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00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단상

27번째 10월|좋아진 것, 여전히 좋은 것, 아직도 좋은 것

by 으나수





좋아진 것


단발머리

27살은 줄곧 단발머리로 지냈다. 지금 하고 있는 헤어 스타일은 어깨 위에서 찰랑이는 태슬컷. 왜 이제야 짧게 잘랐는지 후회할 만큼 단발이 무척 잘 어울린다. 심지어 민낯이어도 괜찮을 정도. 깔끔하면서도 시크한 무드가 연출되어 마음에 든다. 어렸을 땐 굵은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를 이유 없이 고집했다. 나이가 들수록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구별할 수 있는 노련함이 축적된다.


포트메리온 컵과 컵 받침

이제 포트메리온이 예뻐 보인다. 컵은 두꺼워야 안정감도 있고 고급스럽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쓰는 것은 파란색 릴리꽃이 그려진 컵과 컵 받침. 전체적으로 깊고 둥그스름한 모양이라 굴곡이 화려하지 않아서 좋아한다.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시간이 은근히 우아해졌다.


프로폴리스 에센스와 콜라겐 앰플

20대 후반이 되니 피부가 건조해지면서 탄력이 떨어졌다. 조금 울적하기도 하지만 평생 손이 가지 않을 것 같았던 제품을 써 보는 계기가 되어 기분이 색다르다. 기능성 제품인 만큼 피부 변화가 느껴져서 신기하다. 프로폴리스 에센스는 영양감이 가득한 쫀쫀한 제형으로 아침에 발라 주면 보습을 하루 종일 유지할 수 있다. 콜라겐 앰플은 우유처럼 뽀얗고 묽은 제형으로 저녁에 넉넉한 양을 바르면서 얼굴 마사지를 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해야지. 거울 앞에서 혼자 스킨케어를 하는 순간에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다.


가습기

텀블러처럼 생긴 민트색 미니 가습기이자 27살 가을에 처음 사귄 책상 위의 친구. 작지만 확실한 효과가 있다. 스탠드 조명만 켜 둔 정적 속에서 무음에 가까운 존재감을 뽐낸다. 공중으로 흩어지는 차가운 연기가 원인 모를 허무함으로 와 닿을 때가 있다.


올드 팝송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홀리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창가에 걸터 앉아 기타를 치며 〈Moon River〉를 부르자 낡은 타자기로 글을 써 내려가던 가난한 소설가 폴이 그 노랫소리에 반한다. 1962년에 개봉한 고전 영화임에도 한 폭의 자장가처럼 평온하다. 밴드 더 마카롱 프로젝트가 커버한 〈Fly Me To The Moon〉을 들으며 다 괜찮을 것이라고 마음을 토닥거리기도 한다. 가사가 얼마나 다정한지. “Fly me to the moon and let me play among the stars(나를 달로 데려가 줘요 별들 사이에서 놀 수 있도록 말이죠). You are all I long for all I worship and adore(당신은 내가 열망한 모든 것 내가 흠모하고 존경하는 모든 것이에요).”





여전히 좋은 것


보라색

연한 회색을 머금은 탁한 보라색. 보라색만의 차분함과 애틋함을 좋아한다.


고요와 적막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이면 이대로 침묵과 함께 죽어 버리고 싶다고 갈망할 때가 있다. 조용한 공간마저 침해당하면 살아가기가 힘들다. 너무나 사랑하고, 사랑하다 못해 없어서는 견딜 수가 없고, 견딜 수 없다 못해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서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으로 변한다. 가시가 빽빽하게 돋은 복어처럼. 아주 살짝이라도 시끄러우면 맹독을 뿜겠다고 경고하듯이.


바닐라 아이스크림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냉장고에서 커다란 바닐라 아이스크림 통을 꺼낸다. 와인 잔을 닮은 투명한 유리 컵에 아이스크림을 적당히 옮겨 담고 나무 숟가락으로 조금씩 퍼 먹으면 입안에 퍼지는 바닐라 맛이 부드럽다. 언젠가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은 사람으로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바란 적이 있다. 담백하고 무해하며 한결같은 삶.


우주 다큐멘터리

우주 먼지는 영겁의 시간이 지나 행성이 되고 위성들과 중력을 주고받으며 그들만의 자리에서 무한하게 돈다. 별로 태어나 블랙홀로 죽을 때까지의 연대기는 항성마다 헤아릴 수도 없다. 우주선이 목숨을 바쳐 우주를 유영해도 탐사 범위는 사람이 보는 밤하늘의 2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한다. 광활하고 아득한 우주에서 인간은 홀연히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티끌보다도 미세한 존재이다. 이보다 우주적인 위로는 없다.


바닷소리

청량하고 시큼한 냄새. 발이 푹푹 꺼지는 모래사장의 감촉. 철썩이며 물결치는 파도. 해변까지 밀려드는 물거품. 바다가 품은 태초의 역사. 그런 바다에게 무의식적으로 털어 놓았을 무수한 사연들.


장 폴 사르트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서 연약함 속에 존재를 이어가다가 우연하게 죽는다. 자유란 당신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당신이 실행하는 무엇이다.”


편백나무와 라벤더 비누

공간은 향으로 완성된다. 디퓨저는 우드 향과 머스크 향이 은은하게 섞인 편백나무 향을, 향수는 도도하면서 포근한 라벤더 비누 향을 쓴다. 라벤더 입욕제로 거품 목욕을 하고 자그마한 서점에서 새 책을 읽는 듯한 기분에 한껏 취한다. 불안정한 정신을 건강하게 가꾸려면 주변을 감도는 편안한 공기가 꼭 필요하다.


소설 쓰기

창작은 현실을 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마법이자 탁월한 우울증 치료제이다.





아직도 좋은 것


〈하울의 움직이는 성〉 하울 첫 등장 씬

지브리 남자 주인공 중에서 나이는 가장 많은 주제에 철은 가장 들지 못한 애어른. 그럼에도 수려한 미모로 모든 것을 용서받는 사기적인 캐릭터. 몇 달만 지나도 하울이 누나라고 부를 나이가 될 텐데 그가 소피의 어깨를 감싸 품으로 끌어당기며 한참 찾았다고 말하기만 하면 어김없이 설레고 만다. 하울의 첫 등장 씬은 다 죽은 연애 세포도 한 방에 깨워 주는 전기 충격기와 비슷하다.


〈블리치〉 우르키오라 먼지 되는 씬

감정이 없는 괴물이 감정이 풍부한 여자를 만나 마음이란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사막의 모래처럼 바스러지며 덧없이 사라지는 장면. 그렇게 무()로 돌아가면서도 마지막까지 오리히메를 응시하며 손을 뻗은 채 마음이란 이 손 안에 있는 것이었다고 독백하는 우르키오라의 목소리가 애절한 듯 행복하게 들린다. 소년 만화 속 매력적인 악역의 엔딩 씬을 보며 눈물을 삼키는 27살이라니 다소 코믹한 상황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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