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꽃 한 송이

9.

by 타프씨

.

달이 빛으로 꽉 찬 보름이다.

하필 보름날 귀신과 같은 공간에서 잠들게 될 줄이야.

방안 침대에 나란히 누운 예라와 제이는 눈은 감았으니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자냐?”

잠도 오지 않는데 눈 감고 있기가 힘들었던지 제이가 먼저 눈과 입을 열었다.

“아니”

예라도 기다렸다는 듯 눈을 떴다.

“넌 이 상황이 어떤 거 같애?”

제이가 팔을 괴고 돌아 누우며 예라를 보았다.

“....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그치?”

“근데, 진짜야”

말을 뱉긴 했지만, 예라도 확신보다는 물음표가 어울리는 말투였다.

“넌 보이니까. 아무것도 뵈는 게 없는 난, 솔직히 아직도 진짠지 너 혼자 원맨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사실 나 학교 다닐 때는 정민이 잘 몰랐다”

그 애 얘기를 꺼내는 예라를 보고 제이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았다.

“내가 뭐에 씌어서 보검이만 보일 때였잖아”

“싸가지없다고 내가 그렇게 읊어줘도 마이동풍이요 우이독경이셨지”

“그날, 나 업고 뛴 게 보검이 아니었다는 거 알게 되고, 잘못 씌워진 콩깍지가 떨어지고 나니까, 그제야 다른 애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

이 단순한 아가씨. 예라여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한 번에 하나밖에 할 줄 모르는 인간. 이유도 없이 끌리는 감정에 스스로 콩깍지를 씌워버리고 그 속에서 마구 허우적거리는. 누가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그 속이 들여다보이는 사람이 바로 예라였다.

“정민이도 그때서야 보이더라고. 그땐 귀신도 아니었는데 왜 안 보였는지 몰라”

“못 본 거지”

“안 본 거지. 보검이만 보이던 때라 정민인 유령 취급했었어. 생각해 보면 옆에 자주 있었는데. 도정민..”

“내 남친이 우월하게 잘나서 미안”

“나 눈 돌았다고 길길이 날뛰었잖아. 유제이가 제일 싫어했는데, 안보검”

"흠. 흠."

제이는 괜히 목구멍에 힘을 주고 소리를 냈다. 민망한 건 맞으니까.

“졸업할 때까지 못 찾았잖아. 꿈속의 그 얼굴 없는 주인공”

“.... 그치..”

“그때까진 한 번도 그런 생각 안 해봤는데..”

예라의 진지한 표정을 바라보는 제이의 눈빛이 아득하게 흔들렸다.

“어제, 오늘, 정민이 보고 나서 드는 생각이..”

제이는 꼴깍 침을 삼키고 마른 혀로 입술을 축였다.

“혹시 저 애가 아니었을까..? 그땐 왜 생각조차 안 해봤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

“...... 그땐, 잘 몰랐으니까...”

제이는 괴고 있던 팔을 풀고 천장을 보고 누웠다. 그리고 성대를 밀고 나오려는 수많은 말들을 긴 한숨으로 대신했다.

미안해 예라야. 너에게 해주지 못한 말이, 아직 남아있어.

정민이 사망 소식을 전해주지 못한 것처럼, 때를 놓친 말이, 아직 있어.

근데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 모른 채 너를 두려고 했는데, 그게 맞는 건지.. 정민이가 나타난 지금, 그게 가능할지..

말똥한 두 사람의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같은 공간. 어두운 거실 소파에 누운 정민도 베란다 창을 통해 둥근달을 쳐다보았다.

조상님들은 주로 크고 밝은 보름달을 보며 기도하고 제를 지냈다지.

이런 존재가 되고 나서야 달의 기운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처럼 크고 밝은 달이며 몸에 한껏 기가 차올랐다.

기운이 가장 떨어지는 초승달이 뜰 때면, 뭘 먹어도 헛헛하고 많이 움직이지 않아도 피로했다. 정민 같은 존재에게 달은 충전기 같은 존재였다.

'너무 기가 빵빵해져서 그렇게 말을 많이 했나.. 중간에 그렇게 불쑥불쑥.. 보이지 않는 가벼운 존재가 되었기로서니, 인성까지 가벼워진 거냐 도정민..?'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건 나대는 심장 때문이 아니라 마뜩잖았던 제 모습 때문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대화란 걸 한 거지 내가..'

“아직, 병원”

복기하던 몇 시간 전의 모습 중에 착잡한 표정의 제이 얼굴이 떠올랐다.

정민은 내일 두 친구를 따라 보검이 있다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병원 위치가 다행히 정민의 활동 구역 안에 있었다.

<자식... 여태 그러고 있었네...>

마주치지 않아서 잘살고 있나 보다 했다.

그날 사고가 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원하는 회사에 취직해 멋진 사회인이 됐을 텐데.

도원고의 명물이었고 대한민국 최고대학에 당당히 합격한 전도유망했던 청년 안보검.

보검과 제이는 2학년 학생회를 하면서 자주 만나게 됐다.

그때까지 보검은 이성 때문에 고민이란 걸 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대학 가서도 충분히 만날 수 있는데 굳이 어린 나이에 이성을 사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했었다.

성인 돼서 제대로 된 연애를 하지, 왜 이 아까운 시간을 쪼개 이성에게 할애해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도 했다. 제 입으로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러던 놈이 어느 날부터 한 여학생을 의식하기 시작했고, 그게 유제이였다.

졸업 후 두 사람은 라이벌에서 하루아침에 닭살 커플이 되었다.

빨리 결혼하고 싶다고 했으니, 아마 취직하고 결혼부터 했을지도.

사고가 나지 않아 보검의 계획대로 청혼했다면, 이미 귀여운 조카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고백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안 죽었으면..’

근데 사고가 나고 내가 죽은 걸 보니, 역시 난 예라와는 인연이 아니었던가 보다.. 생각은 그렇게 흘러갔다.

<고백 안 하길 잘했네..>

연인이 되지 않아서 참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보검이 덕에 예라와 다시 만나 연인이 되었다면, 잘못 연결된 인연 탓에 그녀가 불행해지는 일이 생겼을 거다. 이렇게 죽을 운명이었던 걸 보면.

짝사랑은 정말 짝사랑으로 끝나는 게 맞았나.. 잡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근데.. 정말 많이 달라졌네 하예라..>

선명한 수채화에서 무채색 수묵화처럼 변한 그녀가 여전히 어색한 그였다.


정민은 군대 제대와 함께 외형의 변화를 맞이했다.

두리뭉실했던 체형에 단단하고 자잘한 생활 근육이 자리 잡더니 젖살이 쏙 빠지며 모델 뺨치는 몸매로 재탄생했다. 체형만 떡 벌어지게 변했을 뿐인데도 정민을 대하는 시선들이 전과는 달랐다.

복학 전 라식을 받고 두껍던 안경도 벗어던졌다. 미용실에서 최신 유행 헤어스타일까지 장착하고 나서던 날은 거짓말 조금 보태 지나가던 여자들 한 오십 명쯤은 고개를 돌리고 쳐다봤었다.

복학한 정민의 주변은 주로 꽃밭이었다.

윗 학년이 된 동기 여학생도, 복학해서 함께 수업을 듣는 후배 여학생들도, 깎아 놓은 듯한 조각 같은 몸매와 안경에 가려있던 호수같이 맑고 촉촉한 눈매가 세상에 드러나자 그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하지만 정민에게 화룡점정은 타고난 선한 인간성이었다. 온화하고 진정성 있는 그의 내면은 그를 완성시키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 따뜻한 남자의 마음은 안타깝지만 아무한테나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열리지 않았다.

온화함을 보고 다가섰다 냉정하게 거리를 두는 그를 떠나간 여학생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마음이지만 의지대로 되지 않는 공간이 있었으니까.

따뜻한 온실 같은 마음속에 굳건하게 피어있는 꽃 한 송이가 있는 곳.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그곳에 여전히 하예라라는 환한 아이가 피어있었다.

그랬었다.

예라는 이토록 쓸쓸한 가을이 생각나는 그런 애가 아니었다.

핑크빛 벚꽃, 그 자체였던, 그 꽃송이 안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아이였다.

예쁘게 하늘을 닮으며 자라라라는 뜻으로 부모님이 지어주셨다는 이름과 잘 어울렸던, 그런 아이였다.

처음 마주쳤을 때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게 이해가 갔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밝고 환한 모습일 줄 알았는데.. 힘든 시간은 네 사람에게 공정히 흘러간 모양이었다.

정민은 지금 그녀와 벽을 사이에 두고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울렁거리는 이 마음의 파도는 저 크고 꽉 찬 보름달 때문일까..

정민은 눈꺼풀을 내려 보름달을 외면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았다.

이전 08화기묘한 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