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00

좋아하는 꿈에 대한 기록 (2021)

28번째 1월|88편의 꿈 일기 중에서

by 으나수






조그맣고 보송한 소년과 함께 살게 되었다.

날씨 같은 애였다. 욕조에 잠겨서 물에 흐물흐물 젖어 있다가도 세상에서 가장 포근하고 노곤하게 되고는 했다. 나는 얘가 너무 신기했다. 얘도 이런 게 신기하다고 했다. 축축했다가 보송해지는 게. 오후 햇살이 들어오는 나른한 주말에 팔베개를 해주며 낮잠을 잤다. 어쩌면 얘는 사람이 아니라 솜뭉치나 양털이 아닐까. 나는 이미 어른 같은 어른이 되어버렸는데 이런 내가 감히 얘랑 같이 살아도 되는 것일까.

우리의 평온함에 죄책감을 느꼈다.

(210211)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마지막으로 밥을 같이 먹고 싶은 사람은 K를 골랐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마지막으로 사랑해보고 싶은 사람은 N을 골랐다.

K는 붕어처럼 입술을 내밀고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210220)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쭈그려 앉아 울고 있는 J가 있다. 몸은 어른인데 정신은 아이다. 제정신이 아니며 말을 하지 못한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주차장으로 걸어오는 D가 있다. 그는 J를 보고 당황하여 쩔쩔매다가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기로 한다. 함께 주차장을 가로질러 걸어간다. 문을 열어둔 채 주차된 차가 한 대 있다. 갑자기 J가 그 차의 뒷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다리를 모으고 고개를 묻은 채 한껏 웅크린다. D는 J를 어떻게든 달래가며 차에서 꺼내 품에 안는다.

J는 전생에 연인에게 배신을 당했으며 D는 전생에 연인을 배신했다. J는 전생에 연인에게 배신을 당한 순간 충격을 받아 현생으로 타임슬립을 했으며 D는 전생에 연인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잊었다.

(210306)



소나기가 온다.

바람이 거세다.

우산을 쓰고 걷는다.

우산을 쓰고 걸으려고 한다.

아무리 걸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미약한 인간이 거대한 운명 앞에서 발버둥치는 듯한 허무함을 느낀다.

(210308)



연구소에 갇혔다.

흰색 벽과 흰색 바닥과 흰색 테이블과 흰색 의자가 있는 흰색 연구소였다. 흰색 가운을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나는 10분 후면 저절로 숨이 끊겨서 죽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곳은 원래 그런 시스템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여자는 내게 임종을 편하게 해주는 상담사를 부르겠냐고 물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사탕 껍질이 가득 들어 있었다.

나는 여자에게 쓰레기나 버려 달라며 사탕 껍질을 건넸다.

(210331)



야. 그냥 살던 대로 살아.

너를 본 날보다 너를 보지 않은 날이 더 많아졌어.

나는 너의 지난 너를 모르고 너는 나의 지난 나를 몰라.

그런데도 어물쩡 덮고 지나가겠다고?

(210416)



버스를 타고 가는데 정류장에 앉아 있는 Y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떼지 않고 서로를 응시했다. Y는 자신에게 올 테면 와 보라는 듯이 손짓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Y의 옆에 앉았다. Y는 영원히 늙지 않을 것 같은 소년미가 있었다. 우리는 아주 잘 맞았다. 한적한 시골길이었고 아무도 Y의 존재를 몰랐다. 기분이 좋았다. 나는 Y를 소유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Y는 언제까지나 한결같이 이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기다리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매일 버스에서 내려 정류장에서 Y와 순간을 함께했다. 우리는 이토록 당연한 관계였다.

어느 날 Y가 시한부 유령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날 나는 버스에서 내리지 않았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로즈가 잭이 남긴 목걸이를 바다에 던져버린 마음과 같았다. Y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나는 버스 창문을 열고 울먹이며 소리쳤다.

이 거짓말쟁이야아아.

(210419)



다정한 존재와 결혼했다.

사람이 아니었지만

사람의 형태로 둔갑해주는 배려가 있었다.

사람의 형태로 둔갑해주는 배려가 있었지만

그는 오로지 새벽에만 나타났다.

외로웠다.

내가 허언증 환자는 아닐까 생각했다.

처음부터 다정한 존재 따위는 없었을지도.

(210423)



임신을 했다.

차를 타고 가는데 양수가 터졌다.

급하게 수술대에 올랐다.

아이를 낳았다.

고등학생이 된 아이와 사랑에 빠졌다.

나는 남자였다.

아이도 남자였다.

스펙터클했다.

(210425)



A와 B와 C가 있다.

책이 한 권 있다.

책 속에서 살 수 있다고 한다.

책은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다.

책에서 나올 수도 없다.

A와 B는 책에 들어가지 않기로 한다.

C는 책에 들어가기로 한다.

A와 B가 위험하다며 말린다.

끔찍한 갇혀서 영원히 윤회할지도 몰라.

C는 말한다.

그게 현실과 무엇이 다르지?

(210711)



검은 고양이가 있다.

까만 털이 멋스럽다.

어쩐지 신비한 분위기도 감돈다.

이 검은 고양이야말로 조물주의 환생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내 방 침대에서 자고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덩어리가 발끝에서부터 접근해온다.

책상에 둔 낡은 라디오에서 소리가 들린다.

남녀의 목소리가 섞여 저음으로 굵게 변조된 목소리다.

목소리는 외계어를 구사하며 괴성을 지른다.

검은 덩어리가 자신이 조물주라며 발악한다.

검은 덩어리가 내 입과 코를 틀어막는다.

숨을 쉴 수가 없다.

몸부림을 치며 저 멀리 떨쳐낸다.

검은 덩어리가 다시 우다다다 달려든다.

나는 살기 위해 억지로 깨어나 바로 이 꿈을 적는다.

(210714)



고등학생이었다. 정신이 없고 산만했다. 그러나 자유롭고 낭만적이었다. 부모가 ADHD 약을 강제로 먹이려고 했다. 야밤에 자전거를 타고 도주했다. 마구 달리다 보니 통유리로 된 가게가 나왔다.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인테리어 잡지에 박제된 가상 공간 같았다.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졌는지 무릎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사장이 무릎에 약을 발라주고 라면을 끓여주었다. 저쪽 빈 방에서 자면 된다고 했다. 이미 어떤 남자가 자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 남자와 대화를 나눴다. 묘하게 안정적이고 기분 나쁘게 비관적이며 이상하게 가라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어른이 된 후 스스로 ADHD 약을 챙겨 먹더니 저렇게 변했다고 사장이 말했다.

어렸을 때는 구름 일기를 쓴다면서 매일 하늘을 보며 구름을 그렸어. 지금은 약에 찌든 무감각한 인형일 뿐이지.

(210718)



화장을 하려고 거울 앞에 선다.

피부가 벌집 무늬로 흉측하게 갈라져 있다.

진피와 근육까지 훤히 들여다 보인다.

당황한다.

파운데이션을 두 겹이나 바르기로 한다.

당연히 전혀 소용이 없다.

(210825)



산골 마을에 살고 있는데 화산이 터졌다. 영화 〈볼케이노〉처럼 용암이 흘렀다. 이렇게 죽는 건가 싶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되는 대로 도망쳤다. 그러다 뒤를 돌았다. 자세히 보니 용암이 아니라 반숙 노른자였다.

왜 노른자를 용암으로 착각했는지 의문을 품었다.

정말 우스꽝스러운 짓이었다면서.

(211201)



분홍색 점프슈트를 입고 하늘색 워커를 신은 킬러 집단이 있었다. 그중 M은 누군가에게 이들을 말살하라는 지령을 받은 스파이였다. 감정이 있으나 없는 척하는 이들을 감정이 없으나 있는 척하는 M이 전부 죽였다. M에게 지령을 내린 누군가가 누구일까 궁금했다. M이 시체에 둘러싸인 채 카메라를 빤히 응시했다.

그 누군가가 나란 걸 깨달았다.

(211216)



큰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잠옷을 입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과자를 먹으면서. 베란다 너머로 건너편 집이 보였는데 귓속말도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 그 집은 파란색 커피숍의 위층이었다. 내가 사는 주택가에서 그 집만 합성한 것 같았다. 빈티지 북유럽 감성이 물씬 묻어나면서 로맨틱한 발코니까지 달려 있는 집이었다. 강아지와 고양이를 열 마리도 넘게 키웠다.

홀린 듯 구경하다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새끼 강아지 몇 마리가 팔을 타고 내 방으로 건너왔다. 어떡하지 싶어서 당황했다. 발코니에 단발머리의 프랑스 여자가 서 있었다. 나는 바로 강아지를 되돌려주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눴다. 어설픈 영어였지만 하고 싶은 말을 최대한 표현했다. 집이 예쁘다. 동물이 많아서 좋겠다.

여자는 나에게 투명한 비닐봉지를 건넸다. 손가락만 한 작은 동물 봉제 인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마음에 드는 것으로 몇 개 가져가라고 했다. 연보라색 보닛 모자를 쓴 오리 인형을 골랐다. 잠옷 주머니에 있던 몇 천 원이라도 주려는데 여자가 자신이 수제로 만든 인형이라고 했다. 나는 침대 구석에 박힌 지갑을 찾아와 허겁지겁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건넸다. 여자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우리는 발코니에서 계속 이야기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유쾌한 시간이었다. 여자가 파란색 커피숍에서 커피라도 한 잔 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옷을 챙겨 입고 내려갔다. 문득 내가 왜 나왔는지 잊어버렸다. 파란색 커피숍은 2층이 없었는데.

칙칙한 회색 하늘뿐. 비가 내리는 늦은 오후였다.

(211220)



우리는 형제다.

말린 뱀 고기로 만든 인공 피부를 가진 형제다.

나무 껍질 같은 인공 피부를 가진 형제다.

태어날 때부터 기형이었더라.

살려고 수술대에 올랐더라.

나는 형을 많이 좋아한다.

형도 나를 끔찍히 아낀다.

너희들은 우리를 조롱한다.

기괴하지도 역겹지도 우울하지도 않다.

우리는 서로에게 진심이다.

우리는 너희들보다 행복하더라.

(211227)





최현우, 〈오후 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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