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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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이

“미영아~ 미영아~ "

"저년은 아침마다 내 목청이라도 빼 처먹어야 눈을 뜨지. 이런 빌어먹을 년 벌떡 일어나지 못해.”

수돗가에서 많지 않은 하얀 머리카락을 물에 젖은 손으로 주섬주섬 모아 뒤로 묶어 쪽 머리를 하며, 습관처럼 미영의 이름을 거세게 불러 욕을 퍼붓고서야, 순득은 속이 시원한 듯 수돗가에 나와 세수하려는 승복 입은 여승에게 공손한 합장을 한다.


다닥다닥 기울고 어그러진 기와와 양철 지붕으로 능선을 만든 동네 언덕에 빨강 깃발이 휘날리는 순득의 집은 동네 늙은이들이 밥, 김치, 과일 등, 뭐든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돌조각 불상에 공양(供養)하고, 온종일 모여 앉아 화투를 치거나 쌍스러운 다툼과 질서 없는 말을 늘어놓는 곳이었다.

녹슬고 찌그러져 반은 누워버린 양철 대문을 간신이 잡은 낡고 닳은 나무 기둥에서 시작된 흙담에는 사이사이 깨진 기왓장과 제멋대로 생긴 돌덩이를 심어 흙담의 견고함을 굳혔다. 집을 두르고 있는 나지막한 담장 안에는 흙과 모래가 뒤얽힌 넓은 마당에 평상이 놓여 있고, 중간중간 제멋대로 생긴 평편하고 널찍한 돌을 박아, 오가는 이의 발자취를 기억한다. 양철 덮개를 덮고 있는 사용하지 않는 우물 주변에는 비교적 모양이 고른 자갈이 깔려 있고, 자갈 틈을 뚫고 우뚝 솟아 나온 가느다란 수도꼭지에 초록색 고무호스가 끼워져 있다. 고무호스 끝이 닿는 붉은 고무다라에 물이 철철 흐르고, 손잡이 길쭉한 빛바랜 파란 플라스틱 바가지가 둥둥거린다. 바가지 한가득 물을 퍼 양철 세숫대야에 붓고, 고요하게 얼굴과 머리카락이 없는 머리통을 닦아 내는 여승은 순득의 어떤 행동과 말에도 미동(微動)이 없어 보인다.


마당 한쪽 멀찍한 구석에는 나무 널판때기로 대충 가려 놓은 변소가 보이고, 변소 지붕을 가득 덮은 노란 호박꽃은 반들 촉촉한 호박을 잉태하고 있다. 호박잎 줄기는 무성한 부드러움으로 넘실넘실 널판자를 타고 내려와 제대로 올라 크지 못한 까칠까칠한 오이 넝쿨과 뒤엉켜 생존을 다투고 있다. 대열을 갖추고 옆에서 지켜보는 키 큰 토란 집단은 넓은 잎에 이슬을 가득 담고 호박과 오이 넝쿨의 엉킴을 풀어 주려는 듯, 고개 숙여 쪼르륵 쪼르륵 이슬을 부어 준다. 몇 고랑 되지 않는 상추가 고슬 보슬 범람한 사이사이 나무 작대기 지지대를 의지하고 있는 고추나무에는 파란 고추가 조롱조롱 달려 있고, 쭉쭉 곧게 뻗은 대파는 군데군데 잘려있다.

연탄아궁이 굴뚝이 밖으로 삐뚤어져 돌출된 부엌에는, 묵은 때가 흘러 굳어 버린 지 오래된 석유곤로가 콘크리트 부뚜막에 올려져 있다. 곤로 위 들썩이는 양 냄비 옆, 부뚜막 나무 도마 위에는 금방 잘려 나온 대파 몇 가닥이 총총 썰려 때를 대기하고 있다. 길고 가지런한 좁은 툇마루가 두 개의 방을 이어 놓았고, 큰 방 안쪽 정면에는 나지막한 상에 돌 불상이 올려져 있다. 돌 불상 앞에는 하얀 생쌀 한 그릇과 사탕 한 움큼, 18미리 나무 합장주가 놓여 있다. 가끔 소리 소문 없이 왔다, 하루 이틀 때론 보름여 간을 머물다 가는 여승이 그 방에서 잠을 청할 뿐, 순득은 잠만큼은 작은 방에서 미영과 같이 잤다.




며칠 부슬부슬 스산한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순득은 심약하고 연약한 이슬만을 뿌려대는 이번 장마에 왠지 모를 불안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새벽녘 옆방에서 염불을 외던 여승의 울먹임이 뒤엉킨 소리에 순득은 일어나 앉아 어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어 본다.

순득은 젊은 시절 꽤 이름이 알려진 처녀 무당이었다. 어릴 때부터 신병을 앓았던 순득은 가족들로부터 격리되어 신어머니를 만나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되었다. 신발이 좋다는 소문으로 얼마 동안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순득에게 있던 영험한 기운은 사라졌고, 신어머니는 신기가 없어진 순득을 밥만 축냈다며 쫓아내고 말았었다. 가족들이 살던 동네를 찾았지만, 댐 건설로 마을 전체가 흔적 없이 수몰되어,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길거리 노숙으로 굶주림의 노예가 되어 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국밥 한 그릇에 몸을 내어준 남자로 인해 아이를 갖게 되었었다. 출산이 임박해서야 자기 몸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득은, 죽을 생각으로 깊은 산속에 들어가 나무에 목을 매고 말았었다.

의식을 찾았을 때, 고즈넉한 풍경 소리와 향 내음이 그윽한 전갈 하고 깨끗한 절간 환경에 잠시 자신이 죽어 극락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하였다.


눈이 채 녹지 않은 그늘진 산 중턱, 추위를 견디지 못한 여러 구의 고사목(枯死木)들이 즐비했다. 골골한 굽은 허리를 가진 늙은 소나무 가지에 허드레 옷가지를 꼬아 엮어 만든 끈 속으로, 몸뚱어리에 비해 한없이 가냘픈 모가지로 매달려 있는 임산부 순득을 근처 절에 불공드리러 절을 찾은 여인이 발견해 절에 알렸었다. 순득을 절에서 보살폈고, 얼마 뒤 순득은 건강한 아이를 출산했다. 순득은 딸아이를 품에 안아보지도 않고, 도망치듯 절을 빠져나와 모든 것을 잊고 살았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오는 밤이었다. 대문 밖에서 목탁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 방문을 열어 놓은 채 대문을 열었다. 곱고 청초한 자태의 비구니가 촉촉한 눈빛으로 아무 말 없이 순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순득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이 절에 두고 온 딸이라는 것을…. 비구니는 어머니를 찾아온 것인지 그저 어떤 힘에 이끌려 오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날 이후 여승은 종종 머물다 갔고, 순득은 여승에게 자신이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었다. 오늘 밤 저 아이는 왜 그날처럼 저리도 촉촉하게 염불을 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참 뒤 젖은 염불 소리가 멈추고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 떠나려나 했지만, 여승은 순득이 머무는 방문 앞에 서서 조용히 목탁을 두들겨댔다. 순득은 방문을 열어젖혔고, 여승은 순득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대문 밖으로 나갔다. 순득은 자기도 모르게 맨발로 뛰어나가 철퍽철퍽 젖은 마당을 지나 대문 밖 담장 너머로 여승을 따라나섰다. 어떤 길을 어떻게 쫓아왔는지, 그저 어둠 속에서 뿌려대는 이슬의 촉감만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처럼 걷고 뛰기를 반복해 도착한 곳은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는 빈집이었다. 주변을 살필 여유도 없이 빗물을 머금고 흘러내리는 벽 사이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탯줄도 마르지 않은 갓난아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 데리고 온 아이가 미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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