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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살 수 있다는 통계에는 조건이 있었다.
잘 키웠을 경우.
잘 키운다는 게 밥을 잘 주고 목욕을 자주 시켜주는 게 다가 아니었다.
적절한 양을 적당히 분배하고 찬 대리석 바닥을 돌아다니지 않게 해야 했었다.
우리는 사랑하는 만큼 까시에게 먹이를 줬다.
태양에 달궈진 뜨거운 모래 위를 걸어야 할 까시가 차디찬 돌바닥을 겅중거리면 귀엽다고 유난 떨었다.
까시가 언제부터 내게 말하지 않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난 자랐고 학년이 높아졌고 친구가 많아져 바빠지고 있었다.
속이 거북하다고 그만 먹어도 될 것 같다는 말만 알아들었어도 까시는 십 년 넘게 살았을지 모른다.
근데 어쩌면 까시가 바꾼 건지도 몰랐다.
얘기 나눌 친구를 내게서 할머니로.
할머니가 더 좋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까시 덕에 치매였던 할머니가 많이 티 나지 않았고 외롭지 않았던 것 같다고 했다.
할머니는 까시에게 마지막까지 사랑을 퍼주었다.
과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온종일 까시를 먹이고 씻겼다.
그런 할머니는 어느 순간부터 까까를 경계했다.
생김새가 다른 걸 본능으로 인식했던지 낯선 사람 대하듯 놀래 얀띠는 가능한 할머니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래서 까시의 과식을 말리지도 못했다.
까시는 비어디의 최다 사인 중 하나인 장 막힘으로 네 번째 생일을 함께하지 못했다.
까시가 떠났을 때 자신의 식사는 잊고 까시만 챙겼던 할머니는 거의 누워만 있었다.
우리는 까시를 상자에 담아 화장시키고 그 재와 흙을 담은 유칼립투스 화분을 할머니 침대 곁에 놓아줬다.
할머니는 티끌만큼 남은 기운을 거실 소파로 와 눕는 데 사용했다.
티비를 틀어 뒀지만 할머니는 항상 까시가 없는 빈집만 쳐다본다고 얀띠가 알려주었다.
어느 날 내 간식을 챙기고 설거지하는 얀띠를 빤히 보던 할머니가 내게 물었다.
“뉘셔..? 니가 이쁘대? 잘해주네..”
어느 날 얀띠는 까까 방에 놓인 돈을 들고나와 엄마에게 건넸다.
할머니가 몰래 방에 가서 두고 온 거라고 했다.
“할머니 nya suka Yanti(할머니가 얀띠를 좋아해). 얀띠가 다정이한테 잘 해줘서.”
엄마는 그 돈을 돌려받지 않았고 그런 일은 할머니가 일어설 기운이 있을 때마다 한 번씩 일어났다.
나는 가끔 으이그 하는 할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다.
예전엔 까칠한 느낌이었는데 이제 떠올리니 동글동글한 말이었다.
티비를 틀어놓은 채 소파에서 잠든 할머니는 아기 같았다.
할머니는 이제 얀띠보다, 나보다 더 작아 보였다.
“손, 잡아 줘. 이불도, 덮어줘.”
얀띠는 할머니가 까시에게 했던 것처럼 하자고 했다.
나는 하얗게 변한 할머니를 쓰다듬었다.
할머니는 하나도 따갑지 않았다.
할머니의 가시는 어느새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끝)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