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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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순서는 댄스부 ‘도시녀’의 무대입니다!”
사회를 맡은 학생의 멘트에 아이들은 이성을 잃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악 악---! 도시녀! 도시녀!
운동장 단상 아래에 떼로 몰려있는 아이들은 흡사 좀비와 같은 모습이었다.
댄스부원들과 나란히 서 있는 예라의 시선은 빽빽하게 모인 아이들을 지나 좀 떨어진 뒤쪽으로 향했다.
그곳엔 제이가 있었다. 캠프파이어를 위해 학생회 임원들과 함께 장작을 쌓고 있었다.
“하예라!”
군중 속에서 누군가 예라를 연호했다. 그러자 마치 바이러스가 퍼지듯 일순 모든 입이 똑같은 모양으로 움직였다. 하예라! 하예라!
군중의 떼창이 부담스러운 예라는 옆에 선 댄스부원들을 쳐다보았다. 그 애들은 심기 불편한 얼굴을 하고 예라에게 썩소를 날리고 있었다.
‘에잇.. 제이랑 학생회 애들은 왜 안 오는 거야.. 장작도 다 쌓았구만..’
예라는 다시 군중의 뒷편 학생회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제이가 활짝 웃는 표정을 하고 돌아보았다. 이어 제이 옆에 서 있던 남학생도 무대 쪽으로 몸을 돌리려 했다.
'그렇지. 고개를 돌려, 얼른..!'
그 애의 얼굴이 보일 듯 아슬하던 찰라, 음악이 시작됐다.
<Run Devil Run>이 시작되자 아이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완벽한 좀비 떼의 모습으로 변했다.
악---! 예라 시대! 예라 시대!! 런! 런! 런! 런!
모두들 이리 난리건만, 제이 옆 그 남학생만은 슬로우모션에 걸린 화면처럼 움직임이 굼떴다.
'빨리 좀 돌아보라고! 오늘은 니 얼굴을 확인하고 말 테다!'
댄스를 시작한 예라의 마음이 급했다. 그리고 드디어, 남학생의 콧날이 얼굴 옆선 위로 천천히 드러나려는데-
“띠리리링- 띠리리링- 띠리리링-”
예라는 핸드폰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아씨.. 또 못 봤네..’
간만에 꿈에 나왔는데.. 아쉬웠다.
부스스 일어나 앉은 예라의 시야에 눈에 익은 화장대와 물건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것은 아닌.
제이의 방이었으니까.
이사한 첫날, 친구 집에서 외박이라니.
예라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제이는 벌써 출근하고 없었다.
도보로 출퇴근이 가능한 예라와 달리 제이의 사무실은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하는 곳이었다.
지옥철이 그나마 자가운전보다 낫다고 했다. 시간만 딱 딱 맞추면 지하철 안에서 몸이 호떡처럼 납작해지더라도 제 시각에 사무실에 도착할 수는 있어, 라고 제이는 말했다.
회사 근처로 집을 옮기려던 제이는 예라가 이 근처로 이사를 결정한 후 마음을 접었다.
추억과 지옥이 공존했던 집에서 나오기까지 예라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가장 잘 아는 친구였으니까. 친구를 위해 지옥철쯤은 감수할 수 있는 그런 사이였으니까.
워낙 자주 들락거리던 곳이라 제이 집에는 예라의 칫솔도, 속옷도 한두 개쯤은 있었다.
예라의 짐 어딘가에도 제이의 것들이 있었다. 폐인으로 지내던 지난 5년, 수시로 예라 집에 들락거린 탓이었다.
거실로 나가는데 제이에게 전화가 왔다.
[일어는 나셨고?]
“좀비 출몰함”
[또 그날?]
“그날의 트라우마는 절대 반지처럼 사라지지 않을 건가 봐”
예라는 거실로 나가 주방으로 이동했다.
[이번엔 얼굴 봤고?]
“아니. 이번엔 날 업고 있는 게 아니라 니 옆에 서 있더라”
토스터에 식빵을 하나 넣고 스위치를 눌렀다.
[허 참.. 걔가 진짜 좀비 아니냐? 다른 애들은 다 좀비 같다며 왜 걔만 맨날 말짱하게 나와?]
“주인공이니까”
탁-
예라는 솟아오른 식빵을 꺼내 접시에 놓고 잔에 우유를 따랐다.
[아니, 주인공인데 왜 얼굴이 없냐고]
“그건 나도 모르지”
[설마.. 주인공이 보검이라는 반전은 아니길..]
“철없고 생각 없던 시절 얘기다. 꺼내지 마라”
[에효.. 절친의 첫사랑이 현 남자친구인 내 팔자는, 괜찮은 거 맞지?]
“그거 착각이었다니까. 내 첫사랑은 얼굴 없는 그 애였어. 그땐 몰랐지만”
예라는 식탁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지지배. 어떻게든 보검이 보겠다고 난리 부렸으면서]
“입학식 날 하필 교장 옆에 서 있어서 착각한 거라니까. 나 업고 뛴 것도 그 앤 줄 알았고. 보검이가 자기라고 뻥 쳤었잖아..”
입안에 식빵을 문 채라 예라의 발음이 뭉개졌다.
[됐고, 퇴근하고 정류장에서 보자고. 출발할 때 연락할게]
“넵. 부회장님!”
전화를 끊은 예라는 입속을 비우기 위해 우유를 들이켰다.
퇴근 후 두 사람은, 함께 예라의 오피스텔에 가보기로 했다. 이렇게 뭔가 제이의 도움을 받아야 하거나 필요로 할 때마다, 예라는 제이를 부회장님이라고 불렀다. 전교 부회장이었던 고2 때부터 필요에 따라 종종.
제이는 태생이 회장, 부회장. 뭐 그런 위치와 잘 어울리는 친구였다.
어디 그것뿐인가. 항상 긍정적이고 운동선수 마냥 활기찼다.
힘든 일이 생겼어도 쉽게 희망을 놓지 않았고, 옆에서 항상 길을 안내해주는 길잡이 같은 친구.
예라에게 제이는 그런 친구였다. 도원고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간단히 씻고 욕실에서 나온 예라는 옷장을 열었다.
둘 다, 서로의 집에서 잠을 자고 나면 알아서 옷을 꺼내 입었다.
하지만 막상 꺼내 입을 만한 옷들이 없었다. 취향이 무척 달랐기 때문이다.
둘도 없는 절친인 예라와 제이의 취향은 적도와 극지방만큼 달랐다.
예라가 봄날의 벚꽃 같다면, 제이는 한여름 소나기 같았다.
예라는 바람에 쉽게 살랑거리는 옷감을 좋아했고, 제이는 움직이기 편한 신축성 재질을 선호했다.
예라는 예쁜 음식을 좋아했고, 제이는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했다.
예라는 흥얼거릴 수 있는 음악을 좋아했고, 제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를 수 있는 음악을 좋아했다.
예라는 지나친 남자들을 다시 뒤돌아보게 만드는 타고난 외모의 소유자였고,
제이는 마주친 여자들이 호감을 느끼는 독특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예라는 하늘하늘했고, 제이는 심플하고 댄디했다.
그랬다.
적어도 예라에게 부모님의 불행 같은 게 닥치기 전까지는.
천하의 유제이가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는, 둘의 취향은 그렇게 과하게 달랐다.
제이의 옷장을 열어본 예라는 피식 웃음이 났다.
“와.. 이런 스타일로 바뀔 줄 누가 알았겠어...”
이제 둘의 취향은 180도 완전히 역전된 상태였다.
예라가 변한 건 부모님의 사고와 견디기 벅찬 현실 때문이었다.
삶이 한순간 송두리째 바뀐 상황에서, 예쁘고 사랑스럽고 하늘거리며 발랄한 것들은 세상 쓸모없는 것들이 되었다.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공들여 치장하고 화사한 옷을 입고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며 행복하게 웃는다고, 죽은 부모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그 어떤 발악과 기행을 일삼는다고 해서 사고당하기 전의 단란했던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절대 아니었다.
준비 없이 맞이한 가혹한 현실과, 그 지옥 같은 현실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는 건 단지 친구뿐이었다.
그 외 물질적인 모든 것들이 덧없고 허무하기만 했다.
집에만 틀어박혀 고통을 끌어안고 있을 때, 예라를 가장 귀찮게 만들었던 건, 치렁치렁한 머리칼이었다.
누웠다 일어날 때도, 힘겹게 움직여 세수라도 할라치면, 그 긴 머리칼이 자꾸만 흘러내려 시야를 가리고 세상을 더 어둡게 만들었다.
그것들은 마치 예라를 더욱더 좁고 음침한 곳에 가두려는 듯했다.
어느 날 아침, 베개와 바닥에 떨어진 수많은 머리칼을 보고 소름이 끼쳤다. 체력이 끝도 없이 바닥을 칠 때였다.
쑥쑥 뿌리째 뽑히는 힘없는 식물처럼, 손만 대면 그 긴 머리칼은 앞다퉈 예라의 몸에서 떨어져나오고 있었다.
예라는 성큼성큼 주방으로 가 큰 가위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쓱. 쓱. 쓱. 쓱...
그 자리에 서서 잡히는 대로 머리를 잘랐다.
머리채가 바닥에 툭 툭 떨어질 때, 안고 있던 절망과 슬픔도 함께 바닥으로 가라앉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그날 저녁 예라 집에 들렀던 제이는 부엌 바닥에 쌓인 예라의 머리칼을 보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아무렇게나 잘린 머리를 하고 소파에 누워 잠든 예라를 끌어안고, 제이는 꽤 오래 눈물을 흘렸다.
그날 이후 예라는 머리칼이 조금만 어깨에 닿아도 스스로 잘라냈다.
다시 그 길고 치렁치렁한 모습이 되기 싫었다.
세상으로 나오기로 마음먹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제이 손에 이끌려 미용실에 간 거였다.
제멋대로 잘린 머리칼을 보고 미용사는 거울을 통해 예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뭔가 질문이 입술 안에서 꿈틀거렸지만, 이내 퀭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그냥 목구멍으로 삼켜버렸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예라의 머리를 다듬어주었다.
지금의 예라는, 이전과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항상 미소짓고 있던 입꼬리는 옆으로 내려앉았고, 자연스럽게 곱슬거리던 갈색의 긴 머리도 짧은 단발이 되었다.
옷가게에 가서도 밝고 화려한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값비싼 휴짓조각들 같다고 생각했다.
"화려한 걸 걸친다고 인생이 즐거워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그런 옷들 앞에 있는 어린 여학생들에게 미친 여자처럼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지껄이다 제이에게 끌려 나오기도 했다.
우습고 가증스러운 그런 옷들보다 눈에 튀지 않으며 조용하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채색의 옷들에 눈이 갔다.
다시 세상에 나온 예라는 이제, 손만 대면 하늘로 둥실 날아오를 것 같았던 발랄함과 화려한 그 시절의 하예라가 아니었다.
예라가 동에서 서로 갔다면, 제이는 서에서 동으로 움직였다.
대학 진학 후 본격적인 사랑을 시작하고부터 조금씩 변해갔다.
미소년 같던 겉모습은 서서히 ‘미녀’ 유제이로 바뀌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