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광경

8.

by 타프씨

.

제이까지 이렇게 보게 될 줄 몰랐다. 보검이 놈이 좋아한 여자. 친구의 첫사랑이자 여자친구.

보이지 않는 자신을 향해, 허공에 대고 입을 떡 벌린 제이를 보며 정민은 난감하고 또 반가웠다.

눈 앞에 펼쳐진 비현실적인 장면에 예라는 반쯤 넋이 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보통 사람 제이가 서 있다. 또 그 앞에 내 눈에만 보이는 남자, 도정민이 서 있다.

이 장면이 기묘하고 생소하다는 생각을 하다 문득- 그 역할을 왜 정민이가 하게 된 건지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다.

“근데 도정민이 왜...”

예라는 부엌 쪽에서 걸어 나오며 의문을 담은 얼굴로 제이를 바라봤다.

이 상황에 관해 설명 좀 해달라고, 넌 뭘 좀 아느냐는 표정이었다.

“제이야...”

다가온 예라를 바라보는 제이의 눈빛이 바르르 일렁였다. 애먼 입술만 꽉 깨문 채 그렇게 잠시 예라를 쳐다보다-

“너한테 아직 말 못 했는데.. 정민이도 같이 있었어.."

마주 서 있던 정민은 제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떨궜다. 제 죽음을 다시 선고받는 듯했다.

보이지 않으니까.. 저를 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하는 제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무슨.. 소리야..?!"

“보검이 사고 난 날. 너희 부모님.. 돌아가신 날.. 도정민도 보검이랑 같이 있었어..”

예라는 목에서 신물이 치솟았다. 아니, 쓰디쓴 잿물 같았다. 또 그 징그러운 사고 얘기.

내 부모를 단숨에 사지로 데려간 그 고속도로 사고 얘기였다.

보검이 다쳤다는 사실을 안 것도, 일 년 정도나 지난 후였다.

폐인처럼 지내던 예라가 조금씩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있을 때, 문득 제이가 너무 자주 들락거린다는 생각이 들어 이제 그만 오고 데이트 좀 하라고 했었다.

“... 만나. 자주”

“맨날 오면서 언제 만난다고.. 나 이제 괜찮아. 이제 보검이랑 놀아”

예라 말에 제이는 잠시 머뭇거렸다. 친구가 이제야 조금씩 악몽에서 걸어 나오려는데, 보검이 얘기까지 꺼내야 할까.. 고민스러웠다.

“보검이.. 병원에 있어 예라야..”

“왜? 어디 아파..?”

“그 도로에 보검이도 있었어. 그리고..”

정민이 얘기를 꺼내려다 제이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다. 또 누군가의 죽음을 말하는 건, 지금은 아니다 싶었다. 더구나 정민이 얘기는.

“많이 다쳐서, 아직 병원에 있어”

사고로 병원에 실려 온 이후로, 보검인 계속 중환자실에 있다고 했다.

그날 예라는 제이를 안고 울기만 했다. 빌어먹을 눈물은 일 년을 그렇게 흘렸는데도 또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거기서 끝인 줄 알았다.

내 부모를 보내야 했고, 절친의 남자친구가 의식불명이 됐다는 것만으로도 떠올리기 싫었던 사고였다. 그런데... 정민이도 있었다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귀신이 돼서 내 앞에 서 있는 거라고..?!

“하.......”

예라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참.. 듣고 있기 힘들군... 정민은 생각했다. 자기 죽음을 또다시 확인받는 건, 귀신이어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예라야, 나 소파에 좀 앉아도 되지..?>

누군지 몰랐을 때면 모를까, 이제 예라의 집인 것도 알고,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으니 아무렇게나 막 행동할 수가 없었다.

얼떨떨한 표정의 예라는 정민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밤새도록 정민은 고민스럽고 속상했었다.

살아 있을 땐 다가가지 못했고, 죽은 후엔 원치 않게 만나게 됐다. 뭐 이다지도 잔인한 악연인 건지.

근데.. 죽은 게 아니라 미친 걸까..? 정민의 미친 심장이 아까부터, 꿈틀대며 나대고 있었다.

죽은 거 맞아...? 아니 왜 멈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고 난리야..?!

'돌아버리겠군..'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정민은 차분히 소파에 앉았다.

예라는 천천히 소파에 가서 앉는 정민을 바라보았다. 그런 예라를 보며 제이도 소파 쪽을 쳐다보았다.

“지금.. 저기 있어?”

제이는 예라 옆 거실 바닥에 앉으며 물었다.

“응.. 소파에 앉았어”

<하->

정민은 이 상황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당췌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모습을 생중계하는 예라와 제이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소파에 앉은 정민을 마주하고 예라와 제이가 거실 바닥에 나란히 마주 앉았다.

“지금 웃고 있어... 슬프게...”

예라는 정민을 보며 중계를 이어갔다.

'나 슬프게 웃는 거 아닌데.. 역시 난 표현력이 부족해..'

정민은 좀 더 밝은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하지만 ‘슬프게’라는 말에 제이는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정민아...!”

죽은 당사자를 앞에 둔 채, 제이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 슬프게 웃은 거 아닌데...>

별거하지도 않았는데 정민은 난감했다. 어쨌든 제이가 자기 때문에 울고 있으니까.

<나 슬픈 거 아니야. 내가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잖아..>

항상 눈가가 촉촉했는데.. 안경 쓰고 있어서 잘 몰랐던 거야 니들이. 이 말까지는 차마 하지 못했다.

“자기는 안 슬프대...”

예라 말에 제이의 통곡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어떻게.. 그 착한 정민이가 여기 있었다니...”

모지, 이 난처한 상황은.. 사람, 아니 귀신 앞에 두고 참.. 정민은 어색함에 귀신이 된 몸조차 아예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음... 예라야, 일단 제이를 좀 진정시키는 게..>

“어, 그래, 그래..”

예라는 들썩이는 제이 어깨에 손을 얹고 토닥겨렸다. 그 박자에 맞춰 조금씩 제이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왜 말 안 했어? 지금까지...?”

조심스러운 예라의 질문에 제이는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가라앉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연쇄 충돌이었잖아. 5명 사망 7명 중상.. 그 다섯 중에 너희 부모님, 그리고 정민이가 있었어. 부모님 때문에 힘들어하는 거 보면서 도저히 정민이 얘기까진 못하겠더라..”

<나도 바로 죽은 건 아니야. 서울 쪽 병원으로 옮겨오고 나서... 아, 끼어들어서 미안>

정민은 자세한 상황을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막 끼어드는 캐릭터는 아니었는데. 특히 예라 앞에선 입도 뻥긋 못하던 내가, 귀신이 되고 확실히 변했다는 걸 실감했다.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야 했으니까. 예라 앞에서 변한 모습을 들킨 게 조금 쑥스럽긴 하지만.

“서울로 옮겨와서 죽었대”

예라가 제이에게 정민의 말을 전해주었다.

“진짜? 정민이가 바로 죽은 건 아니었네..!”

'저 처자들 참.. 아무리 그래도, 죽은 사람을 코앞에 두고 죽네 사네 소리를..'

정민은 억지로 입가에 힘을 주고 괜찮다는 듯 미소지었다.

“니가 좀 나아지면 얘기하려고 했어. 근데 막상 니가 다시 일하게 되고 이사도 오고 하니까, 인제 와서 굳이 그 얘기를 꺼내기가...”

<근데 보검인 잘 지내지? 그놈 소식을 알 수가 없어서..>

'아놔, 이누무 입. 나 왜 이렇게 바뀐 거니..'

정민은 자괴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늘 궁금했다. 그놈은 어떻게 됐는지.

불쑥 던진 정민의 질문에 예라가 정민을 보자, 제이도 예라를 따라 소파를 쳐다봤다.

“왜? 정민이가 또 뭐래? 아씨, 답답하다. 나도 볼 수 있으면 다 같이 얘기할 텐데”

“보검이. 어떻냐고..”

“아.....”

제이는 보이지 않는 정민을 바라보며 착잡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병원..”

사고 이후 보검은 5년째 의식불명 상태였다. 중환자실에서 2년, 현재는 일반 병실로 옮겼지만, 여전히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중환자실에 있을 당시 서너 번 정도 죽을 고비가 있었다. 그대로 죽을 줄 알았는데, 끈질긴 생명력은 쉽게 삶을 놓지 않고 버텨주었다.

제이는 매일 퇴근 후 병원을 들렀다. 특별히 중요한 약속이나 일이 있을 때를 빼고 매일 그렇게 보검에게 갔다.

언제 갑자기 보검이 자신을 알아볼지 모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한결 더 화사하고 화려해진 밝은 유제이의 모습을.

“근데 도정민.. 귀신 되니까 말 잘하나 보다..? 학교 다닐 땐 말 한마디 못 들어본 것 같은데”

제이가 빈 소파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맞어. 사실 정민이 얼굴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어. 하도 고개를 숙이고 다녀서”

“맨날 땅만 보고 다녔지-”

예라와 제이는 갑자기 그 시절이 생각났는지 정민의 과거를 들추기 시작했다.

<하- 하- >

민망한 미소를 짓느라 정민은 뺨에 경련이 날 것 같았다. 두 여자가 다 바라보고 있으니 민망함은 스무 배 불어난 느낌이었다.

"맞다! 어제 너 잘생겼다고 그러지 않았어?!”

제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예라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무슨 소리야...?>

“아니야 별 얘기”

제이는 필사적으로 예라의 손을 잡아 치웠다. 겉모습이 바뀌었다고 그 튼튼했던 제이의 힘이 어디로 간 건 아니었으니까.

“니가 그랬잖아! 귀신인 거 같은데 꽤 잘생겼다고!”

이 유제이를 확 그냥.

“그땐! 내가 무서워서 제대로 못 보고... 근데..”

당황해하며 정민을 돌아본 예라는 순간, 정말 궁금해졌다.

“정민아. 근데 너 진짜 잘생겨졌다...?”

지금 이렇게 가까이에서 더 자세히 뜯어보니, 정민이는 진짜 많이 달라져 있었다.

키가 컸던 건 안다.

하지만 예라와 제이의 기억 속 정민은 큰 키보다 두리뭉실했던 덩치와 뱅글뱅글 돌아가던 안경테가 먼저였다.

만약 그때와 똑같은 모습이었으면 어제도 분명 한눈에 알아봤을 거다. 아무리 귀신이었더라도.

헌데 지금 정민인 그때와 달랐다. 훤칠하고 늘씬하고 샤프해지기까지 했다.

<다이어트가 최고의 성형 맞더라>

정민은 비져나오는 미소를 간신히 참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자세히 좀 묘사해봐. 도정민 지금 어떻게 생겼는데?”

제이는 답답했다. 귀신이 보이는 예라가 이렇게 부러울 줄이야.

<아 무슨 묘사까지.. 왜 그래 니들..>

날아갈 듯한 기분을 참느라 정민의 콧구멍이 미세하게 벌렁거렸다. 솔직히 귀신이 된 후, 물체를 움직이는 방법을 터득한 이래 가장 기분 좋은 날이었다.

“키 컸던 건 기억하지?”

“알지. 우리 보검이랑 비슷했지”

“비슷한 킨데 뭔가 분위기가 달랐잖아?”

“우리 보검인 그때부터 남달랐지”

“야!!”

“쏘리쏘리. 계속해봐”

“일단 뭔가 둔해 보였던 느낌이 싹 사라졌어. 보검이 보다 훨씬 훤칠한 모습이랄까”

제이는 눈을 흘겼지만, 욕은 입 밖으로 뱉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문제의 안경. 그게 없어졌네... 역시 안경은 쓰면 안 되는 물건이었어..”

<복학하기 전에 라식 했어. 안경 안 쓰니까 진짜 편하긴 하더라..>

정민은 쑥스러워하면서도 부연설명을 해주고 싶었다.

“라식 했대. 그리고... 가만 보니까.. 정민이가 원래 잘생겼었네...!”

순간 큭- 하고 기분 좋은 함성이 터지려는 걸, 정민은 간신히 참고 견뎠다.

“저건 안경 벗고 살 빠진 거로만 나올 수 있는 비주얼이 아닌데!?”

“아 궁금해- 나도 보고 싶다 도정민-”

<큭->

정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예라도 웃음이 나왔다. 웃는 예라를 보고 제이도 덩달아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셋은 그렇게 한참 큰 소리로 웃었다.

이 황당한 상황이 우스워 계속 웃음이 나왔다. 얼마 만에 그렇게 크게 웃어봤는지.

잠시 후, 셋 다 눈물을 닦고 아픈 배를 진정시켰다.

“정민아, 보검이 보러 갈래...? 니가 안 와서 아직도 저렇게 누워있나 봐..”

웃음을 진정시킨 제이가 보이지 않는 정민을 향해 말했다.

눈가가 젖어있는 건 웃음 때문이었는데, 그 말을 하는 제이의 심정이 촉촉하게 느껴졌다.

안보검.

존재감 없던 자신에게 항상 손 내밀어주던 멋진 놈.

도원고의 명물이자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던 친구.

정민은 예라를 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라가 씩 웃으며 제이에게 말을 전했다.

“가고 싶대. 정민이”


이전 07화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