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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에서 그나마 착용 가능한 원피스를 꺼내든 예라는 화장대 거울에 비춰보았다.
화장대에는 ‘미녀’가 된 유제이를 증명하듯 다양한 화장품과 미용용품들이 즐비했고, 제이의 마법 같은 변화를 가능하게 한 장본인 남친, 보검과 제이의 사랑스러운 액자 사진이 놓여있었다.
영 마땅찮았지만 할 수 없이 원피스를 입어야 하는 예라는 입을 샐쭉이며 액자 속 두 사람에게 눈을 흘겼다.
“애 취향은 왜 바꿔놔서. 예전 스타일이 딱이었는데. 칫”
예전엔 제이 입술에 뭐라도 하나 발라보겠다고 난리 쳤던 게 나였는데.
화장대 위 가득 찬 틴트와 립스틱 케이스를 보며, 예라는 또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가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넌 진짜 난 놈이다”
일갈하듯 사진 속 보검에게 한마디 던지고, 예라는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
광장고의 점심 식사 준비가 한창인 조리실.
예라는 조리사와 요리를 마친 음식들을 스테인리스 배식 통으로 옮기고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꺼내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 그냥 무시하려던 예라는 뭔가 떠올랐는지 조리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급식실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광장 경찰선데요]
예상대로 경찰서에서 온 전화였다.
“네, 뭐 좀 찾으셨어요?”
제발 뭐라도 발견했기를 바랐다. 나만 본 그런 존재 말고, 누구나 볼 수 있었던 뭔가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럼 눈이 마주친 그건 착각이라고 하면 그만이니까.
[오피스텔 앞 도로 씨씨티브이 다 확인했는데요, 그 시각에 출입한 사람은 하예라씨하고 경비원뿐이었습니다]
안돼.. 그럼 내가 본 이상한 남자는 정말 귀신이라는 얘기잖아..
“아.. 그래요..”
[다른 도주 경로가 있었는지는 더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풀이 죽은 예라 목소리를 위로하듯 경찰은 끝까지 친절한 말투를 유지했다.
“바쁘실 텐데 감사합니다..”
더 확인하실 필요는 없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내 입으로 내가 귀신을 봤다는 인증까지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이럴 줄 알았다. 아니었다고 우기고 싶지만, 어제 내가 만난 남자는 흔히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런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는 게 거의 확실해진 셈이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저녁에 제이와 동행하기로 약속한 것이기도 했다.
‘내 집 한번 들어가기 힘드네..’
예라는 바닥이 패일 듯한 한숨을 내쉬고 다시 조리실로 향했다.
제이한테도 보이려나..? 혹시 나 땜에 놀라서 나가지 않았을까? 설마 여전히 내 집에 있으려나..?
점심 준비가 끝날 때까지 예라의 머릿속엔, 퇴근 이후 일어날 일들이 다양한 버전으로 떠올랐다 수정되기를 반복했다.
띠리링링~~ 띠리링링~~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싱그러운 아이들이 식당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예라는 학교에서 일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이 젊고 발랄한 청춘들과 함께 있으면 도원고 시절의 추억이 생각나서 행복해졌다.
“골고루 잘 먹어라”
“많이 먹어”
식판에 음식을 담아주며 예라는 그 애들에게 마음도 퍼주고 있었다.
“어, 하 쌤 오늘 좀 달라 보이는데요?”
2학년 수학을 가르치는 임헌규 샘이 식판을 받으려다 예라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라가 이곳으로 출근하고 이렇게 환한 옷차림은 처음이었다.
연한 핑크빛의 작은 꽃들이 만발한 원피스. 제이의 것인.
위에 걸친 흰 가운에 가려지긴 했지만,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생일?”
헌규 샘은 옆으로 이동하면서도 질문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입으니까 몰라보겠지? 우리도 아침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줄 알았다니까”
배식하고 있던 이모님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얼마나 이뻐. 옷발이 사니까 사람이 달라 보인다니까”
“에이, 달라진 게 아니라, 감춰있던 미모가 드러나는 거죠”
헌규 샘은 이모님들과 맞장구치듯 대화를 주고받았다.
참 성격도 좋다. 저 사람은 항상 이토록 서글서글하게 조리사 이모님들과도 스스럼없이 얘길 나눈다.
언제나 텐션이 올라가 있고 학생들과도 친구처럼 농담을 주고받는 그런 쌤이었다.
예라는 별 대답 없이 그저 웃었다.
내 옷이 아니라고 하려면 친구 얘길 꺼내야 했다. 왜 친구 옷을 입고 나왔는지 얘기하려면 이사한 얘기를 해야 하고, 그럼 왜 이사한 집에서 못 자고 그리 갔는지를 설명해야 하는데, 그 정확한 이유를 나도 아직 모르니까.
설명하고 싶어도 해 줄 수 없는 얘기들이었다.
“오늘은 특히 더 맛있을 거 같네요. 잘 먹겠습니다!”
헌규 샘은 예라와 이모님들께 인사를 하고 탁자로 가 동료들과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예라도 이어지는 아이들에게 배식을 계속했다.
*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저녁 시간. 예라는 이어폰을 낀 채 오피스텔 앞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었다.
퇴근 시간이라 도로는 붐볐다. 시간에 맞춰 달려와 멈춘 버스는 문밖으로 우르르 사람들을 쏟아내고 가버렸다.
지하철로 오는 제이를 기다리느라 예라는 아까부터 정류장 의자를 차지하고 있었다.
“야!”
제이가 어깨에 손을 얹자 예라는 고개를 들고 이어폰을 뺐다.
“너 이거 입고 갔었어? 오~ 학교 난리 났겠는데”
“난리 나긴. 내가 열여덟 청춘이냐. 이런 거 입는다고 누가 신경이나 써”
“도원고 얼짱 하예라 같다, 간만에”
“헛소리 그만하고. 근데 너, 진짜 괜찮겠어?”
“야, 나 유제이야! 귀신인지 도깨빈지 내가 확인해줄게!”
옛 친구는 참 신기하다. 나이를 먹고 모습이 바뀌었을지 몰라도, 희한하게 옛 친구를 만나면 항상 그 시절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게 된다.
내 과거를 아는 친구가 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차가운 느낌으로 변한 예라도 제이를 만날 때면 저도 모르게 행복했던 그 시절의 말투와 행동이 나왔다.
세련미에 섹시미까지 겸비하며 환골탈태한 제이도 예라와 있을 때면, 선머슴 같았던 그 시절의 유제이가 됐다.
옛 친구는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을 주는 존재들이니까.
예라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1055호 문 앞에 섰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옆에 든든한 친구도 장착했다.
내 집 들어가겠다는 게 이다지 비장해야 할 일인가 싶었다.
띠 띠 띠 띠.... 번호키를 눌렀다. 1009 0715....
엄마 아빠의 생일 날짜.
띠리릭-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하고 또 한 번 큰 숨을 들이쉬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등이 잠시 켜졌다 꺼지자 실내는 어둑했다. 제이는 거실의 불부터 찾아 켰다.
아직도 제대로 정리 못 한 상태라 둘은 그대로 신을 신은 채였다.
“야.. 어디, 어디 있어...?”
예라와 딱 붙어 서 있는 제이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잠깐만....”
예라도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집 안을 훑었다.
“없어? 갔나?”
제이 질문에 예라는 대답 대신 방 쪽으로 향했다. 제이도 바싹 뒤에 붙어 섰다.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악----”
예라는 달리기 선수처럼 뒤도 안 보고 거실 부엌 쪽으로 뛰어갔다.
“왜 왜? 방에 있어?!”
제이는 방문을 활짝 열고 안을 둘러보았다. 역시 그녀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정민은 두리번거리는 제이를 지나쳐 거실로 나와 예라가 보이는 곳에 멈춰 섰다.
“저기 저기!!”
예라는 한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거실 중앙 허공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제이가 거실로 와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는 건 없었다.
“여기?! 지금 여기 있어? 야! 너 이 새끼, 누구야!!”
제이는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보이지 않는 대상과 몸싸움을 시작했다.
<예라야>
목소리에 예라가 멈칫했다. 제이가 불렀나? 아닌데.. 남자 목소린데..
예라는 눈을 가리고 있던 손가락을 약간 벌리고 거실을 돌아봤다. 그 남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하 예 라..>
제이가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그곳에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예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가늘게 샛눈을 하고 그를 보았다.
어제 보았던 날이 선 눈초리가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촉촉하고 아련한 눈빛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나, 정민이야...>
'뭐...? 누구라고..??'
<도원고, 도 정 민..>
'.......!!.......'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 가늘었던 샛눈을 크게 하며 예라의 표정이 정색하는 얼굴로 바뀌었다.
<나, 기억하니....?>
귀신에게 홀린다는 게 이런 거구나. 내가 지금 딱 그런 꼴이네.
예라는 저도 모르게 남자가 말한 이름을 중얼거렸다.
“도 정 민...?”
“뭐라고? 지금 뭐라 그랬어? 도정민? 도원고, 도정민...?!!”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고 있던 제이가 놀란 얼굴로 예라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하예라 무슨 소리야. 정민이?!”
정민은 옆에 있던 제이를 마주 보며 섰다.
<오랜만이네 유제이.. 안 그래도 보검이 궁금했는데..>
정민도 예라와 제이를 번갈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내, 슬프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