이라서, 주말에 할머니가 점심 같이 먹자고 하셔.
혜원: 너는 같은 집에 사니까 작은 선물 하나 해.
주영: 할머니가 지난번에 이삿짐 날라준 청년들도 초대하라고 하셨어.
정수: 할머니 할아버지 참 좋으시더라, 나도 초대받은 거지?
주영: 은근히 부담스러운 거 있지.
지연: 왜?
주영: 솔직히 인숙 언니 알고 지낸 지도 얼마 안 됐고, 이런 이벤트까지 같이 해야 하는 사인가 싶기도 하고.
현석: 주영이 너는 인정머리가 없냐? 누나는 너 진짜 예뻐하던데,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공짜 브런치도 자주 먹는다며? 이럴 때 가벼운 선물 정도 하는 게 예의지.
주영: 언니에게는 우리가 뭘 해줘도 성에 안 차지 않을까? 할머니는 외국분이라 카드 한 장이면 되는데...
그래서 말인데, 우리 조금씩 모아서 언니 선물하고 할머니 선물 함께 준비하면 어때?
이번 주 토요일 점심때야?
정수: 나는 아르바이트 끝나고 따로 갈 테니까, 선물 정하고 금액 말해줘.
현석: 비싼 선물보다 케이크하고 카드 써서 주면 어떨까?
주영: 오빠는 오빠 돈 쓸 생각 하니까 갑자기 부담스러워지지?
정수 오빠가 그렇게 이야기하면 이해가 되는데, 오빠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왠지 돈 아끼고 싶어서 머리 쓰는 것 같다니까.
현석: 나도 정수하고 같은 워킹홀리데이 온 청년이거든.
주영: 오빠는 정수 오빠처럼 고된 아르바이트 하면서 생활비 벌지 않잖아. 집에서 받아 쓰잖아.
우리 모임 때 오빠 돈 쓰는 걸 못 봤다니까.
정수 오빠는 아르바이트비 받을 때마다 과자라도 사 오는데…
현석: 부모님이 보내주시는데, 아껴 써야지.
주영: 정수 오빠처럼 아르바이트하면 되지 왜 부모님께 받아 써?
정수: 주영아, 그만해, 현석이는 공부하잖아.
현석: 정수야, 그냥 둬라. 주영이는 이유 없이 내가 싫은 거야.
혜원: 주영이는 유독 현석 오빠 말에 또박또박 하긴 해.
인숙 언니에게 성경책 없으니까, 성경 한 권 선물하자.
지연: 오~ 좋은 생각이야, 할머니는 꽃다발과 카드, 케이크는 같이 컷 하고.
주영: 좋아, 좋아, 민철이는 올까?
혜원: 민철이는 친구들 생일 파티에도 안 다녀.
지연: 민철이 요즘 무슨 일 있어? 원래 성격이 유한 편은 아니지만,
요즘 부적 신경질적이고 반항적이라고 해야 할까? 말 붙이기가 겁난다니까.
혜원: 엄마, 아빠 대화하는 거 들었는데, 민철이가 박 권사님 속을 좀 썩이나 봐.
주영: 모범생이 왜? 혹 권사님이 민철이 여자 친구 마음에 안 들어하시는 거 아니야?
지연: 설마, 민철이 지난번에 한국 다녀왔을 때 반지 맞춰 왔잖아.
주영: 반지까지 맞춰와서 아직 프러포즈 못 했잖아.
민철이 여자 친구 선교에 뜻이 있는 애라서 권사님이 반대하시는 거 아니야?
혜원: 그런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부목사님 나가시고 이런저런 교회 일이 많아져서 좀 힘든가 봐.
그나마 현석 오빠와 정수 오빠가 그동안 힘이 많이 됐는데, 곧 비자 기간이 끝나서 한국 돌아가잖아.
정수: 사실은 민철이와 현석, 나 셋이서 사막 여행 계획하고 있어.
주영: 좋은 곳도 많은데, 왜 하필 사막이야?
정수: 현석이와 내가 성경에 나오는 광야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사막 같은 곳이 아닐까 했지.
그래서 민철이가 호주 사막 지역에 대한 정보를 주었고, 현석이와 둘이 가 보려 했는데,
민철이가 형들끼리만 가면 무슨 재미냐고? 자기도 끼워달라고 해서
민철이 방학 시작하면 같이 가려고 계획 중이야.
현석: 민철이 여행 다녀와서 프러포즈할 생각인 것 같던데...
혜원: 여행 가기 전에 우리에게 기도 제목 나눌 거 있으면 말해줘, 같이 기도할게.
지연: 정확한 일정 정해지면 말해줘.
정수: 알았어.
인숙은 여기저기 다니는 것도 어느 순간부터 무의미해졌다. 어차피 버리고 떠날 세상에 미련과 흔적을 구석구석에 흘리고 다니는 것 같아 더는 어디를 가도 무엇을 해도 아무런 감정의 파장이 일지 않았다. 집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들으며 동네 산책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로라가 동네에 있는 호주 교회, 외국인을 위한 무료 영어 수업에 대해 알려 주었고, 오전 시간 인숙은 영어 수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중국인 두 명, 말레이시언 한 명, 일본인 한 명, 유럽인 세 명, 인숙까지 학생은 여덟 명인데, 교사는 열두 명의 백인 할머니들이었다. 할머니들 전직은 학교 교사였고, 평균 연령은 칠십 사세였다. 걸음걸이도, 손놀림도, 돋보기 없이는 읽을 수도, 쓰는 것도 버거워 보였지만, 그녀들의 열정만큼은 젊은 현직 교사 이상이었다. 인내를 가지고 서툰 영어를 힘들게 하는 학생의 말을 들어주는 듯하면서도, 자기들 이야기를 학생들 수준에 맞춰 느리고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 그녀들의 수업 스타일이었다.
인숙은 그녀들 삶의 스토리를 듣는 것이 그리 지루하지 않았고, 수다스러운 그녀들로 인해 영어 듣기가 많이 늘어가고 있었다.
평생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퇴직하고, 손주 손녀 학교 공부를 다 가르쳤다는 줄리아는 우리를 대할 때 언제나 유치원생 아동처럼 대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같은 학교 교사인 남편을 만나 남편이 알츠하이머로 10년을 살다 하늘나라로 갔지만, 남편이 늘 그립다는 미셀은 남편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고 했다. 음악 교사였던 마리아는 좋은 곡 가사를 출력해 수업하다 말고, 혼자 아름다운 가사 내용에 심취해 갑자기 노래를 불러 대곤 했고, 수학을 가르쳤다는 리사는 그런 마리아에게 엄한 어조로 조용히 하라는 지적을 자주 했다.
인숙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노년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그녀들은 마지막 남은 열정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을 신으로부터 선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좋아 보였고,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을 노년의 세월을 아쉬워하는 듯 인숙은 그녀들의 영어가 듣기 좋았다.
수업이 끝나고 선희 집으로 향했다.
인숙은 새벽마다 픽업 오는 선희에게 그림 그리는 간단한 요령을 가르쳐 주고, 선희는 인숙에게 골프 개인 레슨을 번갈아 가며 하고 있었다. 교회에서 선희 집까지는 걸어서 삼십여 분 정도였고, 선희가 시간 맞춰 픽업 오겠다고 했지만, 인숙은 사실 선희와 함께 있는 시간이 그리 편치도, 자유롭지도 않았다. 요령 없는 터치로 종이를 채워만 가는 그녀의 아집스러운 손놀림을 풀어 주고 싶었고, 골프도 선희의 고집스러움에 매여 배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림 가르쳐 줘서 정말 고마운데, 나는 뭘 해주지? 나 골프 잘 치거든, 골프 배워볼래요?”
“아니에요. 그렇게 호사스러운 운동 적응 안 돼요.”
“한국에서는 비싼 운동이지만, 여기는 서민 운동이니까 좋은 선생님 옆에 있을 때 배워 나요.”
선희는 인숙의 생각과 감정보다는 자기가 맞다 여기면 모두가 좋은 것이라 단정 지었다. 인숙은 그런 선희와 대화가 많아지면 질수록 폭넓은 대화가 어려운 답답함과 선희가 옮다 여기는 것을 강요받는 느낌인 것 같아 불편하고 피곤했다. 그림 수업이 끝나면 자연스레 골프 연습장에 가서 백 개의 골프공을 치고서야 만남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언니, 오늘은 골프장 못 가겠어요. 로라가 할 이야기가 있다고 저녁녘에는 들어오라고 했거든요.”
“응 그래? 그럼 자기 데려다주고, 나는 그림 좀 더 그려야겠다.”
선희 차에서 내리는 인숙을 콘이 기다렸다는 듯 맞이하며, 늘 그랬듯이 인숙 이마에 입맞춤했다.
“인숙, 오늘은 어땠어?”
“좋았어요. 콘은 어땠어요?”
“나야 언제나 좋아, 로라가 기다리고 있어.”
콘과 주방으로 들어오는 인숙에게 로라도 인숙 볼에 입맞춤하며, 저녁 식사를 같이 먹기를 권했다. 생선 요리와 새콤달콤한 소스가 뿌려진 다양한 찐 야채, 콘이 직접 만든 레드 와인이 곁들여진 식탁이 끝나 갈 무렵 주영이 들어왔다. 로라와 주영이 묘한 눈빛을 주고받는 것을 본 인숙은 별채에 생일 깜짝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토요일 점심 파티 때 인숙과 로라를 위해 케이크 컷을 같이할 계획이었지만, 로라의 당부로 주영과 지연, 혜원, 정수, 현석은 금요일 밤 인숙의 깜짝 생일 파티를 준비했다.
인숙에게 생일은 별 의미 없는 많은 날 중 하루였다.
누군가 생일을 알아주고 챙겨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알 수 없는 답답함으로 그저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주어진 고단한 삶을 견뎌야 하는 현실이 유독 생일날 소름 끼치도록 싫었었다. 생명의 존엄성은 같다고들 하지만, 그 말은 그저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이론일 뿐, 한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 존엄성의 가치는 차별화된다. 그 생명이 어디서 어떤 환경에서 누구의 보호 아래 존재하는가 에 따라 한 인간의 가치는 달라지고, 그 가치는 절대적이다. 인숙은 단 하루, 자신이 잉태되던 순간이 없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품고 살았고, 낳아 준 부모도 같은 피를 나눈 자매도 굳이 챙기려 하지 않았으므로 특별한 의미 없는 그저 그런 날이었다. 하지만, 어린 입시 준비생들은 그런 날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언제나 똑같은 방식과 말로 자신들과 관계된 누군가의 생일 날짜에는 획일적으로 일관성 있는 이벤트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인숙 생일 이벤트를 통해 하루 그 순간만이라도 자신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잠시 벗어나길 원했었다.
주영과 로라가 주고받는 눈빛은 언제나 들통나는 입시 준비생들의 사랑스러운 위선과 다르지 않았다. 인숙은 그 위선에 언제나 속아 주는 능숙한 위선자가 되어, 주영의 귀여운 위선의 이끌림에 별채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 곳곳에 켜 둔 촛불과 벽 군데군데 붙어 있는 색색 가지 풍선이 눈에 들어오는 것도 잠시, 어두운 거실에서 불이 켜진 케이크를 들고 있는 청년들의 축가가 시작되었다. 어디선가 풍선이 떨어서 촛불에 닿아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고, 청년들 축가 템포는 속도를 냈다. 풍선 터지는 소리가 집안 곳곳에서 들리고 인숙은 급히 케이크 촛불을 꺼 버렸다. 집안에 불이 켜졌다.
주영: 생일 축복 송이 이렇게 긴 곡이었는지 처음 알았어.
혜원: 나는 어디 불붙을까 봐, 정말 긴장해서 노래도 제대로 못 불렀어.
지연: 언니, 감동했죠?
인숙: 그래, 고마워. 이런 곳에서 이런 축하를 받다니 정말 감동이야. 다들 정말 고마워.
정수: 누나, 저희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가지고 계신 성경이 없는 것 같아 성경 한 권 준비했어요.
현석: 한영 성경이라 여기서 구하기도 어렵지만, 가격도 비싼 거니까. 오래 간직하셔야 해요.
주영: 혜원이가 어렵게 구해 왔는데, 꼭 오빠가 구해 온 것 같이 이야기하고 그래?
현석: 그렇다는 거지.
인숙: 케이크도 너무 예쁘고, 맛있어 보인다.
주영: 케이크는 지연이와 제가 멜버른에서 진짜 유명한 집까지 가서 사 왔어요.
인숙: 먹어 보고 싶다. 먹자.
주영: 언니 잠깐만요, 우리 사진부터 찍고 먹어요.
인숙: 다들 바빴을 텐데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했어?
정수: 저는 아르바이트 끝나고 오느라 누나하고 거의 비슷하게 왔어요. 여자애들이 고생했어요.
주영: 풍선 불다가 오늘 파티 못 할 뻔했어요. 힘들어서. 현석 오빠 좀 일찍 와서 도와주지, 집에서 뭐 했어?
현석: 나 공부했지.
주영: 정말 오빠는 밉상이야.
지연: 주영이 너 할머니 집에 간 사이 초에 불 붙이는데도,
현석 오빠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켜 놓은 촛불을 끄고 다녔다니까.
초가 작아서 작은 움직임에도 불이 꺼지거든요.
인숙: 다들 고생 많았네….
혜원: 언니, 내년에는 남자 친구 만들어서 생일 케이크 받으세요.
인숙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애의 마지막 생일이라 여기며 늦은 시간까지 청년들의 수다를 듣고 있었다.
정수는 지방대학 전자 공학과 학생이었다.
군대를 다녀와서 쌍둥이 누나 졸업을 위해 복학을 미루고, 자기 진로에 대한 고민을 안고 일 년 전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멜버른에 왔었다. 정수 아버지는 정수에게 신학 공부를 해서 목사가 되어 주었으면 했지만, 정수는 어릴 때부터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에 대한 책임감이 가슴 한편 그늘로 자리하고 있었다. 부모님에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대학을 졸업하면 IT분야 개발자가 되어 사업가로 성공하고 싶었다. 돈을 많이 벌어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마음의 다짐도 있었지만, 졸업을 앞둔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멜버른에서 고된 노동 현장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품고 있는 꿈이 죽지 못한 욕심 덩어리 자아라 여기고 자신에게 망치질하듯, 단순노동을 격하게 하며 견디고 있었다. ‘S’ 교회 김동호 목사도 정수 성품과 헌신적 모습을 지켜보면서 신학 공부를 해 보면 어떻겠냐는 권면을 하기도 했었다. 정수는 호주 사막 여행을 끝으로 졸업과 동시에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아 취업 전선을 헤맬 것인지? 신학 대학원을 진학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탈 생각이었다.
인숙: 건설 현장 아르바이트 힘들지 않아?
정수: 생각이 복잡할 때는 육체적 노동으로 힘을 좀 빼는 것도 방법이다 싶어서요.
주영: 오빠는 말도 참 성숙되게 하는 것 같아. 근데 오빠, 집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정수: 응 현석이 사는 집, 현석이 방에서 같이 지내고 있어.
안 그래도 좀 전에 콘에게 남는 방이 있냐고 했더니. 본 채에 빈방 있다고 들어오라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여행 떠나기 전에 현석이와 같이 이사 와서 잠시 지내다가,
여행 다녀와서 한국 가기 전까지 이 집에서 지내다 갈 것 같아.
주영: 현석 오빠는 왜 와?
현석: 둘이 같은 방 써 보니까 불편하지도 않고, 돈도 아끼고……
주영: 정수 오빠는 고약한 백인 할머니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현석 오빠는 사는 집에 별문제 없잖아.
그냥 그 집에서 살아.
인숙: 백인 할머니 집에서 무슨 일 있었어?
혜원: 정수 오빠가 노동 일하는 워킹홀리데이 청년이라는 것을 알고,
저녁에 일 갔다 온 오빠에게 수건까지 집어던지면서 당장 방 비우라면서 내쫓았어요.
공부하는 학생인 줄 알았대요.
지연: 그때 진짜 황당했어요. 시내에 있는 학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했는데….
그 할머니는 오빠가 유학생인 줄 알았다면서 제가 전화받고 갔더니, 저한테도 막 뭐라고 했어요.
정수: 좀 놀라긴 했지만, 그런 취급을 받고 살아야 하는 저를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겨 주셔서,
지연이도 금방 와 줬고, 현석이 집 집사님도 같이 지내게 해 줘서 괜찮았어요.
주영: 오빠는 신앙심도 참 좋아.
인숙: 주영이는 정수 좋아하니?
주영: 오빠로 존경해요. 누구하고 참 비교되거든요.
지연: 정수 오빠는 따로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정수는 혜원의 언니에게 고백한 상태였고, 그녀는 정수에게 여행 떠나기 전 그 고백의 답을 주겠노라 약속했었다. 현석은 정수와 같은 중학교에 다녔고, 같은 대학 법대생이었다. 정수와는 달리 제법 넉넉한 가정의 늦둥이 막내아들이었지만, 등치에 비해 인색하고 소심한 성격 탓에 또래와의 관계가 그리 좋지 못한 편이었다. 정수 휴학과 워킹홀리데이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휴학계를 내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멜버른에서 하겠다는 의지로 정수 여정을 따라나섰었다.
인숙: 민철이는 늘 바쁜 것 같더라.
현석: 민철이는 온 세상을 걱정하고 기도하는, 동생이지만, 배울 게 많은 친구예요.
주영: 민철이는 친군데, 참 어려워요.
정수: 민철이가 요즘 청년부에 관한 생각이 많아.
지연: 우리 청년부에 우리가 모르는 무슨 문제 생겼어?
현석: 문제야 너희들 때문에 항상 있었지.
혜원: 우리가 왜?
정수: 사실은 부목사님 계실 때 청년부가 칠십여 명으로 늘었는데,
목사님 나가시고, 청년부 인원이 지금은 삼십여 명도 겨우 나오잖아.
지연: 그런 문제야 문제라고 할 수 없지. 인원이 늘 수도 있고, 줄 수도 있고,
민철이가 어떻게 목사님처럼 할 수 있겠어. 민철이 욕심 아니야?
정수: 인원수 문제가 아니라, 청년부 전체가 믿음 안에서 다양한 교제를 나누기보다는
끼리끼리만 어울리는 게 큰 문제야. 너희들만 해도 셋이서 항상 붙어 다니잖아.
타국에서 한국교회에 찾아오는 청년들이 모두 다 신앙 생활하기 위해
오는 게 아니라는 거 너희들도 잘 알고 있을 거야.
해외에 나와서 형편과 상황 처지는 다르지만, 또래 청년들이 한 곳에 모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지가 되고 어떤 기대를 품고 오는데,
그 속에서조차도 처해 있는 상황과 형편에 따라 서로 그룹을 만들어 끼리끼리만
교제하는 모습이 민철이는 너무 가슴 아프다고 하더라.
현석: 그 어느 그룹에 끼지 못하면 교회를 떠나게 되는 거지.
주영: 근데, 솔직하게 너무 말도 안 되는 애들 정말 많아.
지연: 주영이 말이 맞아, 교회 봉사나 어떤 행사에 참여하지는 않으면서
어떤 일이 생기면 부탁이 아닌, 당연하게 요구할 때 정말 좀 그래.
주영: 처음 와서 영어가 어렵다고, 이것저것 물어 오고 같이 가 달라는 말도 너무 쉽게들 하는 것 같아.
혜원: 너무 대책 없이 와서 여기서 어떻게 해 보겠다는 청년들이 꽤 많아.
교회에서 그런 개인적인 상황을 생각해 줘야 한다는 건 너무 부담스럽지.
정수: 그래, 너희들처럼 여기 오래 살았던 사람에게는 그저 귀찮고, 성가신,
때로는 너희들 시간을 뺏어서 짜증스럽겠지만, 그들에게는 정말 어렵고, 난감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안 될 것 같아 미안하고 염치없는 줄 알지만,
그렇다고 매번 부탁할 때마다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게 창피하니까,
철없는 척하고 말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일 거야.
개인의 불안하고 안타까운 현실을 교회가 어떻게 해결하고 도와줄 수 있겠어?
다만, 작은 일이라도 우리 누군가가 도울 수 있다면 다행이고,
그렇지 못한 현실적인 삶의 문제도 교회라는 공동체에 내놓을 수 있는 분위기 조성도
필요하지 않을까?
나아가서 해결할 수 없는 여러 문제에 대해 함께 기도하고 위로할 수 있는 지체로 성장할 수 있다면,
세상 속에서 만나는 어려움 앞에서 외롭지 않을 것 같지 않니?
하나님은 해결과 결과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가 서로의 부족함과 미숙함을 채우고
도와가는 그 과정을 귀하게 여기시고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을 기쁘게 보실 것 같아.
민철이는 예수님을 모르는 청년들이 우리 교회 청년부를 찾았을 때, 우리 그런 모습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어.
그래서 요즘 우리 교회 어른들의 부딪침과 친한 친구들끼리만 어울려 다니는 너희들 모습을 보면서
교회 모습이 실망스러운가 봐.
혜원: 그래서 민철이가 예민하게 굴고, 박 권사님에게 자주 대들고 그러는 거구나.
현석: 박 권사님 댁이 이민 성공 가정이기도 하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다 보니,
여러모로 교회 이런저런 일에 관여하게 되고, 교회 중심에 있어서
민철이는 그런 부모님 모습이 교회 기득권로보여 마음이 어려운가 봐.
정수: 권사님은 권사님대로 교회를 위한 일이라 여기고 분주하게 헌신하는데,
민철이 시각에서는 그런 모습조차도 교회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으로 비치고,
형편이 어려운 교인들에게 박탈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거지.
권사님과 민철이가 보는 우선순위의 견해가 좀 다를 뿐이지, 중심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그래서 민철이가 우리와 같이 사막 여행을 동행하고 싶다고 한 거야.
힘든 여정 속에서 부모님과의 회복과 자기 미래를 위한 하나님 뜻을 구하고,
기도하고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고...
지연: 그래, 오빠들이 민철이와 여행하면서 더 많은 대화 해 줘. 우리도 여기서 기도할게.
정수: 그래, 고마워.
인숙은 까칠해 보이기만 하던 민철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서 절충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이상이라는 고삐를 채워 끌고 끌다 생을 끝낸다는 것을 이 어린 청년들은 아직 알지 못했다. 인숙도 그때는 알지 못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