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많은 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살아간다

상상과 불안의 파도에 휩쓸릴 때

by 은하수

며칠 전 오랜만에 글 친구를 만났다. 기획자이기도 한 친구가 직접 만든 질문 카드 더미를 내밀었을 때 준비성과 실천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로 고양이 일러스트로 이루어져 있던 아기자기한 카드 중 흑백 카드 한 장을 뽑아 들었다.


"올해 가장 후회하는 소비는?"


뒷면에 적힌 질문을 보고 한참 동안 고민했다. 친구들과의 약속, 여행, 뮤지컬, 농구 관람처럼 주로 경험에 돈을 쓰다 보니 비쌀지언정 만족스러운 소비였다. 이미 지나간 일은 후회하지 않는 편이기도 했다. 20대 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후회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과거보다는 도달할 미래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오늘에 머무르면서도 습관처럼 내일모레, 다음 달, 몇 년 후를 그려보곤 한다. 영화 <컨택트(2016)>처럼 내가 감각하는 삶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은 매혹적이다. 로또를 손에 쥔 채 발표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미래를 바라보며 기대에 부풀었다가 불안에 휩싸이기를 반복했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나서는 꽤나 놀랐다. 그들은 내일을 모르는 사람들처럼 오늘, 지금, 여기에 존재했다. 그들을 관찰해 보니, '만약에'로 시작하는 허무맹랑한 가정과 밸런스 게임을 어려워하며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능력을 지녔다. 無생각이라니. 수행 없이도 그런 게 가능하다고?


내 머릿속은 언제나 생각이라는 바다에 뒤덮여 있다. 부유하는 잔해를 피하려고 애써봐도 늘 부딪히고야 만다.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낳고 상상을 키운다. 상상은 무한한 가능성을 불러온다. 불안과 걱정은 덤이다. 그렇게 오늘도 속절없이 생각의 굴레에 사로잡히고 만다.


다음 주말에 주최하는 홈파티는 그래도 즐거운 상상에 속한다.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초대장도 만들어서 뿌렸는데 요리를 망치면 어떡하나 싶다. 요리를 선보이는 것도, 7인분의 음식을 차리는 것도 처음이라 걱정되지만 치킨스톡이 있다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응원하는 농구팀 플레이오프 대진을 고민하는 일은 조금 더 복잡하다. 경우의 수가 많기 때문이다. 청주팀만 만나지 않는다면 좋겠는데. 왕복 300km는 당일치기로 다녀오기가 쉽지 않다. 그때쯤이면 다시 취직했을 텐데, 평일 경기를 볼 수 있을까? 그런데 취직은 할 수 있을까?


요즘 주로 도달하는 미래는 2월 말, 설날 이후이다. 기존의 일자리도 위협받는 마당에 새롭게 한 자리를 꿰차는 것도, 풀타임 근무와 글쓰기를 병행하는 것도 무엇 하나 쉬워 보이지 않는다. 불안과 걱정이 해일처럼 덮쳐온다. 섣부르게 미래로 갔다가 미아가 돼버린 나를 불러오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집을 나서는 수밖에 없다.


오늘은 PT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몇 번 남지도 않은 비싼 수업에 지각하고는 자책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를 때, 짤막한 스트레칭만으로도 감각이 곤두섰다. 존재조차 몰랐던 승마살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체 위주의 고강도 운동이 이어지면서 스프링처럼 늘어났던 시간 감각이 현재로 돌아왔다. 30분간 러닝머신까지 뛰고 나니 생각이란 걸 할 여력이 남아나지 않았다.


빳빳한 헬스장 수건으로 땀에 젖은 얼굴을 닦고 나니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 머릿속이 고요해졌다. 다만 부작용도 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거실에 털썩 드러누워 일어날 수 없었다. 이런 체력으로는 운동이 끝나고 다른 스케줄을 잡을 수가 없다. 씻을 힘도 없어서 한 시간 넘도록 널브러져 있다가 배고픔에 못 이겨 겨우 몸을 일으켰다.


신기하게도 운동을 하고 나면 머리가 하얀 도화지처럼 맑아진다. 생각이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런데 운동을 과하게 한 탓일까. 소설 쓰기에 필요한 상상력과 집중력까지 말끔히 씻겨 나간 듯하다. 이런. 소설은 내일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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