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그렇게 나에게 왔다.

한적하다 閑寂하다

by 은하연

한적하다.(閑寂하다.) 형용사

한가하고 고요하다.

조용하고 평화롭다.


閑 (한): '한가할 한'

寂 (적): '고요할 적'.





전라도 고군산도 끝자락으로 여행을 왔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며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듣고 있다.

맞은편에는 고군산도의 여러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있다. 주위는 한적하여 마치 세상에 파도와 바다와 나뿐이 없는 듯한 기분이 든다.



철썩철썩

파도가 칠 때마다 우뚝 솟은 봉우리는 자신을 지키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저렇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경외감이 생긴다. 봉우리들은 거센 파도가 몰려와도 자신의 일부분은 내어 줄지언정 그 자리는 떠나지 않았다.




격자봉 ( 格紫峯 )



고산 윤선도

供濤巨浪中(공도거랑중)

높은 파도와 큰 물결 한가운데서도


特立不前却(특립불전각)

다른 것들보다 우뚝 서서 앞으로 나아가지도 않고

뒤로 물러나지도 않네


欲格紫微心(욕격자미심)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한다면


要先恥且格(요선치차격)

먼저 자신부터 부끄러워하며 또한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네 <윤선도 고산유고 중 >


1637년(인조 15년) 1월 병자호란 때 51세 고산 윤선도는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기 위해 제주도로 향하다가 태풍을 만나 보길도에 내렸다. 고산은 보길도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제주도로 가려던 것을 멈추고 보길도에 지내게 된다. 보길도에 우뚝 솟은 격자봉을 보며 고산은 이 시를 지었다.


큰 파도와 거대한 물결 가운데서도 다른 것을 보다 우뚝 서서 앞으로 나아가지도 않고 뒤로 물러나지도 않는 격자봉을 보면서 고산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라를 지키지 못한, 임금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탓하였을까?

아니면 격자봉처럼 꿋꿋한 나라가 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안타까웠을까?



나는 항상 바다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살았다. 푸르른 바다를 보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어서 무작정 바다가 좋았다. 자신의 속내를 숨기지 않고 모두 보여주는 바다가 좋았다. 그래서 늘 바다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이건 첩첩산골에서 태어난 출생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바다를 제대로 본 것은 20대 마지막을 붙잡고 있을 시절이었다. 그때는 집안의 걱정거리도 많고, 내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가 나를 힘들게 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친구와 바다를 보려고 무작정 도보여행을 떠났다. 도보여행, 얼마나 낭만적이고 멋진 일인가! 우리는 마지막 20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도보여행을 선택한 것이었다. 경상도 어느 마을에서 출발하여 걸어서 강릉까지 가기로 하였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세상에 험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던 시절이라서 여자 둘이서 떠나는 무전여행도 가능했다.


동해를 향해 걸어서 걸어서 가는동안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인색하게 우리 도움을 거부한 분들도 만났다.

다리는 아프고 힘들어서 지금 우리가 왜 이런 고생을 하나 하는 후회를 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바다를 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기에 우리는 아픈 다리를 쉬어가며 강릉 경포대까지 갈 수 있었다.


우리가 경포대 바다 앞에 섯을때, 그 순간을 30년도 지난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 넓고 푸른 바다의 장엄함과 거대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한동안 바다를 보고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바다는 나에게 들어왔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는 내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듯하여 마음속에 쌓여 있던 묵은 슬픔과 아픔, 고통, 지금의 혼란한 마음까지도 가져가는 듯하였다. 바다는 이렇게 마음이 넓다. 인간은 어떤 이유와 변명으로 부탁해야 하는 것들이 바다는 이유를 묻지도 않고 받아 준다. 철썩이는 바다 앞에 서니 바다가 나를 포근히 감싸 주는 듯하여 마음이 편안해졌다.


산다는 것은 바다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잔잔하다가도, 어느 순간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와 맞서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오면 우리는 혼란스럽고 ,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이유를 찾고자 한다. 하지만 바다는 아무리 거센 파도와 폭풍이 몰아쳐도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저 꿋꿋하게 버티며 살아간다


우리 인생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밀려나기도 하고, 다시 조용히 되돌아오기도 한다. 이런 것이 인생이다. 한평생 잔잔한 바다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한평생 거센 파도만 일렁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바다는 우리 인생과 닮았다. 거센 파도를 무사히 건너고 나면 잔잔한 파도가 일듯이 우리 인생도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맞이하고 나면 한동안 잔잔하게 지나간다.


바다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넘어지고, 부서져도 쓰러져도 또 다른 물결로 다시 일어난다.

산다는 것도 결국은 그런 힘으로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끝없이 흔들리면서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 바다처럼

나의 영혼은 부서지는 파도 속에서 더욱 단단해져서,

마침내 나만의 심해深海를 고요히 이끌어 나가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당신은 현재에 살아야 하며, 모든 파도에 자신을 던져야 하며, 각 순간에 당신의 영원성을 찾아야 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나는 한적한 바닷가에서 한동안 바다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내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도 바다는 그렇게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