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숙은 잠시 지나가는 봄이 이리도 절절하게 아쉬웠던 적이 없었다.
봄이 온다는 것은 언제나 맞이하고 싶지 않은 여름을 대비해야 했었다.
보육원 집단생활에서의 여름은 냄새와의 전쟁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만 공동 목욕탕 문을 열어 주고 갈아입을 옷을 배급해 주었다. 배탈 나지 않을 만큼 적당하게 상한 음식과 간식을 억지로 먹어야 했고, 낮에는 몸 때에 땀이 얽혀 흘러내리는 꼬질꼬질 회색 땟물에 들러붙은 파리떼를 쫓고, 밤에는 모기에 뜯겨 울긋불긋해진 몸을 긁느라 잠을 설쳐야 했었다.
보육원 아이들 대부분은 시설에서 가까운 강가에서 물놀이하고 놀았고, 젖은 옷을 제대로 말릴 수 없어 강기슭 풀숲이나 바위틈에 옷을 벗어 걸쳐 놓았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알몸으로 물속을 휘젓는 아이들 틈에 인숙은 들어가고 싶지 않았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중학생 오빠 한 명이 강물에 휩쓸려 시신으로 발견된 이후 아이들은 강가에 가지 않았었다. 위생적이지 않고, 안전하지 않은 여름 방학은 왜 그리도 길었던지……
섬유 공장에서 일했을 때는 위생적인 문제는 없었지만, 솜에서 실을 뽑아내고, 실로 섬유를 짜는 거대한 기계에서 뿜어져 내는 열기로 작업 현장은 언제나 사십도 가까운 찜통이었다. 땀에 젖어 현장을 빠져나왔을 때, 바깥 온도 변화가 없는 여름은 가슴이 답답해 현기증이나 헛구역질을 하는 날도 많았었다. 학교가 방학에 들어가면 공장일을 더 많이 해야 했던, 열여섯 살 여름 어느 날 밤 10시에 출근해서 다음 날 새벽 6시에 퇴근하는 야간 조 근무를 했을 때였다. 인숙은 며칠 반복된 더위로 갑작스레 가슴 통증을 느끼며 시야가 흐려졌고, 커다란 기계가 자신을 덮치는 것 같았었다. 인숙이 기계에 고꾸라지는 순간 멀리서 인숙 모습을 보고 기계 전원을 꺼 버린 조장 언니가 아니었다면, 인숙은 아마도 몇 달 전 졸음을 참지 못해 기계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다 머리카락이 기계에 빨려 들어가서 뇌 손상으로 퇴사해야 했던 동료 꼴이 될 뻔했었다.
독서실 바닥에서 잠을 자며 검정고시 준비를 했던 여름도, 미술학원 청소를 하며 대학입시를 준비했던 해 여름도… 인숙에게는 몸도 정신도 개운하지 않은 고단한 일상이었다.
인숙은 대학생이 되어 입시 미술학원 강사로 취업되었을 때의 여름은 그리 나쁘지 않다 여겼다. 지하 월세방 벽 얼룩덜룩 번식한 곰팡냄새가 짙어지는 여름 더위를 피해 학원 실기실에서 연구작 그린다는 핑계로 연필 흑연 가루와 오일 물감 냄새에 젖어 시원한 실기실에서 얼마나 많은 날 감사함으로 불편한 잠을 청했는지……
인숙은 예쁜 봄 햇살 속 떠다니는 소박한 봄 색과 꽃 내음에 취해 뛰어들고 싶었다.
자연의 풍요가 넉넉한 멜버른 축복받은 땅에서의 시간이 귀했고, 대비할 여름이 없는 이 봄을 자신이 소멸하는 마지막까지 기억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있었다. 기완이 인숙에게 약간의 생활비를 보내주어 인숙은 계획보다 좀 더 많은 시간 머물 수 있었다.
‘S’ 교회는 박 권사를 비롯해 금전적 여유 있는 여러 가정이 각자의 집과 신용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려 교회 건물과 땅을 사들였다. 화려한 교회 외관 공사와 새 집기를 채워 좋은 시설을 갖추고, 유명 강사 초청 부흥회를 열어 교회를 대내외적으로 알리는 것에 열을 냈다. 그들의 주도적 역할은 금전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자랑할 만한 직업과 신분을 가지지 못한 성도들로 하여금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했다. 그들은 그들을 대적하기 위한 또 다른 무리를 만들어 보이는 것보다 지역 사회를 위한 봉사와 헌신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거센 주장으로 교회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동호는 그들 사이에서 언제나 할 말을 잃은 무력한 리더였다. 아담과 여자가 신이 허락하지 않은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서로의 벌거벗은 몸이 부끄러워 가리고, 신의 눈을 피해 숨었지만, 신께서 그들을 불렀을 때 아담은 여자 탓을, 여자는 뱀이 꾀였다고 했다. 성도들은 신의 뜻을 거스른 자신의 허물을 가리고, 신의 눈을 피해 서로 상대 탓을 하는 것 같았었다.
미선은 새로 이사 온 사택에 큰딸과 두 아들에게 각각 방을 꾸며 주고도, 동호 서재와 자신이 느긋하게 차를 즐길 수 있는 작고 아늑한 거실 룸까지 생겨 흡족해했다. 넓은 주방과 시원스러운 큰 거실에는 성도들이 준비해 준 고급스러운 소파가 노였다. 미선은 소파에 앉아 커다란 거실 창으로 보이는, 잔디가 펼쳐진 정원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자신이 저택 주인이라도 된 것 같은 허세(虛勢)스러운 마음이 일곤 했었다.
동호는 달라진 환경과 넉넉해진 교회 살림살이만큼이나 자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 무게감이 늘어나 눌리는 기분으로 새벽 청소 일을 혼자 다니고 있었다.
선희는 ‘S’ 교회 화려한 성장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찾아와 쉼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닌, 부유하고 힘 있는 자들이 모여 사교 모임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딸 아름과 교회를 옮기려 했지만, 아름은 엄마의 강요를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화려한 변화를 반겼다. 선희는 혼자 교회를 나와 떠돌이 신자가 되어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할 다른 교회를 찾아다녔지만, 해결되지 않은 상처와 분노로 ‘S’ 교회를 비롯해 우유부단한 담임 목사 김동호에 대한 원망으로 괴로워했다. 긴 기다림 끝에 영주권은 나왔지만, 지섭은 그동안 관계 정리를 하지 않았던 미연과 새로운 가정을 만들고 싶다는 말과 함께 이혼 서류를 보내왔다. 매일 밤 남편 지섭을 마음으로 정신적으로 지우고 죽이기를 반복하는, 아름의 성장으로 인한 정서적 독립이 남편 지섭을 닮아가는 것으로 보여 배신감마저 들었다. 자신을 피하고 있는 인숙에게도 더는 연락하지 않았고,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아 경제적 부를 이루었다는 사람들에 대한 모난 정의로움으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남자의 통곡 소리는 밤마다 들려왔다.
신은석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어두운 그림자에 시달리는, 그럴 때마다 맨발로 교회 예배당으로 달려 나와 강대상 십자가 아래에서 무릎 굵고 소리 내어 통곡하고 있었다.
어린 은석은 가정형편과 부모의 신분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었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가정형편과 부모의 신분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자신의 거짓말 한마디는 많은 것을 달라지게 했었다. 대학생이 되어 자기 실력으로 세상에 맞서 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었다. 방학이면 해외 어학연수를 떠나는 친구, 가족과 친지로 연관된 기업에서 일찌감치 경력을 쌓는 친구, 부모 지원을 받아 외국어나 공무원 준비를 위해 학원에 다니는 친구, 은석은 언제나 월세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고액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었다.
생계를 책임지며 살아온 은석과 미래를 위해 투자하고 준비해 온 그들과의 경쟁은 해 보나 마나였다. 하지만, 은석은 포기하지 않고 수없이 많은 시험을 치렀고, 지원서를 냈지만, 세상은 그런 은석에게 단 한 번의 기회를 주지 않았었다. 신학대학원을 진학해 전도사가 되어, 주희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의 보상이라 여겼지만, 그 보상도 오래가지 않았었다. 장인 장모의 달라진 시선, 남편을 위해 자기 것을 포기했던 주희는 어느 순간부터 포기의 대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었다.
그런 자신에게 다가온 혜란은 또 다른 돌파구 같았다. 혜란은 은석 한 남자만 자기 옆에 있으면 되는, 기다리고 있는 어떤 대가도 없었다. 주희를 보내고 한동안 외로운 시간을 보내던 은석은 혜란의 아파트로 들어가서 동거를 시작했고, 혜란은 은석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은석은 자신도 모르게 안주하고 있었다. 자신을 평가하는 주변 시선도 없었고, 무엇보다 은석을 지켜보는 주희 처가 식구 같은, 혜란에게는 그런 가족도 없었다. 오랜 기간 주희 가족들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주눅 들어 살았던 심적 부담이 풀어지는 것 같았었다.
어느 날 혜란과 대형 마트에서 쇼핑 카터를 밀며 쇼핑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시선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그곳을 바라보았다. 은석과 혜란은 동시에 그 시선을 회피하고 카터를 그 자리에 두고 도망치듯 마트를 빠져나와버렸다. 은석은 마트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선희와 인숙의 시선이 계속 떠 올랐다.
두 딸과 주희가 떠나고, 모든 교인이 은석을 입술로 비난하고, 시선으로 질타하며 상대해 주지 않았을 때, 선희와 인숙은 한 번씩 찾아와서 같이 음식을 나누고 대화를 해 주었었다. 부목사 은석에 대한 신뢰와 믿음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인간의 고립감을 위로하려는 진심이 느껴졌었다. 교만한 동정(同情)이 아닌 홀로 버려진 한 사람을 혼자 두지 않으려는 그녀들이 참으로 고마웠었다. 혜란의 시내 고층 아파트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공간 이동을 한 것처럼 ‘S’ 교회를 비롯해 모든 것을 지우고 싶어 연락을 끊고 지냈었다. 그런데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녀들과 마주했다. 은석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비겁한 선택을 자기 보호와 방어라 포장하고 있었고, 그 무책임 함으로 범죄(犯罪)하고 말았다. 은석은 알 수 없는 공포감으로 신에게 살려 달라 빌고 또 빌고 있었다.
인숙의 출국을 앞두고, 콘과 로라는 조촐한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콘은 뒤 정원에 천막을 쳐 그늘을 만들고, 테이블을 펴놓고, 바비큐를 위한 그릴을 설치했다. 집 지하에 저장해 둔 손수 만든 와인과 맥주를 넉넉하게 꺼내와서 얼음이 담긴 아이스박스에 넣어두고, 로라는 평소에 아끼느라 사용하지 않고 모셔 두었던 그릇을 꺼내 음식을 보기 좋게 담아 테이블로 옮기고 있었다. 막내딸 신디는 엄마를 쫓아다니며 인숙을 위한 파티가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고, 그런 신디를 브라이언은 멀리서 노려보고 있었다.
술만 마시던 브라이언은 정수 사고 소식을 듣고, 술에 잔뜩 취해 주영과 인숙에게 찾아와서 전 재산으로 보이는 현금 뭉치를 카펫 바닥에 우두두 솟아 내며 교회 선금 모금 통에 넣어 달라며 펑펑 울었었다. 그날 이후 브라이언은 술을 끊고 알코올 중독자들 모임에 참여하면서 회복해 갔고, 택시 운전기사로 취업해서 작은 아파트를 얻어 독립해 나갔다.
인숙은 며칠 전 ‘S’ 교회 동호와 선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었다.
“인숙 자매님, 기억해 주시고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곧 떠날 것 같습니다.”
“네, 목사님 다른 지역 교회로 가십니까?”
“아닙니다, 그동안 제가 목사가 된 이유를 잊고 살았습니다. 목사가 되면 어려운 이웃들을 하나님 전으로 전도하며 살 계획이었는데… 결혼하고 이래저래 살다 보니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이라도 초심으로 돌아가 낮은 곳에서 작은 자로 살려합니다.”
동호 큰딸이 신학 대학을 진학해서 공부를 마무리하면, 선교사가 되어 가난한 나라에서 하나님을 전하며, 평생 살고 싶다는 꿈을 털어놓았었다. 미선은 딸에게 목사로 사는 아버지 삶을 보고도 그런 꿈을 키웠냐며, 철부지의 과한 이상이라 취급하고 성적이 우수한 딸에게 법대나 의대 진학을 강요하고 있었다. 동호는 자신이 지키지 못한 약속을 딸에게 요구하는 것 같은 두려움으로, 늦게라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아 네… 목사님, 계획하신 뜻 이루어 가시길 바랍니다.”
“인숙 자매님, 자매님은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숙 자매와 항상 함께하고 계십니다. 돌아가시는 길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리라 믿습니다.”
“네 목사님 감사합니다.”
인숙은 주영을 통해 ‘S’ 교회 그간의 상황을 전해 듣고 있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은 계층이 나누어지고, 그 계층은 계급이 되어, 서로의 입지를 넓히고 쌓아가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S’ 교회의 모습은 특정 공동체의 모습이기 이전에 크게는 세상 전체와 우리 사회, 작게는 한 개인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었다. 인숙 역시 자신이 원하고 오르고 싶은 계층에 오르지 못했던 좌절감으로 이곳까지 오지 않았던가…
인숙은 선희에게 전화를 걸어 잠시 집으로 방문하겠다고 했지만, 선희는 시내에서 만나기를 원했다. 선희 얼굴은 안 본 사이 많이 야위어 있었고, 예전 같은 억지스러운 환한 미소도 고음 음성도 가라앉아 있었다. 선희는 인숙이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지섭과의 관계를 술술 이야기하며 지섭에 대한 분노를 인숙에게 투사하고 있었다.
“어려움 없는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것이 다들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 알아, 배운 사람일수록 그 배움을 잘난척하며 자랑할 곳을 찾고,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돈 될 사람들과만 어울리고 돈 되는 일만 찾아 한다니까, 우리 남편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인지, 자기 사랑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처자식에게 이런 배신을 하는지… 나와는 어떤 대화도 안 된다나... 교회가 미쳤다니까, 교회가 돈 자랑하는 곳이 되어버렸어... 인숙 씨도 내가 동생 같아서 하는 말인데, 하나님께서 인숙 씨에게 재능과 배움을 주신 것은 인숙 씨보다 배움이 적은 사람들 무시하며 살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계획이 있어서라는 것 잊지 말아요.”
선희는 언제나 자신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했고, 선희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인숙은 그 공간과 시간이 피곤하고 답답했었다.
빨간 장미의 어두운 곳은 빨간색이 아니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바다는 하늘에 하늘은 바닷속에 가두려고만 했다. 나무는 생동감 없는 나무토막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것 같았고, 산은 돌덩이 무게에 돌덩이는 흙더미에 깔려 숨을 쉬지 못하게 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느낌이 있다. 어떤 사람은 행복할 때 울고, 어떤 사람은 화가 날 때 웃는다. 기쁨을 숨긴 무표정이 있고, 언제나 활짝 웃고 있어도 눈물이 가득 고인 얼굴이 있다. 고단한 주름은 가늘고 깊이가 없지만, 유쾌한 주름은 크고 깊다. 선희는 행복한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싶어 했지만, 그림 속 인물은 늘 선희의 억지스러운 미소를 그려 놓은 것 같았었다.
인숙은 선희에게 그림 그리는 기술은 가르쳐 줄 수 있었지만, 선희와 세상을 보고 인식하는 시각에 관해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았었다.
“언니 죄송해요. 언니 참 순수한 사람인데, 제가 언니 좋은 면을 관심 있게 보지 못했어요. 언니는 뭐든 열심히 하는 사람이니까, 그림 꾸준하게 그리셔서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골프도 그림도 그만하려고,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기도해 볼게요.”
“그래요, 언니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인생을 찾아 새 출발 하세요.”
인숙은 선희 달라진 모습이 좀 낯설었지만, 뭔가로부터 자유로워진 것 같았었다.
파티장에 많은 사람이 있었다.
인숙이 방문한 첫날 아침처럼 콘과 로라의 딸들과 사위, 손주와 손녀들은 집안 곳곳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웃집에 사는 콘과 로라의 친구 부부도 인숙과 몇 번 티타임을 즐긴 인연으로 초대받았다. 신은석이 파트타임으로 일했던 외국인 교회 목사 부부는 인숙이 콘과 로라의 웃는 얼굴을 그려 선물한 그림을 보며 감탄했고, 한국 마트 조만석은 한국 술을 소개한다는 핑계로 과음해서 아내를 곤란하게 하는 바람에 아내는 만석을 데리고 집으로 가 버렸다.
주영과 지연은 인숙 초대로 와준 은경에게 은경이 다녀온 유럽 여행기를 듣고, 졸업을 앞둔 긴 방학을 맞이하여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얻느라 마음이 분주해 보였다. 혜원은 자신이 원했던 회사에 빠른 취업이 되어 정신없는 적응기를 보내느라 여행 여정에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는, 그녀들을 부러워하는 수다가 즐겁다.
특별한 손님이 그 자리에 있었다. 하얀 중절모를 쓰고, 하얀 양복과 구두를 신은 민철이 환한 빛을 등지고 인숙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가 빛 속으로 사라질 때 멀리 있는 무지개는 선명해졌고, 하얀 비둘기 떼들은 힘찬 날갯짓 하며 그를 따랐다.
인숙의 짐은 작은 기내 용 케리어와 노트북이 전부였다. 기다리고 있는 브라이언의 택시에 몸을 실었고, 멜버른 공항에서 인숙의 조촐해진 짐을 내려주는 브라이언과 따뜻한 포옹을 나누었다. 그리고, 숲이 말했다.
“인숙 잘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