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면 생기는 일

"이래도 안 바뀔래?"

by Eeun


나는, 자주 도망쳤다.


지금 와서 돌아봐도, 왜 이렇게 재미없게 살았나 싶다. 노는 것도 놀아본 놈이 논다고, 여전히 재밌게 놀 줄 모르는 나는, 그래도 30대 중반이 되어서는 비로소 노는 시늉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릴 때 장래 희망은 어른들이 일반적으로 좋다고 말하는 직업을 적었다. 공부를 굉장히 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촉망받는 유망주(?)였던 나는 초등학교 교사가 될 생각은 없었나 보다. 열심히 노력할 필요성을 못 느꼈던 걸까. 노력과 실력과 점수 부족으로 교육대학교는 가지 못했다. 성적에 맞춰 전공만 보고 대학에 들어갔다. 책과 관련된 학과라면 적성에 맞을 것 같았다.


나는 공부를 소홀히 했던 지난날을 반성했는지 대학에 가서는 학과 내에서 등수로 3등까지 가능했던 교직 이수 대상자가 되어, 전공 자격증과 두 장의 교사자격증을 쥐고 졸업했다. 열심히 대학 생활을 했던 덕분일까? (정확하게는 대학 생활은 아니고 학점관리 일 것이다. 나는 MT, OT, 과 술자리의 프로 불참러였다. 왜냐? 술이 싫었다) 대학 졸업 후, 1년 뒤, 나는 전문대학 도서관 정규직 사서로 취업을 할 수 있었다. (나의 본 전공은 문헌정보학이고, 다른 전공은 영어교육학이다)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사서 공무원 준비와 취업 준비를 병행하는 중이었다. 나는 하루에 8, 9시간을 앉아서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깜냥이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직장으로 도망쳤다. 내 능력으로 얻어낸 떳떳하고 꽤 괜찮은 직장이기는 했지만, 합격 발표를 듣고 안도감, 이제는 공부를 안 해도 된다는 기쁨, 그리고 어차피 이렇게 공부해서는 공무원 시험은 못 붙었을 것이니, ‘더더욱 잘됐다‘라는 마음이 들었던 것을 보면 나는 일단 도망친 게 맞다.


나는 만족스러운 직장 생활을 했을까? 답은 ‘아니요.‘다. 회사를 울면서 다녔다. 남들이 보기에는 정년이 보장되고 안정된 직장, 좋은 직장이었다. 의욕적이었던 나는 일을 굳이 더 만들곤 했고, 윗분들은 나를 좋게 봐주셨지만, 나이 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는 선배들 눈에 자꾸 일을 벌여대는 FM 성격의 기세등등한 만 스물다섯 신입직원은 예쁘게 보기엔 너무 튀었으리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학생들의 졸업 앨범에 들어갈 사진을 확인하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나서였다. 사진을 확인하러 갔는데, 사진 속에 내가 아는 내가 없었다. 내 얼굴에서 웃음을 거둬버린 일터에서 미련 없이(?) 나오기 위해서 나는 … 세무사 공부를 시작했다. 무턱대고 그만둘 용기는 없었고, 전문직 자격증을 딴다면 가능할 것 같았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멋지게 전문직 자격증을 따내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다소 무모한 꿈을 안고 평일에는 직장과 집을 오가고, 주말에는 하루 종일 세무사 학원에서 보내는 생활을 시작했다. 쉽지 않았다. 생소한 분야의 자격증 시험공부를 한다는 것은 굳은 각오와 큰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또한, 안타깝게도 내 머리는 회계나 세무 쪽의 능력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누군가 회계사는 몰라도, 세무사는 수학 머리가 크게 필요한 건 아니라 했던 기억이 있는데, 아니었던 것일까?).


시험 준비도 하기 싫었고, 직장에서도 도망치고 싶었던 나를 구해주러 운명처럼 나타난 사람은 바로, ‘우리 남편‘이었다. (남편은 지금도 우스갯소리로 자기가 날 구해줬다고 말한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고맙긴 하다) 당시의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남편과의 첫 만남에서 내가 직장 내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에둘러 했다. 혼기에 들어선 대부분의 남녀가 맞벌이를 원하고 그것이 필수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직장을 다니기 싫은 속내를 첫 만남에 내비치다니!


결혼할 인연은 따로 있다는 말이 있다. 나는 그 말을 믿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남편과 나는 갈등도 문제도 없이 빠르게 결혼에 골인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날짜를 급히 잡았는데도 없던 식장도 생기는 것을 보고 우리는 결혼할 인연이 맞다고 확신했다. 나는 남편이 듬직해서 좋았고, 남편은 어딘가 어설퍼 보이고 세상물정 모르는 나를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홀리듯 결혼했다고 한다. (남편은 "똑 부러지는 여자랑 결혼해야 했는데!" 라고 자주 외친다. 뭐, 어쩌겠는가 이미 한 배를 탔는걸) 첫 만남 3개월 뒤, 우리는 혼인신고를 한 법적인 부부가 되었고, 그로부터 2개월 뒤엔 결혼식을 올렸으며, 6개월 뒤에는 한국이 아닌 영어권 나라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직장은 당연히 그만뒀다. 나는 그렇게 나를 힘들게 했던 직장 생활에서 벗어났고, 이왕 떠나기로 한 김에 아주 멀리, 비행기를 타고 13시간 이상 걸리는 캐나다로 도망쳤다.




이제 못 도망갈걸?

몇 번 도망쳤다고.… 인생은 내게 강수를 날렸다.


그래서 연이은 도망의 결과가 무엇이냐면, 나는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도, 방법도 없다는 것이다. 무엇 하나 끈기 있게 붙들고 끝을 볼 때까지 죽어라 하고 노력한 적이 없는 나에게 인생은 '느린 자녀 양육'이라는, 평생에 걸쳐 부지런히 그리고 묵묵히 풀어나가야 할 숙제를 줬다. 느린 아이에 관한 많은 연구와 치료 방법들이 있고(개인적으로 치료보다는 교육이나 훈련이 더 적합한 단어라 생각하지만, 일반적으로 치료라 부르니 그렇게 쓰기로 한다) 아이의 상태를 진단하기 위한 각종 어려운 이름들을 가진 검사들이 있다. 하지만, 변수는 늘 존재하기에 우리 아이의 현재 상태를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진단하지 못하며, 진단하더라도 '확실한' 해결책이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은 아니다. 느린 아이와 함께 가는 이 여정이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경비를 필요로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얼마나 걸릴지, 도착은 할 수 있는 것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꽤 어려운 숙제를 붙잡고 있다. 내 나름대로 한다고는 하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다. 잘 하고 있나 싶다가도 뭔가 틀렸나 싶고 속은 수시로 답답하다. 지금까지 힘들면 자주 도망쳐왔는데, 치사하게도 아이가 붙잡혀서 도망치지도 못한다. 숙제의 제출일은 내 생이 끝나는 날이 될 것이고, 이번 생에서 내게 주어진 이 숙제를 얼마나 최선과 마음을 다해서 해왔는가에 따라서 죽은 뒤의 내 영혼의 거취가 정해지리라. (검사자가 제발 관대하기를 바랄 뿐이다)


느린 아이와 함께 갈 이 인생이라는 긴 여행에서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


첫째, 필요한 경비를 버는 것. (우리는 아이의 사교육비가 아니라, 센터 치료비가 늘 걱정이다)

둘째, 길을 잘 안내해 주는 것. (모든 부모가 해야 할 일이다)

셋째, 적절히 쉬어주고 체력을 보충하는 것. (우리는 특히 아이를 더 기다려주어야 하고, 몸과 정신이 건강해야 버틸 수 있다)

넷째, 마음의 여유를 갖고 아이를 끝없이 사랑하고 지지하며, 작은 성장에도 감동할 줄 알며, 동행하는 것.


간혹 어떤 여행은 다른 의미 있는 추억들은 많이 남기지 못한 채, '~에 갔다.' 라고 인증하는 사진만을 남긴다. 느린 아이와 부모가 함께 하는 여행은 목적지에 도착하려고 조급해하고 서두르는 것 보다는 여행 자체를 즐기려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우리 아이들의 목적지는 구체적으로 정하기 어렵고, 도달 가능 여부도 사실상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느린 아이와 함께하는 우리는 당연하게도 더 많이 넘어지고, 다치고, 울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길을 잘못 들기도 할 것이다. 끝내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혹여 목표했던 곳까지 가지 못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아이와 우리가 행복할 수 있었다면, 그 의미는 충분하지 않을까. 그러니, 나도 당신도 멈추진 않되 너무 서두르진 말고,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도 둘러보며, 아이와 눈을 맞춰가며 그렇게, 편안하고 아름다운 여행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천상병, <귀천(歸天)> 중에서




느린 아이 육아 중에 제가 들으며 힘이 났거나 좋았던 노래들을 회마다 한 곡씩 추천해 드려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가수 심규선 님의 <소로(小路)>(헤아릴규,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발매, 2021)를 추천해 봅니다.

모두 힘나는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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