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줄게 잘 살아

그 아저씨를 향한 랜선 뒷담화

by 온작가


'위층 아이 발소리, 이제 진짜 역겹네요'


그는 정확히 그렇게 표현했더랬습니다.

역.겹.다...




이제 겨우 세돌이 조금 지난 조그만 여자아이인 데다 세상에 무서운 것도 조심해야 할 것도 너무 많아서 늘 울거나 저희 뒤로 슬그머니 숨는... 이런 아이의 '발소리'가 문제가 될 줄은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는 원래부터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었어요. 우리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도 저희만 만나면 '밤마다 돌 굴리냐, 드르륵드르륵 소리가 너무 거슬린다' '밤마다 식탁 의자 끄는 소리가 너무 크다' '새벽 두 시쯤 싸우지 않았냐, 누가 소리소리 지르던데' 등등... 세상의 모든 '소리'에 대한 책임을 우리가 져야 한단 식이었지요.



밤마다 돌 굴리는 ㄸㄹㅇ가 있다면 차라리 데려와 보았으면 좋겠고 밤에 식탁엔 앉은 적도 없으며 결혼하고 큰 소리 내서 싸운 기억이 단 한 번도 없는데 (이건 새삼 신기하네요) 출처가 불명확한 그 소음들이 다 우리 탓이라니요. 정말 억울할 뿐이었지만 한 번도 대응을 하지는 않았어요. '층간소음'으로 인한 이웃 간의 갈등이 사회적 이슈로 확대된 지 오래였고 주차장에 숨어서 기다렸다가 남편을 저격하고도 남을 것만 같은 그 사람의 음흉한 눈이, 입꼬리가 뭔가 오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최근까지 계속해서 아기의 발소리를 지적하더니 이제는 급기야 '역겹다'는 표현까지 하는 걸 보고 우리는 바로 결심했어요. 도저히 안 되겠다, 떠나자...


그의 그 한 마디는 무척이나 강렬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부모가 금쪽같은 내 새끼에게 '역겹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는 사람과 이웃으로 살고 싶겠나요?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으며 살게 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사람에게 잘 쓰지도 않는 그런 몰상식한 표현을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사람과 한 건물에서 살게 하는 것만큼은 필사적으로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아이가 아는 세상이라곤 집과 어린이집이 전부인데, 그중 한 곳이 그렇게 처참히 망가진 모습이라면 그건 너무 안타까운 일이니까요.


"하온아 우리 이사 가자"

집을 내놓고 아이에게 얘기를 꺼내기 무섭게 이런 말이 돌아옵니다.

"엄마 거기서는 뛰어도 돼?"


무조건 제일 아래층에 있는 집들만 봤습니다.

"보통 진짜 짓궂은 형제가 있는 집이라면 1층을 선호하시지만 이렇게 얌전한 꼬마숙녀 한 명만 있는데도 1층이요?" 부동산에서 오히려 놀랍단 반응이었지만 뷰가 어떤지, 되팔 때 어떤 손해가 있을지 그런 건 이미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우리의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가닿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의 집도 팔렸고 새 보금자리도 결정됐습니다. 그야말로 '일사천리'였지요.




201호 아저씨...

늘 이사를 꿈꾸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행동에 옮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우리가 늘 갈망하던 삶을 '실행'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저희는 지금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아이를 키울 수 있게 됐어요. 서울 토박이인데 시골 아이처럼 해맑고 순박해 보인다는 저희 아이... 발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며 억압당하던, 갑갑하고 무시무시한 곳을 떠나 드디어 더 순박하고 더 해맑게 자랄 수 있는 새 무대를 만나게 되었어요. 당신 덕분에 이렇게 새 출발을 합니다.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이 무척이나 어려운 나이이지만, 당신 덕분에 모든 것 버리고 내려놓을 수 있었어요.


당신이 '역겹다'라고 표현했던 그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예쁘게 자랄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 번 보여주고 싶군요.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네요.


늘 저희에게 '애 교육 어떻게 시키는 거냐' 하셨죠?

저희, 애 교육 잘 시키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아빠는 온몸으로 엄마는 책으로 이야기로... 아이와 늘 함께 하며 어딜 가나 '영재'소리 드는 아이로 잘 키우고 있으니까요.

어떻게 써도 비꼬는 걸로 들릴 거 같지만 우리를 희망으로 가득한 새 출발선에 세워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꺼져줄 테니, 잘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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