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나리던 날

4.

by 타프씨

.

약 40여 분 전.

“으악-----!!”

괴성을 지르며 여자가 먼저 뛰어나갔고 경찰도 그녀를 뒤따랐다.

그리고 쾅- 현관문이 닫혔다.

어수선했던 하루가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드디어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휴.. 길다. 오늘 하루>

벽에 기대 있던 남자는 천천히 거실로 나왔다.

미약하게 들리던 여자의 비명과 그녀를 부르는 경찰의 목소리가 차츰 멀어졌다.

여태 조용히 잘 살았는데. 웬 날벼락같은 날인지..

겁 좀 먹었겠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나가면..

<천생 내가 이사를 고려해야겠군.. 쩝...>

남자는 텁텁한 입맛을 다시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조금 전 그는 겁을 주려고 일부러 더 무서운 표정을 하고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눈빛에 살기를 첨가했고 입가를 비열하게 비틀어 얼굴을 구겼다.

더 떠들어봤자 여자만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테니, 그녀를 위한 행동이기도 했다.

나 같은 존재를 볼 수 있는 그녀를 위한 작은 배려라고나 할까?

그렇듯 경고하듯 그녀를 노려보았을 때, 비로소 그녀와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살짝... 낯이 익은 것도 같고...>

남자는 어수선하게 놓여있는 짐들을 둘러보았다.

처음 그녀와 마주쳤을 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신을 벗으려다 멈춘 자세로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핸드폰을 치켜들고 협박할 땐 마치 치켜 뜬 고양이 눈을 하고 울그락 붉으락 험악해져 있었으니까.

<에이, 설마.. 아니겠지...>

잠시 머리를 스치는 누군가가 떠올랐지만 남자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애써 부인했다.

저런 스타일이 아니란 말이지, 내 기억 속의 그녀는.

착각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확신을 채근하듯 그의 시선은 단서를 쫓고 있었다.

자리를 잡지 못해 어중간하게 놓여있는 짐들 말고, 제자리를 차지한 거실 장 위에는 아직 세워놓지 않은 액자 몇 개가 포개져 있었다.

<아니야...>

여전히 부인하면서도 남자는 액자로 향했다.

학사모를 쓰고 부모님과 함께 찍은 여자의 사진.

....?!....

<잠깐.. 잠깐만..>

남자의 호흡이 조금 가빠졌다. 안 된다고 생각한 그것이, 현실이 되어버린 상황에 맞닥뜨린 모습이었다.

잠깐만을 되풀이하며 그는 정신을 집중해 맨 위에 놓인 액자에 손을 댔다.

딸각-

위쪽 액자가 옆으로 밀려 내려가고 밑에 있던 액자의 사진이 드러났다.

벚꽃이 한창인 날 행복한 교복 차림의 두 여고생.

<..!!!...>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일었다.

그녀를 위협했던 기다란 검지가 바들거리며 액자 위로 향했다.

짧은 커트 머리에 시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학생을 가리켰다.

<유 제 이..>

이윽고 떨리는 손가락은 제이 옆, 터지기 직전에 한껏 향기를 품고 있는 뽀얀 꽃봉오리 같은 여학생에게로 옮겨갔다.

<하 예 라.. 예라.. 였어...?>

내 첫사랑, 하예라...?!

떨리는 손이 쑤욱 그녀의 사진을 지나 액자를 통과하자, 그는 질끈 눈을 감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말도 안 돼..>

그가 연기 같은 존재가 된 일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


12년 전, 도원 고등학교.

툭-

“아!”

“어 미안..”

땅만 보고 걷던 정민은 슬쩍 부딪힌 누군가에게 사과부터 했다.

한박자 늦게 확인한 그 애는 커트 머리에 선머슴 같은 여학생, 유제이였다.

그날은 무다리 고개라 불리던 교문 앞이 핑크빛 꽃밭으로 물든 던, 화려한 봄날의 아침이었다.

정민은 언제나처럼 큰 덩치가 창피하기라도 한 듯 어깨를 움츠리고 땅만 보며 등교하던 중이었다.

이맘때 여학생들은 곧바로 교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끼리끼리 모여 사진 찍기에 바빴다.

그 뽀얀 벚꽃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게 마치 교칙에 어긋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웬만하면 모두 그랬다.

덕분에 그즈음 남학생들은 사진 찍느라 정신없는 여학생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등교해야 했다.

정민이처럼 땅만 보고 걷다가는 이렇듯 의도치 않는 충돌 상황이 발생했다.

뒤도 안 보고 뒷걸음질 치다 걸어오던 정민을 부딪친 건 제이였지만, 사과는 정민의 몫이었다.

제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 정민의 사과는 듣지도 않고 핸드폰 카메라를 켜며 다시 자리를 잡았다.

“예라야 찍는다!”

사진 찍는 여학생들이 한둘도 아니고. 정민은 왜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 애를 봤을까.

그날 그 애를 보지 않았다면, 짝사랑 같은 저주는 받지 않았을 텐데..

“하나, 둘, 셋!”

카랑카랑한 제이의 목소리는 마치 셋에 맞춰 고개를 돌려보라는 구호처럼 들렸다.

아니면 정민이 그 박자에 맞춰 돌아본 건, 운명이었을까?

우뚝 선 자세로 고개를 돌린 정민의 시야에 햇살이 쏟아졌다.

그리고 햇살보다 더 화사한 핑크빛의 벚꽃과, 그 꽃보다 더 아름다운 분홍빛 여학생의 활짝 웃는 얼굴이 마치 CG 작업을 한 화면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세상에서 그렇게 예쁘게 웃는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예라.. 하예라였다.

정민의 심장은 그대로 멎는 듯했다.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은 하얀 벚꽃잎들은 뜨거워진 그의 심장에 닿아 힘없이 녹아내렸다.

예라는 그날, 정민의 가슴을 발갛게 물들이며 그렇게 새겨졌다.

“좀 움직여줄래?”

넋을 놓고 있던 정민을 현실로 되돌린 건 한 남학생의 목소리였다.

“어..”

막 꿈에서 깨어난 듯한 정민은 아무도 신경 안 썼지만 혼자 멋쩍어하며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정문을 지나쳤다.

앞서 멀어지는 남학생은 뒷모습이었지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안보검. 도원고 1학년이라면, 아니 전교생에게 이미 유명인이 된 그 학생. 그 뒷모습은 이미 입학식 날 봐서 잘 알고 있었다.

두 달 전 1학년 입학식 날. 지루하고 형식적인 인사말로 행사가 끝나갈 즈음, 교장은 느닷없이 한 학생의 이름을 불렀다.

“안보검 학생. 앞으로 나와보세요”

교장의 연설을 경청하지 않던 학생들은 그 세 글자에 일순 집중모드로 바뀌었다.

“이번에 우리 학교에 1등으로 입학한 학생입니다. 자 박수-”

짝. 짝. 짝... 아이들은 영혼 없이 손바닥을 부딪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체 누구야. 그 괴물 같은 놈은. 얼굴은 몰랐지만 이미 소문은 자자했다.

술렁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멀끔하게 생긴 남학생 하나가 성큼성큼 단상으로 올라갔다.

쟤야? 저놈이었어?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바로 옆에 서 있었지만, 보검을 알지 못했던 애들은 헐-을 연발했다.

손가락만 까딱거리던 여학생들이 보검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공붓벌레라더니, 기대도 안 한 생김새에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뚜벅뚜벅 걸어 나간 보검은 단상에 올라 교장 옆에 섰다.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크고 작은 탄성과 소음이 이미 강당에 차고 넘쳤다.

하필 그 잘난 인물이 교장 옆에 서 있으니 상대적으로 더 잘나 보였다.

전교 1등이 저렇게 생겨도 되는 거야? 남학생들은 질투 어린 눈빛이었고 여학생들은 입학식을 시작하고 가장 눈을 반짝였다.

같은 중학교에 다녔던 학생들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그 애들은 보검이 그저 동창이었다는 것만으로도 덩달아 관심을 받았다.

중학교 3년 내내 틀린 문제가 한 개도 없었다는 둥, 괴물 같은 학생이라더니 괴물이 아니라 조각이었다는 둥, 보검의 등장은 일순 입학식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그날 정민도 보검을 처음 보았다.

키도 덩치도 컸던 정민은 줄 거의 뒤쪽에 서 있었는데, 정민의 옆 옆줄 세 번째 앞에 서 있던 애가 바로 보검이었다.

교장의 호명과 함께 단상까지 움직이던 보검의 뒤통수를 정민은 또렷이 기억했다.

저처럼 부해 보이지 않은 날렵한 체형을 잠시 잠깐 부러워했다.

단상에 서 있는 보검은, 역시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보통 학생이 학교 입학식에서 처음 보는 애들 앞에 불려 나가면, 쑥스러워하거나 민망한 미소를 짓지 않나?

헌데 그날 전교생 앞에 선 보검은 아주 당찼다.

좋아하지도, 부담스러워하지도 않는 그저 아주 일상적인 표정과 걸음걸이로 당당히 단상에 올랐고, 교장이 자기를 옆에 세워둔 채 일장 연설을 하는 동안에도 민망해하거나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응, 나 이렇게 잘난 놈이야. 그래서 칭찬받는 거야. 마치 그런 태도였지만, 그렇다고 잘난 척하는 건방진 느낌도 아니었다. 받아야 할 칭송을 마땅히 받고 있는 그런 모습이랄까.

엄친아 안보검은, 그렇게 입학 첫날부터 전교생에게 얼굴을 알렸다.

도원고에 그런 명물이 들어왔다는 소문은 5G보다 더 빠르게 전교에 퍼져나갔다.

1학년 여학생뿐 아니라 2, 3학년 누나들 사이에서도 원조 엄친남, 냉혈남, 존잘남 등등의 명칭으로 오르내렸고, <누나의 마음>이라는 쪽지를 수반한 갖가지 간식이 보검의 교실로 배달됐다.

세상 무던한 성격의 정민이었지만 저와 다른 위치에 있는 보검이 부러운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정민은 그 애의 뒤통수만 봐도 보검을 알아볼 수 있었다.

첫사랑 하예라를 눈과 마음에 담았던 그날, 정민은 보검과도 그렇게 처음 대화를 나눴었다.

막상 보검은 그 날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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