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글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때였는데요, '방송작가'라는 직업을 알게 된 중학교 때부터는 격한 '가슴 뜀'을 느끼며 줄곧 이 길로만 달려왔어요.
부침이 매우 심한 방송가에서 20년 넘게 생존할 수 있었던 힘은 '특출 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인정'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이디어가 아주 반짝이는 것도 아니고 글발이 아주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맥이 아주 넓은 것도 아니고... 모든 게 다 고만고만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있는 상태인, 정말 여의도나 상암에서 발에 채이고 채이는 수많은 작가 중 한 명이 저란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었어요. 그렇다면 나의 경쟁력은 뭘까, 꽤 오래 꽤 자주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발견했어요. 약간의 센스와 성실성. 그걸로 버텨보자.
막내작가 때부터 몇 년간은 자발적으로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생활을 했었습니다. 선배들이 시켰던 일들은 물론, '시킬 것 같은 일들'까지 미리미리 찾아서 해 놓았어요. 원고라는 걸 쓰기 시작했던 서브작가 때부터는 '정말 기깔나게 쓰지 못할 바에야 가장 빨리라도 원고를 넘기는 작가가 되자'가 목표였습니다. 방송 일이란 건 글을 쓴다고 끝난 게 아니라 그 뒤부터 조연출, 피디들의 그림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협업'이기에, '역시 작가님 원고가 빨리 나와서 작업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어요' 이런 말을 들어야 직성이 풀렸어요. 데일리 연예뉴스 프로그램의 메인작가로 일한 지 어느덧 9년이 됐는데요, 당일 원고, 다음 날 원고는 물론 그 다음날 원고까지도 미리 써 놓을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미리 써놓으려는 생활을 해 왔어요.
그런데 이렇게 '달리기'만 계속하는 생활에 점차 균열이 가기 시작한 건 육아를 시작하면서부터 였습니다. 아기를 낳기 전이나 후나 작가인 건 여전한 상황이기에 이전의 일들을 분명 그대로 잘해 내야 하는데, 아니 더 잘 해내야만 할 거 같은데 물리적인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어요.
육퇴 후 잠깐 쉬고 12시부터 2시까지 작업을 하고 4시간 정도 자고는 일어나서 남편 아침 식사와 아기 등원을 준비했고요, 아기와 남편이 나가고 나면 오전 10시부터 오후 12시까지 2시간 정도 잠 보충을 하곤 출근하는 생활을 꽤 오래 했었지요. (출근은 오후 2시까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밤잠 4시간 동안은 아기가 잠꼬대를 하거나 자다 깨거나 하는 바람에 2-3번은 일어나게 되기 일쑤였고요, 아침잠 2시간 동안도 여기저기서 전화가 걸려오거나(뉴스 작가이기 때문에 전화를 꺼놓고 잘 수도 없습니다) 이웃집 공사 소음이 심하게 들리는 등 수면의 질이 정말 최악이었답니다. 그렇게 2년 넘게 생활을 하다 보니 스트레스성 위장 장애가 심하게 오더라고요. 명치에 벽돌 하나가 껴 있는 듯한 느낌이 매일 있었고 심한 두통이나 어지럼증 등의 증상이 하나씩 추가되기 시작했죠.
이대로는 정말 안 되겠다 싶어 남편에게 거의 울며 S.O.S를 했었더랬습니다.'이러다 나 죽는 거 아니야?'
심각하게 듣던 남편은 생활 패턴을 바꾸는 게 급선무일 거라 얘기했어요. 그동안에도 그는 꽤 여러 번 같은 얘길 했었는데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일을 하려고만 하면 그때마다 아기가 평소보다 몇 시간이나 일찍 일어나서 일을 못 하게 되거나 아기가 아프거나 그런 변수들이 있었던 경험이 있어서 '이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었고 그래서 더 답답했었어요.
그는 다시 한번 시도해 보자고 했습니다. 아기 케어는 자기가 더 신경 쓸 테니 함께 노력해 보자고 했어요. 지금은 또 아이가 많이 컸으니 예전과는 다를 수 있다면서 말이죠.
그때부터 12시 정도에 자고 6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요, 세상에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너무 별일 없이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어요. '절대 안 된다'는 저의 강박이 저를 옭아매고 있었던 것일 뿐, 그건 깨면 그냥 깨지는 우스운 허상이었던 거죠.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시간에 일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는 틀을 딱 정해놓고 나를 가장 괴롭혀온 건 누구였지? 오늘 하지 않아도 될 일들까지 해 가면서, 그걸 결국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세뇌시켜가면서 단 1의 여유도 없이 위태로운 '달리기'만 하게 만든 건 누구였지?
옴짝달싹할 틈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틀을 만든 것도, '부지런하다, 성실하다'는 칭찬의 달콤함에 빠져 저를 쉼 없이 채찍질했던 것도 바로 저였습니다. 오늘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내일 일을 걱정하며 다음 주 일을 걱정하며 좀 더 많은 일을 빨리 하지 못했음에 스트레스를 사서 받아가면서요.
그리고 그렇게 힘들다 힘들다를 달고 살면서도 포기하지 못한 채 움켜쥐고 있었던 것들도 있었어요. 밤에 글을 써야 잘 써진다는 고정관념, 남편과의 즐거운 수다와 야식 타임, 일 때문에라도 꼭 봐야만 했던 TV 프로그램들... 근데 그 어떤 건들 내 몸과 마음의 건강과 바꿀 수 있을까요.
하루 패턴을 바꾸고 난 후 겨우 며칠밖에 안 지났는데 꽤 많은 것이 달라졌어요.
우선 하루 종일 빙글빙글 돌던 게 거의 사라졌고 마음이 여유로워졌습니다. 오늘에 집중하자 마음을 바꿔먹었더니 그렇게 안달복달할 일도 없더라고요. 회사 일은 이제 몸에 완전히 익어서 손이 거의 알아서 하는 상황에 와 있고 온작가의 일을 하는 것도 그저 제 페이스대로 한 걸음 한 걸음 가면 될 거였습니다. 큰 목표가 흔들리지 않고 하루 아주 조금씩이라도 그곳을 향해 걸어간다면 문제 될 게 없었어요.
그러면서 크게 깨달은 것 것들 중 하나는 인생에 '절대로'란 건 없다는 겁니다.
늘 2안, 3안이 있고 그조차 안되면 안 하면 그만인 일들이 아주 많고 '잠시 멈춤' 버튼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뭣보다 나 자신을 소중히 대해야 한다는 것을요.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나를 돌보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하고 돌봐줄까요.
10분, 20분의 자투리 시간까지 포함시켰던 매일의 계획표도 더 이상 쓰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안 하면 안 되는 것들은 최소한의 시간에 최대한의 에너지를 들여 정말 제대로 열심히 하고요, 그 외의 것들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란 마음으로 살기로 했습니다.
이제 정해진 시간, 짜인 길만을 향하던 그 '달리기'를 멈출 거예요. 앞도 뒤도 보면서, 내 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도 집중해 보면서, 이제 곧 사라질 봄의 향기도 실컷 맡아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