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지나간 것들에 대하여
임신 중인 엄마의 직무 유기
우리 집 아이 둘은 첫째가 19년 1월생, 둘째가 21년 10월생으로, 2년 9개월의 개월 수 차이가 난다. 둘째를 임신 중이던 시기에도 한참 코로나가 성행했고, 임신 초반에는 외출하는 편이었으나, 후반에 들어서면서 자궁경부 길이 문제로 나는 출산 전 두 달가량을 누워서 보냈고, 첫째 아이는 임신 중이던 나와 함께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집에 TV는 없었고, 아이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는 엄마도 아니었지만, 그때 나는 왜인지 아이에게 책을 자주 읽어줄 생각을 못 했다. 아이는 어린이집 같은 기관(캐나다에서는 데이케어라고 한다)을 다니지 않았었고, 아이와 집에 둘이 있는 시간이 너무 긴 데에서 오는 부담감과 임신으로 인한 호르몬 변화와 몸이 무겁고 불편한 데서 오는 귀찮음은 나를 첫째 아이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했다. 아이에게 책을 많이 접하게끔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어서, 한국에서 가져온 추피 시리즈 책과 도레미곰 시리즈가 집에 있었는데, 아이는 혼자 책장을 넘기며 그림을 보았다. 내가 가끔 읽어주기는 했지만,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고, 책을 읽지 않는 시간에 아이는 내가 보는 앞에서 퍼즐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3, +4라고 적합 나이대가 쓰여있는 퍼즐들을 능수능란하게 맞추는 세 살이 채 안 된 아이를 보면서, 역시 우리 아이는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안심했다. 아이는 성향이 얌전하고 내성적이었던 것뿐이었는데, 혼자도 잘 있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아이를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하는 순하고 착한 아이라고 생각하면서, 내 역할을 불성실하게 했다.
엄마 괴롭히는 것은 뭐, 다들 하니까…
마냥 순하고 착한 아이라고만 여겨지는 것은 싫었는지, 아이는 무엇인가 본인이 집중하며 노는 시간 외에는 끊임없이 엄마인 나를 괴롭히며 즐거워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의 괴롭힘은 자기에게 많은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 엄마에 대한 일종의 공격 행동이었을 것이다. 자기를 봐달라는 관심 요구의 표현을, 아직 어린아이는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나 또한 사려가 부족한 엄마였던지라 그 행동 기저에 있는 아이의 의도와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아이는 자꾸 내 얼굴에 손을 뻗어 안경을 집어 던지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때 내가 진심으로 삭발을 고민했던 것을 보면, 아이의 괴롭힘으로 인한 나의 스트레스는 상당했던 것 같다. 그때는 우리 아이는 언어만 조금 늦을 뿐이라며 발달적인 문제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시기라서, 그러한 아이의 행동은 그 시기 아이들이 하는 특별하지 않은 행동으로 생각했다. 말이 트이지 않은 상태였던 우리 아이는, 아무래도 어떤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굉장히 강하게 떼를 썼다. 한 번은 만삭인 상태로 아이와 공원에 나갔다가, 손녀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떤 할아버지에게 다가가서 버블건을 달라고 고집을 부리고 떼를 쓰고 괴롭히는 바람에, 내가 공원에서 5분 거리인 남편에게 급히 전화를 했다. 캐나다인 할아버지는 동양인 아이가 자신을 자꾸 터치하고 울고 소리 지르며 떼를 쓰니 적잖이 당황스러워했고, 우리 아이에게 화를 냈으며, 나도 영어 실력의 한계로 대처를 잘하지 못하고 아이만 열심히 나무랄 뿐이었다. 나의 전화를 받고 일하다 말고 달려온 남편이 우는 아이를 들쳐 안고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고, 남편은 내게 말했다. 애 하나도 보살핌을 못하면, 나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그리고 그날 나와 남편은 싸웠다.
그래도 자폐는 아니야, 아닐 거야, 아니겠지…
30개월 때 우리 아기는 아빠, 엄마, 아가, 아(니)야, 으응 정도의 말을 할 수 있었다. 호명엔 반응을 잘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사람을 좋아하고 상호작용은 하려고 하니 아이가 말이 느릴 뿐이지 자폐 성향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 아이 또래 아이들은 입에 달고 사는 말인, “이게 뭐야?”를 한 번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나를 늘 불안하게 했고, 아이가 갑자기 냄새에 집착하게 되면서 색종이며, 색연필이며, 물건들의 냄새를 맡기 시작하자 사실 불안했지만, 다른 아이들도 그러려니 했고 한 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둘째 아이를 낳고, 둘째 아이를 첫째 아이와 함께 키우면서는 아이의 그런 행동들은 더 심해졌다. 흔히 들리는 둘째 출산 후의 첫째 아이의 스트레스에 관한 이야기는 접한 적이 있었지만, 감정 표현을 못 하고 말을 못 하던 우리 아이에게 그 스트레스는 더욱 엄청난 것이었던 것 같다. 고집은 있지만, 나름대로 순한 아이였던 첫째는 둘째 출산 후, 내가 모유 수유를 오래 하고 싶다며 잘 나오지 않는 모유를 고집하는 통에 둘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두 달 동안 하루 종일 집이 떠나가라 아야아야아야 이야이야이아 꺅꺅꺅 아아아 하고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떼를 쓰고 울고불고했다. 12시까지도 잠에 들지 못한 첫째가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신생아였던 둘째도 잠이 부족했고, 엄마인 나도 지쳐갔다. 첫째 때는 한 달밖에 못했던 모유 수유를 그래도 둘째는 두 달까지는 분유와 혼합해 가며 먹였고, 첫째의 스트레스가 너무 심한가 싶어, 석 달째부터는 완전 분유로 돌아섰다. 그리고 첫째의 밤중 샤우팅도 차차 줄어들었다.
우리 아이가 내 오랜 희망과 믿음처럼 단지 말만 느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끔 해주는 기행들은 둘째의 돌이 지난 이후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22년, 계속 가정 보육으로 키워왔던 우리 첫째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게 된 4세(만 3살)부터 아이는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달라요.‘를 슬슬 보여주기 시작했고, 이제 둘째가 갓난아기티를 조금 벗자, 이제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싶었는데 바로 맞닥뜨리게 된 첫째 아이의 기행들은 나의 정신력을 시험하듯 몰아치기 시작했다. 우리 첫째는 내게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주었는데, 내가 그 신호를 자꾸 무시했던 것일까. 내가 몇 년에 걸쳐 누적시킨 나의 직무 유기가 낳은 첫째 아이에 대한 소홀함과 육아에서의 부족함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를 괴롭히는 것 같았다.
01. 매일같이 나는 바닥의 색종이를 주웠다.
아이가 혼자 노는 놀잇감은 책, 퍼즐, 그리고 색종이였다. 색종이에 대한 아이의 관심은 처음에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아이는 색종이를 몇 번 접어주면, 그 방법을 기억하고, 혼자서 접으면서 놀았다.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색종이를 접는 손끝은 참 야무졌다. 40개월 때 우리 아이는 이미 하트, 피아노, 비행기, 배, 종이학을 접을 수 있었고, 색종이 두세 장을 접어서 조립해서 완성해야 하는 딱지, 종이 팽이, 매직 큐브 까지도 접을 수 있었다. 종이접기 책을 보고 옆에서 도와주면 자기가 따라서 접다가 책을 보면서 더 진도를 나가기도 했다. 하트를 수십 개 접어놓고, 매직 큐브를 접는 등의 행동은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아이의 특기이겠거니 하고 기특하게 생각했고, 아이가 ’종이아저씨‘라는 유튜브 방송을 자꾸 틀어달라고 하는 것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만 4살이 되면서 색종이에 대한 집착은 ’접는 것‘ 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이는 왜인지 이제 색종이를 접지 않았고, ‘새 색종이‘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매일 새 색종이 묶음을 달라고 울었다. 조금이라도 구겨지거나 찢어지면, 새것을 내놓으라며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집에 드러누워서 울었다. 나는 1주일이 멀다 하고 온라인 쇼핑몰에서 색종이를 구매하기 시작했고, 아이는 하루에 400매를 어떻게든 받아내어 이리저리 집안 곳곳에 다 뿌려놓고, 다시 새 색종이를 달라고 울었다. 조금 전에 아이에게 준 새 색종이는 아이가 한쪽 면을 찢으면서 그 소용을 다 했고, 집안 어느 곳에도 색종이가 없는 곳이 없었다. 새것 같은 헌 색종이는 아이에게는 헌 것과 같았고, 내 눈에는 새것과 같은 색종이들이 아까워 나는 집안을 네발로 기어다니면서 색종이를 주워 담으며 모아뒀지만, 아이는 거부했다. 주우면 또 쌓여있고, 또 널브러져 있는 알록달록 화려한 색종이들을 보는 일은 나를 미치게 할 것 같았다. 아이의 색종이 집착은 집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고, 외출할 때도 손에 몇백 장을 쥐고 나가려는 통에, 두고 가라는 나와 가져간다는 아이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02. 둘째 아이는 형의 가장 만만한 분풀이 상대였다.
갓 4살이 된 첫째 아이의 화는 가장 만만했던 어린 둘째에게 향했다. 첫째는 둘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둘째가 아직 잠만 자던 신생아 때는 재워놓으면, 첫째가 소리를 질러서 낮잠에 실패하기가 일쑤였는데, 둘째가 돌이 지나고 슬슬 기거나 걸어 다니면서 활동을 시작하자, 첫째는 소리를 질러 낮잠을 방해하는 것 외에도 걷고 기어다니는 막 활동을 시작하는 둘째의 팔과 다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둘째가 어린이집에 가기 전이라, 첫째가 등원한 뒤에 나는 몇 시간 동안은 둘째와 평온하게 집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첫째가 돌아온 뒤부터는 긴장을 놓을 새가 없었다. 집에 돌아온 첫째는 바로 둘째에게 돌진해서 동생을 밀고, 머리를 누르고, 팔과 다리를 꺾었다(물론 내가 계속 중간에서 막았기 때문에, 부상으로 이어진 적은 없다) 첫째는 집안의 온갖 문들을 계속 여닫았고, 나는 아이 둘을 놓고는 육아와 살림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아이 둘의 중간에 껴서, 한동안 샌드백 역할을 했다. 센터에 가서도, 어떻게 해야 하냐며 고충을 털어놓았지만, 돌아오는 조언은 ‘공간 분리’였고, 대체 집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공간을 분리해야 할지 나는 도무지 좋은 대안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나마 종종 베이비룸 울타리에 둘째를 잠시 가둬놓고 못다 한 집안일을 하기도 했지만, 눈을 떼는 순간 둘째 울음소리가 들리기 일쑤라서, 베이비룸도 공간분리를 위한 좋은 대안이 되지는 못했다.
03. 엄마, 아빠는 밤이 무섭다.
둘째의 신생아 시절 약 두 달 정도 동안, 마치 동생의 존재에 반기를 들 듯, 열두 시까지 자지 않고 떼를 썼던 첫째는, 그래도 때가 되면 침대에 스스로 누워서 스르륵 잠들던 아이였다. 아이는 8시 30분에서 늦어도 9시 30분 사이에 잠들었었다. 그런데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한 그 해 중순부터 갑자기 자기 직전에 마치 꼭 해야 하는 하나의 의식처럼 떼를 미친 듯이 쓰기 시작했다. 거의 텐드럼과 흡사한 수준의 발작은 새벽 두 시 반까지 이어지기 일쑤였고, 밤마다 난리를 치고 나서야 아이는 한바탕 눈물 콧물을 쏟고 제풀에 지쳐서 잠들곤 했다. 자라고 꺼둔 전등은 아이가 누웠다가 일어나서 다시 켜고 다녔고, 두꺼비집 스위치라도 내리면, 아이는 죽어라 울었다. 둘째 또한 형의 소리에 자다 깨서 울기 시작했고, 밤마다 우리 집은 전쟁통이 따로 없었다. 두 시 반까지 울면서 지친 아이는, 가끔은 배고프다며 밥을 내놓으라고 또다시 울었고, 나는 새벽 3시 30분에도 한 시간을 울다 지친 아이가 배고프다고 떼를 쓰면 밥을 해 먹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남편은 그간 일 때문에 소홀히 했던 아이 아빠 노릇을 밤마다 몰아서 하느라 고생했다. 아이는 남편에게 안겨서 울었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나 가~~~~~~!!!’라는 말을 반복하며 손을 뻗어 현관문을 가리켰다. 아이 아빠는 아이가 그럴 때마다 아이를 매번 안아 들고 슬리퍼에 반바지 차림으로 아파트 계단에서 배회했다. 남편이 안쓰러워 보이는 하루하루였다. 아이는 보통 아빠에게 안겨서 한 시간가량을 울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이제 자기를 내려달라며 손을 휘저었고, 그때 내려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근새근 잠들었다. 아이의 짜증과 화가 밤만 되면 폭발한 것을, 그 해에 아이가 폐렴으로 대학병원에 입원했을 때, 상담 중에 살짝 담당 교수님께 말씀드렸더니, 뇌파검사를 해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촬영하게 되었던 뇌파검사에서 경련파가 5, 6회 정도 나왔다고 했다. MRI도 권유받아서, 내키지는 않았지만, MRI도 촬영했다. 충격이나 외상의 흔적은 없이 정상적이라고 했다. 그다음에 해볼 것으로 권유받은 것은 유전자 검사였는데, 우리 부부는 유전자 검사까지는 받지 않기로 했다. 받아봐야, 약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달라질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04. 오후 4시, 엄마의 시간은 멈췄다.
첫째가 하원한 뒤에 나는 매일 한 시간씩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밤이 남편에게 상대적으로 더 괴로운 시간이었다면, 아이가 하원하고 4시부터 5시까지는 내가 너무 괴로운 시간이었다. 아이는 4시쯤 되면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는데, 안아주지 않으면 그 짜증과 울음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낮잠을 자고 있던 어린 둘째는 형의 짜증에 잠에서 깨서 울었고, 나는 잠에서 막 깨서 짜증이 나있는 둘째를 포대기로 업고 가슴 앞쪽으로는 울면서 소리 지르고 버둥거리는 첫째를 안았다. 아이를 앞뒤로 엎고 안고 몸을 흔들어주며 둘을 달래는 동안 시계를 보면 1분이 10분 같이 흘러갔다. 아이 둘을 내 몸에 매달고 있는 동안 내 체력과 정신력은 바닥을 쳤다. 무릎과 허리가 남아나질 않았다. 그렇게 폭풍 같은 반 년의 시간을 보내고, 뇌파 검사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 대학병원 교수님이 뇌파 검사 결과를 말씀해 주시면서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아이를 낮잠을 재우면 안 된다고 하셨다. 낮잠을 끊으면 상황은 나아질 것이라는 말을 듣고,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께 낮잠을 재우지 말아 달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그 시간이 쉬는 시간이었을 당시 담임 선생님은 이맘때 아이들은 낮잠이 필수라며 받아들여 주지 않으셨고, 두 달이 더 지나, 이듬 해 3월에 반이 올라가고, 담임선생님이 바뀌면서 4월쯤부터는 아이가 낮잠을 자연스럽게 패스하게 되자, 하원 후 아이의 오후 짜증 루틴은 아주 서서히 줄다가 어느새 사라지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다고 느꼈다.
05. 네가 도는 모습을 보니까, 엄마도 돌아버릴 것 같아.
우리 아이는 느릴 뿐이지 자폐는 아니라고 부정했던 이유가, 아이가 내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자폐 행동(예를 들면, 바퀴 굴리기나 장난감 줄 세우기)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호명이 안 되었어도, 아이가 집중해서 그렇다는 변명을 하며, 나는 아이의 자폐 성향은 부정했다. 하지만, 아이가 어느 날부터인가 눈을 희한하게 옆으로 뜨고 두 팔을 풍차처럼 뻗은 채로 거실 한가운데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던 내 희망의 탑은 와르르 무너졌다. 아, 말만 늦은 것이 아니었구나. 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돌았다. 아이가 심심하면 돌 수도 있다지만, 우리 아이의 눈빛과 표정은 누가 보아도 단순히 심심함이나 호기심에 도는 그런 모양새는 아니었다. 거실 한가운데서 빙글빙글 도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이에게 소리 질렀다. “돌지마! 너 돌고 있는 거 보면, 엄마가 돌아버릴 것 같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외침이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라도 소리를 안 지르면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아이는 1년여 기간 동안 종종 돌았는데, 어쩌다 도는 것을 잘 안 하는 날이면, 센터에 가서 ”선생님, 그러고 보니 요즘 애가 안 돌아요!“하며 신기해했다. 하지만 그런 나를 약 올리듯 며칠 뒤에 우리 아이는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또 거실에서 눈을 한쪽 옆으로 모은 채로 빙글빙글 돌았다. 그나마 위안으로 삼은 것은, 어린이집에서는 그래도 의자에 앉히면 덜 돈다는 것이었다. (바닥에 앉아서 하는 활동 시간에, 바닥에 앉히면 바닥에서도 팽이처럼 빙글빙글 돈다고 했다)
06. 자꾸 탈출해서 계단을 타는 아이
아이가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현관문을 열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둘째를 보거나 집안일하다가 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아이를 잡으러 후다닥 뛰어나가면, 아이는 윗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중이거나, 아랫층으로 쏜살같이 내려가고 있었다. 현관의 모든 잠금장치를 다 해봐도 의미가 없었다. 아이가 시도 때도 없이 문을 열고 뛰쳐나가는 통에, 나는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맘때, 아이를 잃어버리는 꿈을 자주 꾸던 시기라서, 나는 아이가 그렇게 계단을 오르내리다가 사고라도 날까 봐 노심초사했다. 아이를 잡으러 뛰어나가면, 혼자 있는 둘째가 걱정되고,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내려갔는지 모르는 아이를 집에서 기다릴 수도 없었다. 올라가면 올라가는대로 걱정이고, 내려가면 내려가서 밖으로 나갈까 봐서 걱정이었다. 몇 달 동안 고민하고 힘들어하다가, 결국 나는 철물점에 가서 잠금장치를 구매했다. 집 안에서 밖을 나갈 때도 열쇠로 열어야 하는 잠금장치인데, 만들어진 의도는 치매 노인분들이 외출하는 것을 방지할 목적으로 나온 것이라고 했다. 아이 때문에 설치한다고 하니, 철물점 사장님은 의아해했다. 아이 때문에 이 잠금장치를 사는 경우는 없었는데 하시면서… 잠금장치를 달고 나서 내 일상은 아주 조금은 평온해졌다. 아이는 열쇠를 내놓으라며 현관문을 잡고 매달려 울고불고했지만, 그래도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은 아이를 잡으러 매번 뛰쳐나가 계단에서 술래잡기하는 것보다는 참을 만했다.
07. 혼내면 우리 아이는 자꾸 벗었다.
우리 아이는 내게 야단을 맞으면 바지를 내렸다. 집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길에서도 떼쓰는 것이 극에 달한 날에는 그 행동이 종종 나타났다. 아이는 바지를 내리고, 울면서 자기 성기를 주물럭거렸다. 아직도 기억나는 기억 속의 하루가 있다. 운전을 시작하기 전(운전면허를 취득한 지는 10년이 되었으나, 자차가 생기고 운전을 시작한 지는 다섯달 정도 되었다) 나는 아이와 센터를 다닐 때, 갈 때는 주로 대중교통을 탔고, 올 때는 택시를 탔다. 아파트가 산 높이의 언덕에 있었고, 아파트 정문부터 끝 동인 우리 집까지 걸어가는 시간은 성인 걸음으로도 10분이 걸렸으며, 아이와 함께 갈 때는 30분 이상 걸렸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센터 치료가 끝나고, 고가도로 밑에서 택시를 잡는데, 택시가 아무리 잡아도 잡히질 않았다. 카카오택시로 불러도 잡히지 않고, 손을 아무리 휘저어도 택시들은 무심하게 지나갔다. 하는 수 없이 시간만 보내다가 마을버스를 타고 아이와 집 근처에서 내렸고, 우산을 쓰고 걸어 올라갔다. 비도 많이 오고, 공기도 찬 스산한 날씨에, 아이와 걸어 올라가는데, 아이가 아파트 정문을 막 지나, 초반쯤에 있는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을 차라리 사줬다면 집까지 가는 길이 상대적으로 편했을 것인데, 날씨도 춥고, 아이가 먹으면서 올라갈 것이 눈에 보여서“오늘 아이스크림은 안돼. 다음에 먹자.”라고 내가 입 밖에 내버렸다. 그렇게 말을 한 이상, 나는 아이스크림을 사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아이와의 실랑이가 시작됐다. 언덕을 올라오면, 아이는 내려가고, 잡아서 겨우 붙잡고 다시 언덕을 올라가면, 아이는 다시 내달려 마트 문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바지도 내렸다. 바지를 내린다고 해서 내가 아이의 요구대로 해준 적도 없는데, 아이는 반항의 표현으로 바지를 내렸다. 이제는 ‘되고, 안되고’의 문제가 아니라, 무조건 내가 아이를 꺾어야 할 상황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아이에게 밀리면, 앞으로 나는 이 아이가 이만큼, 아니 이 이상 떼쓰는 것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나도 악을 쓰고 아이를 안아서 언덕을 올라왔다. 우산을 들고는 있었지만, 아이를 안고 가방도 들고 있어 비는 고스란히 다 맞았다. 옆에 무심하게도 아까는 그렇게 잡히지 않던 택시가 두어 대가 연이어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누군가를 태우고 언덕을 올라갔다. 속에서 울컥하고 눈물과 화가 치밀었다. 비는 세차게 내리고 있고, 아이는 엄마에게 강제적으로 안겨서 버둥거리며 소리 지르고 울고있고, 비를 맞아 물에 빠진 생쥐 같은 꼴로 산발을 한 애 엄마도 아이에게 미친 듯이 그만하라고, 적당히 좀 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언덕을 겨우겨우 올라가고 있었고, 그 옆으로는 자동차들이 무심하게 우리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삼류 드라마 속 한 장면 같았다. 그 시기의 나는 사랑도, 재미도, 감동도 없는 신파를 매일 같이 찍어내는 무명 배우 같았고, 내 인생도 삼류 같았다.
08. 너가 고양이냐, 캣타워에 오르듯 아이는 냉장고 위에 올라갔다.
아이가 내게 혼나고 하는 여러 행동 중에, 위에서 언급한 바지 벗고 성기 주무르기는 내가 못 참을 정도의 스트레스를 주는 행동이었는데, 그것 말고도 아이가 나를 화나게 만들려고 사용한 다양한 행동들이 있었다. 아이는 나를 더 화나게 하고 싶은지 바닥에 웃으며 침을 뱉기도 했고, 소리 지르며 화장실에 들어가 내가 못 들어오게 문을 닫은 뒤에, 변기가 아닌 곳에 일부러 소변을 갈겼다. 때로는 일부러 높은 곳에 올라갔는데, 그곳은 냉장고 위였다. 냉장고 위는, 아이의 손이 닿으면 위험할 만한 물건들을 올려놓았던 유일한 곳이었는데(그곳에 놓지 않은 대부분의 물건은 아이가 매일 휘젓고 어지르고 돌아다녔다. 집 안에 아이가 건드리지 않는 부분은 한 군데도 없었다), 아이가 냉장고 위에 올라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냉장고 위의 물건들을 다른 곳에 숨겼다. 아이가 냉장고 위를 오르는 문제로 남편과도 많이 싸웠다. 못 올라가게 해야 한다는 내 입장과 그냥 내버려두라는 남편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냉장고 위에 올라간 아이가 떨어지거나 다칠까 겁이 나서 아이가 올라갈 때면, 나나 남편이 꼭 그 밑에서 아이가 내려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오지만, 냉장고 위에서 해맑게 웃는 아이를 쳐다보면서 그때 나는 웃지 못했다.
이 시기에 매일 울면서 살았던 나는 삼성서울병원 우울증 센터 홈페이지에서 우울증 자가 진단을 해본 적이 있다. 2023년 1월이었다. 정말 내 발로 정신과를 찾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시기, 60점 만점에 42점, ‘우울증의 정도가 심합니다. 우울증 센터 방문을 권합니다’라고 결과가 나왔다. 울다가 지쳐서 느린 부모 카페에 글을 쓸 때면,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 중에 몇 분은 내게 말했다.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니, 정신과에 한번 방문해 보라고. 오늘, 이 글을 적으며, 생각이 나서 다시 들어가서 해보았더니 17점이 나왔다. ’우울하지만, 그 정도가 심하지는 않습니다. 전문가에 의한 정확한 평가가 필요합니다.‘ 느린 아이 엄마라서, 약간의 우울감을 느끼고 살아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싶지만, 약 3년 만에 25점이나 덜 나왔으니, 이 정도면 우울증 약 복용 없이 그 시기를 잘 극복했다고 생각한다. 늘 내가 썼던 푸념 글에 한두 개씩 달리던 댓글이 있었는데,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것이었다. 매번 다른 누군가가 내게 말해줬다. 시간이 해결해 주니, 조금만 버티라고, 버티면 나아진다고, 다 지나간다고. 그때 그 말을 주의 깊게 읽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나보다 먼저 이 힘듦을 겪었던 여러 어머니가 내게 끊임없이 버티라고 다 지나간다고 말해주고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던 듯 싶다. 내가 너무 힘들었으니까, 나는 그 힘듦이 ‘내가 죽어야만’ 끝나는 것으로 생각했고, 죽을 용기는 없음에도 차라리 죽어서 고생을 이쯤에서 끝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엄마라고, 나를 끊임없이 힘들게 함에도 가끔은 예뻐 보이던 아이들을 볼 때면,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죄악으로 여겨져서, 또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