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색들

by 타프씨

코로나라는 무지막지한 바이러스가 한 해를 통째로 삼켰다.

12월 31일까지, 2020년의 마지막 날까지 아낌없이 주겠으니

이제 새로 시작하는 해에는, 그만 사라져 버렸으면 바랬겄만...

해와 월과 날이 바뀌었지만

그 끔찍한 이름을 떨치지 못함에 속이 상한다.


우기가 시작한 지 한.. 두 달쯤 접어든 것 같다.

그래서 많이 습하고 건기보단 선선하다.

이러다가도 어쩌다 구름이 해를 가리지 못하는 날이면 또

"잊고 있었지? 여긴 적도야!"라는 걸 깨닫게 하는 후끈함이 밀려온다.

참 더운 곳이구나. 내가 사는 이 곳은 정말 적도구나...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큰애가 한국 나이로 18살, 고2가 되는 것이니

내가 이곳에 산 지도 18년.

하지만 난 아직도 머리가죽 벗겨질 듯한, 뜨겁다 못해 따가운 이곳의 태양에 적응하지 못했다.

푸르고 맑은 하늘이 좋긴 하지만

그걸 보기 위해 감수해야 할 태양의 온도를 생각하면

구름으로 한풀 덮인 회색빛 하늘이, 이젠 더 고맙다.

비가 퍼붓기 전 미친 듯이 불어대는 바람도

이제는 애 떨어질 걱정 안 해도 되는 가슴 철렁할 천둥소리도

이곳에서는 더 소중하다.

일 년 중 기껏해야 서너 달 주어지는 이런 우중충한 날들을, 더 사랑하게 됐다.


마른 체형 탓에 한국에서는 겨울이면 참 힘들어했다.

학창 시절엔 친구들이 내가 옷을 몇 겹이나 껴 입었는지로 놀리고 웃기도 했다.

30년 정도 지난 지금의 기억으로는

가장 많이 껴입었던 게 브라를 합쳐 9겹이었던 거 같다.

까도 까도 계속 옷이 나온다며, 친구들이 한참을 어이없어하며 웃어댔었다.

그만큼 난 추위를 많이 탔고, 추운 겨울보다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흐르는 여름을 더 좋아했다.


결혼하고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 그래서 내 운명이었나... 잠시 시답잖은 생각도 했었다.

이곳에 와서 한 두 해.. 초반 몇 년은 추위 없는 이곳 날씨가 나에게 딱 인 것 같이 살만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계절이 바뀌는 환경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해가 뜨거나

구름이 끼거나

비가 오거나

일 년 내내 바뀌는 거라곤 이것뿐인 이곳 적도에서

살면 살수록 내 나라의, 내 어린 시절의 그 다양한 계절이 그리워진다.


연두가 초록으로 변했다가

이글거리며 새파랬다가

다시 노랗고 빨갛게 바뀐 후

하얀색으로 뒤덮이게 되는..

그 다양한 계절의 색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그리운 것인지를

내 나라를 떠나고 나서야 너무나 절실히 깨닫고 있다.


즐겨라.

때마다 바뀌는 계절과 그 아름다운 색들을.

보아라.

눈이 부시도록 현란한 그 자연의 색들을.

그리고 감사하라.

이 세상에는 죽을 때까지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으니.


내 나라에 있는 나의 친구들과 지인들께

꼭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


아직 제대로 된 겨울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나의 두 아이들은

한파가 시작됐다며 꽁꽁 싸매고 다니는 한국 사람들을 티비로 보면서 부러워한다.

패딩 하나에 목도리 하나 두르면 만사 오케이라고 착각하면서..

그런 아이들에게 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을 한다.

얘야.... 아무리 폭신하고 두꺼운 옷을 입어도 그 틈새를 뚫고 들어오는 시리디 시린 겨울바람이

얼마나 매섭고 차가운지 너희는 모를 거야.

냉장고보다 춥냐 묻는다.

난 백만 스물 세배 더 춥다고, 진심으로 말하지만 아이들은 날 뻥쟁이라며 웃는다.


약 이년 후쯤이면 한국으로 대학에 가게 될 첫 아이는

벌써부터 그때 입고 신고 목에 두를 겨울 패션의 로망에 한껏 젖어 있다.

아마 이십 년 만에 처음 겪게 될 하얗고 차가운 그 계절에

큰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너무 놀라지는 말길.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하얗고 뽀얀 눈을 진짜 봤다는 걸로

배신감 쩔게하는 그 추위 따위는 하얗게 잊을 수 있기를.

나도 겨울을 맞이한 지가 18년이 되어가니

그토록 싫어하던 그 추운 계절과 차가운 눈이

이젠 그립기도 하다.


이곳은 오늘도 또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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