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반갑게 맞이하는 법, 식물 쇼핑

by 은하수

여전히 외투를 껴 입어야 하지만 더 이상 매서운 바람이 뺨에 달라붙지 않는다. 봄 햇살을 등에 업고 의기양양해져 땀을 식힐 겸 헬스장에서 집까지 걸어왔다. 몇 개월 만의 일이었다.


성큼 다가온 봄이 반갑다. 추위에 약한 탓에 겨우내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침대에 누운 채 생각의 감옥에 갇힌 나를 깨운 건 바로 봄이었다. 얼어붙은 땅에서 깨어난 개구리가 전생에 내 모습이었을지도. 설 연휴에 정리하려 했던 크리스마스트리를 아직 치우지 못했지만 봄맞이할 생각에 안달이 났다. 불광천을 달리기엔 아직 일렀고 프리지어 꽃을 사고 싶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식덕'들의 성지로 유명한 파주 조인폴리아였다. 창고형 화원으로 규모도 크고 온갖 식물을 저렴하게 판매한다. 4년 전 이곳에서 데려온 친구들은 모두 시들어 죽어 버렸지만…. 내겐 말 못 하는 식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돌보는 재주가 없었다.

애니시다처럼 예뻐서 데려왔던 식물부터 이사 기념으로 들인 홍콩야자, 아레카야자, 키우기 쉽다는 스파티필름, 선인장, 다육식물까지 안 죽여본 식물이 없었다. 사무실에서 잘 키우던 금전수도 지난겨울 우리 집에서 겨울을 나자 이파리가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해 황급히 안방으로 들였다. 다시는 식물을 안 키워야지 다짐했는데. 어쩌면 올해의 나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이번엔 먹을 수 있는 식물을 키우고 싶었다. 야채칸에 웅크린 방울토마토를 빨리 해치워야 했다. 샐러드, 파스타, 와인과 잘 어울리는 식재료를 떠올렸다. 바질 화분과 프리지어 한 단을 사고 싶다고 생각하며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마른 밭 사이로 난 좁은 흙길을 접어들었다.


몇 년 새 입소문이 더 퍼졌는지 화원은 2022년 봄에 왔을 때보다도 붐볐다. 마감이 한 시간 반 밖에 남지 않아 마음이 급했다. 쫓기듯이 초록빛 식물들을 눈에 담다가 관심이 가면 구글에 검색했다. 더 이상 외형만 보고 식물을 집어들 정도로 무모한 식집사는 아니었다.


잎이 얇고 풍성한 고사리를 키우고 싶었지만, 구글 검색 결과 더피 고사리는 습한 환경을 좋아했다. 지중해도 아니고 서울에서 일 년 내내 70퍼센트 습도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수형이 예쁜 올리브나무도 끌렸지만 열매를 맺으려면 두 묘목을 함께 심어야 한대서 두 배로 자신이 없어졌다.


너른 마당이 있는 주택에 살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인 채 다육 식물에 속하는 목단과 스위트 바질을 카트에 담았다. 이 정도는 키워볼 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파트너는 노란 바탕에 초록색 무늬가 번지는 수채화 고무나무를 골라 들었다. 내가 알던 고무나무와 다르게 붓으로 그린 듯한 잎 무늬가 아름다웠다.


헬스장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은 도로를 따라 나 있었다. 상쾌한 발걸음은 어느새 퀴퀴한 매연에 희석되고 말았다. 화원에서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은은한 풀 향기를 맡았고 과실수가 모인 코너에서는 단내가 났다. 푸른 식물이 가득한 공간에 머무르며 봄기운에 스며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로즈메리를 골라 들진 않았을 테니까.

로즈메리는 채광, 통풍이 중요해 중급 난이도인 식물이다. 그것도 모르고 볕이 안 드는 자취방에 로즈메리 화분을 들고 왔다가 일주일 만에 죽인 적이 있다. 여전히 자신 없지만 도전해보고 싶었다. 실패했던 경험에 사로잡혀 포기해 버리면 로즈메리를 키우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을 뿐이니까. 이제는 아침마다 볕이 드는 창가도 있다.



관엽식물, 다육식물, 양치식물, 과실수, 희귀 식물까지 판매하는 조인폴리아에 딱 하나 없는 게 있다. 바로 꽃이다. 프리지어 한 다발을 화병에 꽂아 다이닝 테이블에 올려두고 싶었는데. 집안에 봄을 퍼뜨리고 싶었던 마음을 접으려던 순간, 파트너가 말했다.


"여기 프리지어 화분 있어."


노란 봄꽃인 애니시다 화분을 들였다가 여름도 채 넘기지 못했던 기억이 스쳐갔다. 프리지어 화분은 5,500원. 동네 꽃집에서 사는 것보다 저렴했다. 직접 키워서 꽃을 틔운다면 보람 있을 테지만 그때처럼 또 죽일까 봐 겁이 났다. 화분이 죽을 때마다 마음속 잔가지가 하나씩 꺾이는 괴로움을 느꼈다. 이미 수많은 생명을 착취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인데도 눈앞의 생명을 죽였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검색해 보니 프리지어는 구근을 잘 보관하면 월동할 수 있다고 한다. 어쩌면 기나긴 추위를 견디고 함께 내년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구근 네 대가 심어진 프리지어 화분을 집어 들었다.



화분 다섯 개와 분갈이용 흙 3팩을 사서 차에 실었다. 식물 쇼핑은 끝났지만 식집사로서 삶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햇빛을 좋아하는 정도에 따라 목단, 프리지어는 거실 창가에 두고 고무나무는 거실 안쪽에 둔다. 강한 햇빛을 좋아하는 로즈메리, 바질을 키우려면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어둬야 하는데 화분 걸이라도 사야 하나 고민이다. 햇빛, 바람, 물, 기온 취향이 제각각인 다섯 친구들을 잘 돌보고 싶다. 사람도 사계절을 나기가 쉽지 않은데. 겨울이 되면 기력 없고 봄이 되면 살아나는 나도 봄맞이 식물들을 닮은 듯하다.

차를 타고 흙길을 빠져나오는데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미동 하나 없이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웅크린 채로. 따뜻한 햇살과 바람이 간질이면 다시 푸른 잎이 돋아날 순간이 기다려졌다.


작가의 이전글삶이 어려울 때 나는 시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