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그 자료 너무 좋다. 내 컴퓨터에 저장해줘요. 교사 연수에 쓰게.”
그 말은 칭찬처럼 시작됐다. 하지만 나는 곧 알게 됐다. 그건 내 이름이 지워지는 시작이었다.
나는 한 학교에 2년째 강사로 나가고 있었고, 학부모 연수를 위해 직접 만든 프로그램을 막 마친 참이었다. 예상보다 반응이 좋아 질문이 이어졌고, 나는 오늘 강의가 꽤 성공적이었다는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담당 교사는 그렇게 말하며 자료를 자신의 컴퓨터에 저장하라고 했다. 정규 교사도 아니고, 계약직 강사라는 위치에서 ‘아니요’라고 말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네"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 프로그램은 나의 이름 없이 누군가의 연수 자료가 되었다.
자료는 남았지만, 나는 지워졌다.
그 자료는 내가 일주일 넘게 고민하며 밤을 새워 만든 나의 창작물이자 지식재산이었다. 그런데도 아무 말 못 하고, 그 교사의 컴퓨터 화면에 저장해주는 순간 나는 속이 너무 상했다.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기억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그리고 10년 뒤, 또 다른 상황이 찾아왔다. 한 기관에서 학교 파견 강사 제안을 받았고, 나는 흔쾌히 수락하려 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내 수업안을 3인의 '코칭단'이 사전 검토한다는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질 향상'이라는 말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코칭단은 나와 협업하기보다는, 검토와 평가라는 구조 속에서 내 프로그램을 다룰 예정이었다. 구성원 중 일부는 나보다 교육 경험이 부족했고, 전문 분야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인물도 있었다. 검토라는 이름 아래, 내 프로그램의 흐름과 구조, 노하우가 모두 공개되어야 했다. 창작물에 대한 통제권이 사라지는 구조 속에서, 나는 점점 주도권을 잃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나는 전문 자격을 갖추고,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교육 현장에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행해왔다. 그런 내가 자신의 콘텐츠를 사전 검열받고, 수정보완을 거쳐, 최종적으로 기관이 저작권을 갖는 구조에 들어간다는 것은 낯설고도 불편한 일이었다.
내 철학이 해체되고, 노하우가 공개되고, 이름이 지워진 채 결과물만 남는 구조. 정중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감정이 실린 말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경험은 내게 깊은 상처로 남았다. 창작자로서의 경력보다, 기관 안에서 자리를 가진 사람들이 내 작업을 마음대로 평가하고 좌지우지하는 구조 속에서, 나는 그저 따라야 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내 철학과 노력이 흔들리는 그 순간이 너무도 화가 났다.
그래도 결국 힘을 내어 말했다. "그 제안,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그건 내게 처음으로 꺼낸 '용기의 말'이었다. 누구를 거스르기 위한 말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기 위해, 나 자신에게 해준 말이었다.
나는 내 창작물에 대한 검열이 싫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었다. 어찌 보면 현명하지 못한 판단일 수 있다. 이럴 때 어떤 판단을 해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게 내 마음이었다. 용기를 내어 지키고자 했던 건 단지 문서 한 장이 아니라, 내가 쌓아온 교육철학과 존엄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이 최선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내 창작물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저작권은 단지 복사를 막는 법이 아니다. 그것은 창작자의 철학, 시간, 경험을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권리다. 강의자료 하나에도, 수업 흐름에도, 누군가의 교육적 감각과 고민이 담겨 있다. 그걸 공공재처럼 취급하는 순간, 창작자는 조용히 지워진다.
자료는 남아도, 나는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 그 이름이 남을 수 있도록, 나는 내 권리를 지키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 이름이 아닌 연구소의 이름으로 내 프로그램을 등록하고, 연구소 명의의 콘텐츠 시리즈로 구성해 자료 구조와 포맷을 통일하고 있다. 필요한 곳에 정당한 방식으로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블로그에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관심 있는 이들은 강의 요청을 하거나 일부는 구매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누군가의 허락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받는 방식으로 나의 콘텐츠가 증명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마다, 내 이름이 지워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런 일을 겪는 강사들이 어쩌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프로그램을 지켜내지 못한 후회, 거절하지 못한 아쉬움,
이름 없이 흘러간 콘텐츠를 마음에 오래 담아두고 살아가는 이들.
하지만 이제는, 함께 말하고 싶다.
우리가 만든 자료에는 우리의 철학이 담겨 있고,
우리가 지키는 권리에는 창작자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다고.
지금도 선택의 기로에 선 누군가에게
이 글이 조금이나마 용기가 되기를 바란다.
강사가 자신의 콘텐츠를 지킨다는 건,
때로는 자리를 내려놓는 용기에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