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시차

5.

by 타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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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다니는 큰길에서 주택가로 들어서려면 경사진 지형이 시작됐다.

차츰 높아지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동네 주민들이 산책로로 이용하는 얕은 산이 보였고, 그 중턱에 있는 학교가 바로, 도원 고등학교였다.

예라와 제이, 정민과 보검을 만나게 했고, 청춘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그곳.

정문으로 이어지는 비탈길은 학생들에게 튼튼한 다리 근육을 선물했는데, 덕분에 이곳은 ‘무다리 고개’라 불렸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곳은, ‘황홀한 무다리 고개’였다.

날이 풀렸다 싶으면 먼저 노란색 개나리와 자줏빛의 진달래가 봄을 알렸다.

나무뿌리에 알람이라도 맞춰둔 것처럼, 서슬 퍼렇던 찬 공기가 가시자마자 나무는 앞다퉈 뿌리로부터 밀어 올린 꽃봉오리를 빵빵 터뜨렸다.

크레파스로 진하게 색칠한 것 같은 꽃봉오리들이 떨어질 즈음에 또다시 봄눈이 내렸다.

연한 핑크빛의 벚꽃잎들이 하늘이 보내준 눈보다 더 화려하게 날아다녔다.

등교하기도 빠듯한 시간에, 여학생들은 그 꽃눈을 지나치지 못하고 핸드폰에 저장했다.

여름이면 그 길가와 건물 뒤로 이어지는 야산이 온통 짙은 초록으로 물들었다.

산과 가깝다 보니 매미 소리는 시원함을 넘어 소음이 되기도 했고, 여름철 교실은 찢어지는 매미 소리로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더워 죽을 거 같은 고비를 여름방학과 함께 그럭저럭 넘기면, 어느새 위협적이었던 더위도 방전되고, 그 틈을 타 서늘한 바람이 시작됐다.

비탈길도 서둘러 다음 옷으로 갈아입었다.

노랗고 빨간 낙엽이 도로에 깔렸고, 가을을 닮은 갈색 잎들이 쓸쓸하게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사시사철 이토록 황홀한 모습으로 탈바꿈하던 ‘무다리 고개’의 절정은 겨울이었다.

도원고 학생이라면 누구나 아침마다 매서운 바람, 미끄러운 비탈길을 마주하고 등산을 해야 했다.

교실에 도착할 즈음엔 하나같이 빨간 코로 변해있었지만, 그사이 온몸은 후끈 달아올라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리기도 했다.

그렇게 아이들은 여학생과 남학생반으로 나뉜 각자의 교실로 입성해 일생에 한 번 지나가는 귀한 하루를 시작했다.

정민이 입학과 동시에 유명인이 된 보검과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건, 1학년 첫 ‘깜축’ 날이었다.

‘깜축’은 깜짝 축제의 줄임말이다. 말 그대로 깜짝 놀라게 갑자기 열리는 축제.

이 전설의 시작은 4년 전 새로운 교감이 부임하고부터였다.

정 교감, 일명 ‘정교’라 불리는 그가 ‘깜축’을 만든 장본인이다.

교감이 되고 처음 온 학교였다. 타 교장, 교감들에 비해 단연 젊었다.

그만큼 교감으로서의 패기와 열정도 만땅으로 충전된 상태였다.

도원고는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학교였고 여전히 야자를 하고 있었다.

서울, 경기도를 중심으로 하나둘 폐지되는 분위기였지만, 훌륭한 졸업생을 최대한 많이 배출해야 하는 이 신생 학교는 아직 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 교감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깜짝 축제.

그는 시험이 끝난 다음 주 중 하루를, 야자 말고 스트레스를 풀 만한 화끈한 시간으로 만들어주기로 했다.

기대하던 것을 받을 때보다, 생각지도 않은 선물이 훨씬 더 기분 좋아지는 법이니까.

깜짝 놀랄만한 선물이 바로 ‘깜축’인 셈이었다.

정민과 보검이 1학년이던 그해, 그날도 정 교감의 깜짝 방송에 반 아이들 모두 미쳐 날뛰며 운동장으로 향했다.

말로만 듣던 행사를 접한 아이들은 금세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몇 초 만에 우르르- 남학생들이 빠져나갔고, 교실엔 시큼한 호르몬 냄새가 남아있었다.

반장이었던 보검은 마지막으로 교실 문을 잠그고 가야 했다.

텅 빈 교실을 나와 문을 잠그고 계단 쪽으로 가던 중, 보검은 도서관에 불이 켜진 걸 발견했다.

왜 불이 켜있지...? 무려 ‘깜축’이 열리는 오늘 같은 날, 누가 도서관엘 가겠는가.

고3은 어차피 따로 격리된 상태니 누군가 도서관에서 공부하려다 방송을 듣고 그냥 뛰쳐나갔나 보다고 생각했다.

도서관 문을 열어보니 역시 텅 비어있었다.

탁- 스위치를 끄고 문을 닫고 계단으로 걸어가 내려가려는데- 도서관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뭐야...?”

보검은 다시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누구 있어요?”

조용했다.

뭐야.. 미간을 살짝 접으며 보검이 다시 불을 끄려는데-

“저기.. 사람 있어요....”

두리뭉실한 말투의 남학생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렸다.

이어, 도서관 제일 안쪽 자리에서 스윽 큰 덩치 하나가 일어섰다. 난처한 표정의 정민이었다.

“몇 학년이에요?”

보검은 혹시 3학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학년이라고 하기엔 좀 커 보이기도 했고.

“... 1학년...”

“1학년이면 지금 깜축 한다고 다 나오래. 방송 못 들었어?”

“어 들었는데....”

정민은 꽤 두꺼운 뿔테안경을 쓰고 있었다. 보검의 등장에 긴장했는지, 콧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안경테를 자꾸만 위로 밀어 올렸다.

여기 숨어 있으면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그냥 지나치지 않고 들어선 보검의 오지랖이 마뜩잖은 정민이었다.

“난 5반 안보검. 같이 내려가자”

“근데, 난.. 별로 장기자랑 할 것도 없고..”

정민은 축제 같은 건 관심 없었다.

집에 먼저 가는 건 안 된다고 하니, 도서관에서 공부나 하고 있을 참이었다.

“그냥 구경만 해도 된대. 나도 장기자랑 안 해”

“그래..? 근데...”

“오늘은 공부하지 말구 놀라고 정교가 정한 날이잖아. 너 혼자 공부하는 건 반칙이다”

보검은 말을 뱉으면서도 스스로 억지스럽다 생각했다.

하지만 앞에 서 있는 저 두리뭉실한 친구는 그 말에 화낼 것 같지 않았다.

“아니야, 혼자만 공부하겠다는 건 아니고..”

정민은 체형과 어울리게 말투도 느릿했다.

“이름이 뭐야?”

“도정민.. 1학년 2반 도정민”

2반에 이런 애가 있었구나.. 보검은 생각했다. 정민의 첫인상은 상대를 편하게 해 주는 그런 모습이었다.

“가자. 구경이라도 해야지. 깜축 땜에 이 학교 오고 싶어 하는 애들도 있다는데”

“어.... 그 래.. 잠시만”

정민은 화를 내거나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게 썩 기분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턱대고 대적하는 막무가내는 아닌 것 같았다.

정민은 책과 필기도구를 챙겨 들고 옆으로 비켜선 후, 의자를 원래처럼 책상에 바짝 밀어 넣었다.

말투를 닮은 정민의 그런 느릿한 행동들은 답답하다기보다 진정성 있는 사람으로 비쳤다.

2반 도정민 이랬지.. 보검은 기억하려는 듯 정민의 이름을 속으로 확인하며 함께 도서관을 나왔다.

“맞다 아마 니네 반 잠겼을걸. 그거 우리 교실에 놓고 가자. 바로 앞이니까”

“어- 어, 그래. 고마워”

정민은 보검에게 자신의 책과 필기도구를 건넸고, 보검은 자신의 교실 사물함에 정민의 물건들을 넣어주었다.

보검은 그날 처음 정민을 알게 되었다.

이후 친구가 된 두 사람은 언제 처음 대화했는지에 대한 기억에 차이가 있었다.

보검의 기억은 깜축날이었지만, 정민에게는 짝사랑이라는 병에 걸린 그날이었기 때문에.


*


<진짜, 너무하네..>

벚꽃과 함께 웃고 있는 제이와 예라의 사진을 내려다보던 남자, 도정민의 눈가는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살아있을 때조차 가슴이 따끔거려 쉽게 떠올리지 못하던 시절의 기억이었다.

헌데 이런 존재가 된 지금 그때를 떠올리게 되다니..

짝사랑의 병이 낫지 않은 채 죽음을 맞이한 탓에, 정민은 아직도 그 병에 걸려있었다.

치료할 방법은 사라졌지만, 병의 원인인 그 애를 영영 떠올리지 않으면 다시 도질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로 그런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 애를 처음 본 그날을 떠올렸고, 그 애가 기억났고, 그 애를 만나기까지 했으니까.

죽음 이후 지금껏 느끼지 못했었는데, 다시금 가슴의 통증이 밀려왔다.

따갑고 저리고 쓰린.

정민은 사진 속 제이를 다시 내려다보고,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왔던 여자가 그녀임을 깨달았다.

<제이였구나.. 많이 달라졌네>

분명 그날 그녀는, 사진 속 고딩 시절의 제이가 아니었다.

길고 웨이브 진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혹시 같은 세상에서 지나쳤더라도 알아보지 못했을 그런 모습이었다.

유제이. 그녀는 보검의 여자친구였다.

1등 안보검과 2등으로 입학한 유제이는 세상 살벌한 라이벌이었다.

삼 년 내내 만나기만 하면 그렇게 으르렁거리더니, 실은 전교생을 속인 연막이었다.

<오늘 참 다양하게 소환되네...>

예라의 집이라는 걸 확인하고, 제이와 예라의 그 시절 사진을 목격하고 나니 한동안 잊고 있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밤이었다.

정민은 창가로 다가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휴.... 한숨이 다시 시작됐다.

예라는 왜 이곳에 나타났을까. 아니.. 그녀는 왜 나를 볼 수 있는 걸까.

그 애는 과연, 날 기억이라도 할까...?

수용하기 벅찬 지난날의 기억들로 아무래도 그날 밤은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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