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외향인의 첫 음악 치료

어색함을 떨쳐내고 리듬과 멜로디에 나를 맡기는 용기

by 은하수

12월이 되면 딱히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연말이네 싶어 어김없이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차가운 도시 서울에서 겨울을 맞이한 지도 10년이 훌쩍 넘었는데 영하권 추위에는 여전히 적응하기 어렵다. 몸을 잔뜩 웅크리다 보면 소화도 안 되고 온몸이 시리다 못해 장기까지 꽁꽁 얼어붙는 기분이다.


추위에 약한 탓에 방구석에 틀어박힌 채 밤낮이 뒤바뀐 생활이 이어졌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 서울청년센터에서 운영하는 음악 치료 프로그램에 신청했다. '음악으로 나를 돌아보고 나만의 음악을 만든다'는 소개글을 몇 번씩 읽어봐도 알쏭달쏭하기만 했다. 음악 좋아하니깐 뭐 재밌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이었다. 수업 시작 직전까지도.


한기가 흐르는 강의실에 8명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고 음악 치료를 전공하는 선생님은 기타가 내는 음에 맞추어 자기소개를 '노래'했다. 어색한 눈 맞춤과 미소가 이어지고 색다른 자기소개도 끝이 났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선생님은 자연스럽게 내게 바턴을 넘겼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선생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은 게 화근이었다. 나도 모르게 문 쪽을 쳐다봤지만 도망가기엔 이미 늦어 보였다. 나름 외향인으로서 힘을 내 생각보다 높았던 음에 맞추어 겨우 나를 소개했다.


사람들 앞에서 몸을 이용해 소리 내고, 인디 음악을 개사해서 부르는 일은 용기가 필요했다. 시선이 쏟아질 때마다 잘 해내야 한다는 긴장감과 수행 강박에 시달렸다. 반면 악기를 이용한 활동은 한결 부담감을 내려놓고 재밌게 참여할 수 있었다. 주관식 문제를 앞에 두고 끙끙대다가 객관식 문제로 넘어가니 난이도가 확 내려가는 기분이랄까. 먼 훗날 무슨 바람이 불어 할머니 밴드라도 결성하게 된다면 프런트 퍼슨만큼은 피해야겠다 싶다.


90분을 알차게 채운 다양한 활동 중에서 가장 좋았던 건 음악 명상이었다. 눈 감고 음악에 귀 기울였다. 웅장한 판타지 같은 클래식 선율 위로 선생님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러분이 있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요? 마음껏 상상해 보세요."


세속적이게도 내곡동 30평대 아파트에서 애인과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며 사는 내 모습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통창으로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 거실과 글에 집중할 수 있는 작업실이 있는 집. 사실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진 않지만 애인의 평생소원인 탓에 상상 속에서나마 흔쾌히 들어주기로 한다.


다음은 저 멀리 미국으로 날아간다. 미국에 가본 적 없어서 영화와 드라마에서 본 전형적인 이미지에 의존했다. 한적한 중산층 동네(주로 백인들이 모여 산다)에 위치해 넓은 마당과 차고지가 딸린 단독 주택에서 친구들과 함께 바비큐를 즐기는 여유로운 모습을 그려본다. 휴일이면 브로드웨이에 가서 뮤지컬도 보고 말이다. 평행 세계에서나 이뤄질 법한 삶이었지만, 무의식이 양심상 수영장이 딸려 있는 집까지는 바라지 않은 모양이다.


즐겁고 덧없는 상상을 이어가도 음악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다음 상상에 돌입했다. 이번에는 서점이다. 대형 서점 가판대에 깔린 내 책들이 내려다보인다. 히트텍과 국밥 없이도 마음이 온기로 가득 채워진다. 인기 작가라면 북 토크도 빼놓을 수 없지. 은은한 조명이 번지는 무대 위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3인칭 시점으로 보인다. 내 글을 읽어주는 고마운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사인회도 열린다. 아, 사인 연습도 해야 하는데. 전업 작가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가장 간절히 바라고 꿈꾸는 모습이다.


이쯤 되니 기분이 꽤 좋아졌다. 사람은 자신이 이룰 수 있는 만큼 상상할 수 있다는 구절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작가로서 성공한 내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면 내가 가닿을 수 있는 미래기도 하다는 뜻이다. 얕은 통장 잔고가 꿈을 위협하고 있지만 이미 수많은 작가들이 글을 쓰기 위해 다른 일을 병행하고 있다. 씁쓸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내게도 포근한 볕이 드리우지 않을까?


음악이 끝나고 눈뜬 후에야 깨달았다. 요즘 농구 덕질로 도파민 충족하며 지냈는데, 놀랍게도 명상 동안 농구의 'ㄴ'도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최애의 영상을 돌려보고 정신을 빼앗긴 채 살았는데 어째서일까.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지만 잡지 못할 걸 알아서 중독적인지도 모른다. 욕망의 층위가 다르다는 걸 깨닫자 1년 넘도록 폭주하던 덕질 기관차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태생적으로 불균형할 수밖에 없는 관계 때문에 번뇌에 시달리던 마음도 조금은 홀가분해졌다.

진심으로 원하는 걸 알고 나자 홈파티를 위해 부지런히 치운 집처럼 마음이 정돈됐다. 파티가 끝나고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집안은 어딘가 쓸쓸하다. 고요한 집에 혼자 남았다고 동네방네 소리치며 아무나 들일 수는 없다. 대신 뒷정리를 마치고 행복한 시간을 떠올리며 잠자리에 들거나 노트북을 켜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방법을 택해보기로 했다. 이리저리 흩어진 무게추를 내게 옮겨오기로 했다.


프로그램이 끝날 즈음엔 제법 익숙해져서 리듬에 맞춰 가볍게 몸을 까딱였다. 선생님은 일회성 수업이어서 다양한 활동을 준비해 보았다며, 4회기 정규 수업 때는 조금 더 심도 있는 음악 치료가 진행될 거라고 일러주었다. 사람들 앞에서 어떤 심연을 끄집어내게 될지 무서우면서도 다음번엔 어디로 날 데려다 줄지 궁금했다.


새해를 맞이해 신청서를 다시 열어보았다. 마침 신청 마감일도 1월 1일까지였다. 나는 숨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신청서를 써 내려갔다. 겨울바람에 부대끼는 앙상한 마음을 붙잡아줄지도 모르지. 기지개를 켜고 밖으로 나가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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