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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인사를 나눈 기사 아저씨는 작고 왜소한 체형에 천진스러운 미소가 일품인 사람이었다.
사실 나이는 나와 별 차이가 안 났겠지만,
난 늘 '기사 아저씨'라고 불렀다. (알았으면 기분 나빠했을지도 모르겠다^^)
착하고 선한 이 아저씨의 문제는,
운전 중 자주 존다는 거였다. 기사로써 가장 치명적인 단점을 가진 셈이다.
때문에 몇 차례 접촉 사고가 있었고, 몇 번이나 회사의 경고를 받았지만 결국 고쳐지지 않아 회사에서 나가게 되었다.
그다음에 만난 기사가 바로, 에르윈이었다.
첫인상부터 처음 기사와는 많이 달랐다.
꽤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에 무엇보다도 반짝반짝 빛나는 동그랗고 큰 눈을 가진, 한눈에도 똘망똘망해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첫 번째 주택에 살 무렵, 큰 애를 임신한 지 5개월도 안 됐을 때부터 함께했으니,
내 인니 생활 초반부터 거의 함께 시작한 기사였던 셈이다.
퇴근하고 돌아와 저녁을 먹던 남편이 말을 꺼냈다.
"에르윈 와이프 맹장 수술했다네. 현지 병원에서 한 건데도 병원비가 꽤 많이 나왔나 봐"
"아이고, 얼마나?"
"700만 루피안가... 친구한테 좀 빌리고 직원들이 조금씩 도와준 거 같더라고"
"에고.. 우리도 봉투 좀 해야겠다..."
정확히 저 금액이었는지는 사실 기억이 안 난다. 분명한 건, 에르윈의 한 달 월급보다는 많았다는 사실이다.
의료보험이 없는 이 나라에서 병원은, 돈 먹는 기계나 다름없는 곳이다.
내가 아이를 낳은 병원들의 경우는 그나마 형편이 되는 현지인들이나 외국인들이 갈만한 곳이다.
에르윈 같은 일반 현지 노동자들은 그네들이 사는 동네에 있는 좀 더 작은 규모의 병원을 다니는데
그런 곳도 병원비가 싼 건 아니라고 한다.
의료보험 말고, 지역보험 같은 게 있긴 한데, 병원과 날짜가 지정되어있어서 실제로 혜택을 받기가 쉽지 않은 구조라고 한다. 에르윈도 그 보험이 있긴 했지만, 막상 이번엔 별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주변의 도움과 본인이 모아둔 돈을 털어 와이프는 수술을 마치고 퇴원을 했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났을 무렵... 남편을 통해 황당한 얘기를 듣게 됐다.
"맹장이 아니었나 봐"
"뭐..?!! 뭔 소리야?"
"얘기 들어보니까.. 복수가 찬다는 것 같던데..."
대장암이었다.
돌아보면 아마 한 달 전 배가 아파 맹장 수술을 받을 당시에도 이미 2, 3기 정도는 되었던 거 같다. 그런 암 환자 배를 가르고 맹장 수술을 했으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맹장 수술을 받고 암은 급속히 악화된 것 같았다.
복수가 찼다는 건, 거의 말기에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들었다.
너무 황당했다. 아니 그래도 병원인데.. 어떻게 암을 진단 못해서 멀쩡한 맹장을 떼어냈던 건지..
믿을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이곳 평범한 시민들의 현실이었다.
에르윈은 우리 동네에 있는, 내가 둘째 아들을 낳은 근처 종합병원으로 와이프를 데려가고 싶었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이곳 교민들이 그나마 많이 이용하는 그 종합병원은 감기로 진료를 받고 약을 받아오기만 해도
70-80만 루피아(한국 돈 7만 원) 정도가 나온다.
뎅기로 일주일 넘게 입원했던 나는 퇴원 당시 2000만 루피아를 넘게 지불하고 나왔다.
둘째 아이를 자연분만으로 출산하고 2박 3일 입원했다 퇴원할 때에도 비슷한 금액을 지불했다.
뭔가 입원을 해서 치료해야 하는 병에 걸렸다면, 최소 천만 루피아 단위를 생각해야 하는 곳이다.
당연히 에르윈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박박 끌어와 맹장 수술을 한 게 한 달 전이었다.
남편은 종종 에르윈이 기사 일을 하기엔 좀 아까운 사람이라고 했다.
배움의 높이로써의 지적 능력 말고, 행동하고 일하는 면면에서 느껴지는 타고난 지적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돈이 있어 공부를 했다면, 훨씬 더 나은 일을 했을뻔했다고 아까워했다.
남편을 통해 사정을 알게 되신 사장님은 성실하고 똑똑하게 일 잘하는 직원을 도와주셨다.
일단 그 종합병원으로 와이프를 데려가 수술을 받으라 하셨다.
일부는 사장님이 개인적으로 그냥 도와주셨고, 다른 직원들하고의 형평성도 있고 하니, 일부는 앞으로 일하며 월급을 차감하는 방식으로 갚아 나가게 하셨다.
에르윈은 사장님 앞에 어디인지도 모를 고향 시골의 땅문서들을 가져와 드렸다고 한다.
얼마 할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곳이지만,
자신의 전 재산을 사장님께 드리고, 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일하겠노라며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얼굴을 알지 못하는 사이였어도 이런 황당한 얘기를 들으면 놀랐겠지만,
안면 있는 에르윈 가족에게 일어난 일은 그냥 혀 한번 차고 흘려 넘길 만한 남 얘기가 아니었다.
일 년에 한 번 회사 창립일, 전 직원들과 그의 가족들 모두 한국의 에버랜드쯤 되는 이나라 놀이공원에 초대해 다 같이 얼굴을 보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날이 있었다.
몇 년간 그 행사에 참석하다 보니, 에르윈의 아내도 예쁜 딸아이도 얼굴을 아는 사이가 되었다.
현지 직원들과 그들의 가족들로 가득한 그곳에서 나와 우리 아이들은 좀 튀는 모습의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매년 만날 때마다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 줬는데, 에르윈의 아내와 아이가 특별히 우리를 환대해 줬었다.
아내는 수술을 마치고 입원하고 있었다.
복수가 계속 찬다는 얘길 전해 들었다.
그 병원은 하필 당시 내가 살던 아파트 바로 옆이어서, 베란다나 창문을 통해 병원이 보일 때마다
상태가 어떤지.. 나아지고는 있는지.. 걱정스러웠다.
얼마 후, 에르윈은 아내를 퇴원시켰다.
그리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아내는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다.
이미 손 쓰기엔 늦은 시기였고, 수술을 했어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건, 남겨진 딸애 얼굴이었다.
큰 애보다 서너 살 많았던 그 애도 아직 어린 나이였고, 그래서였는지 난 그 애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슈퍼주니어 팬이었던 그 애를 큰 딸애와 함께 콘서트 장에 데려 간 적도 있었다.
당시에도 운 좋게 지인 편에 두 장의 티켓을 얻었고, 슈주 팬이라 했던 말이 기억나 물어봤었다.
너무 좋아 웃음이 떠나지 않던 그 애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실 당시 우리 딸애는 슈주 노래도 많이 알지 못했고, 특별히 팬도 아니었다.
콘서트 장에 간다는 사실이 더 좋았던 어린애였지만, 에르윈 딸은 달랐다.
너무나 소원하던 자리였고, 쉽게 갈 수 없는 공연장이었기에 너무도 고마워했고, 즐거워했다.
와이프를 떠나보낸 이후로도 에르윈은 성실히 일하며 사장님께 진 빚을 갚아나갔다.
그리고 인생은 예측불허, 좀 의외의 상황도 일어났다.^^;
둘째 아들이 큰 애가 다니는 학교 유치원으로 입학하게 된 이후, 둘째 아이를 픽업하러 학교를 들락거리던 에르윈은 능력 좋게도 아이의 유치원 반 보조 선생님과 재혼을 하게 되었다.
둘째 아이가 중매쟁이 노릇을 한 셈이었다.
임신하고 핏덩이를 병원에서 데리고 나올 때부터 보아왔던 시간 때문인지, 에르윈은 유독 아이들을 챙기고 예뻐했다. 이런저런 건 조심해라, 이런 나쁜 애들 있는데 그러지 마라 같은 말도 종종 하곤 했다.
아이들도 워낙 어려서부터 봐왔던 아저씨이다 보니 잘 따랐고 나 역시 이런저런 일로 속 썩이는 다른 집 기사들 얘길 들으며 성실하고 믿음직한 에르윈이 참 고마웠다.
몇 년 전 그는 회사를 그만뒀다.
이곳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회사를 축소하게 되었고 당시 인원 감축을 위해 명퇴 신청을 받았는데, 생각지도 않은 에르윈이 신청을 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사장님과 남편도 놀랐지만, 에르윈과 얘기를 나눠본 끝에 결국 보내주기로 결정을 내렸다.
쉽게 결정했을 사람이 아니었다.
꽤 깊은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곳은 노동법이 꽤 잘 되어있는 편이라, 함부로 해고를 할 수 없고, 회사를 그만두게 될 경우 받는 퇴직금의 금액이 꽤 크다고 한다.
회사나 공장을 운영하는 분들 중에는, 회사가 어려워 정리하고 싶어도 직원들 줄 퇴직금이 어마어마해서 그만두지도 못하고 고심하는 경우도 있다. (아주 일부는 그것 때문에 쥐도 새도 모르게 야반도주를 하기도 한다)
회사는 명퇴 신청을 받으며 약간의 퇴직금 협상을 했고, 직원 입장에서도 월급만으로는 만질 수 없는 큰 목돈을 한 번에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에르윈은 매달 받는 월급으로 회사에 돈을 갚아나가야 하는 시간보다, 일단 퇴직금으로 한번 정산을 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낫겠다는 계산을 한 거였다.
그 전년도에는 딸애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대학을 가고 싶어 하는 딸 때문에 고민하기도 했었다.
공부도 잘해서 성적은 되지만, 대학에 보낸다는 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딸애는 자기가 돈 벌어 가겠다며 취직해 일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름 머리가 복잡했던 거 같다.
무엇보다 갚아야 할 빛이 있는 상황을 빨리 정리하는 것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에르윈에게 익숙해져 있던 나와 아이들은 안된다며 반대했다.
우리가 반대한다 한들 아무 소용도 없었지만, 다른 기사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며칠 동안 나도 머리를 굴려봤다.
ㅣ회사를 그만두게 하고 우리가 개인 기사로 채용할까...
ㅣ퇴직금 받고 회사 그만두고 정산 끝내고, 다시 회사에 취직하라고 하면 어떨까...
개인 채용은, 에르윈 입장에서 좋은 조건이 아니다. 회사 기사가 되면 최소한 직원 병원비나 퇴직금, 최저 임금제 같은 법적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걸 포기하고 그냥 내가 주는 월급만 받으라 할 수는 없었다.
다시 회사에 취직하는 건, 너무 속 보이는 짓이라 했다.
떠난 직원들에게도, 남아있는 직원들에게도 떳떳한 모습이 아니고, 그게 된다면 다른 직원들도 모두 그렇게 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고심 끝에 이런 모든 경우와 이유를 사장님과 남편에게 설명한 에르윈은
일단 그만두고, 다른 곳에서 일하다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픽업하고 오는 날도, 애들한테 고등학교 갈 즈음 다시 올 거라고 했다고 한다.
"엄마 에르윈 아저씨한테 왓챕 왔어"
아직도 가끔 큰애 왓챕을 통해 소식을 전한다.
공부 잘하고 있냐.. 잘 지내고 있느냐며 아이들 소식을 물어온다.
이곳에서 가장 긴 시간을 함께했던 현지인 에르윈은
이곳 사람들에 대한 나의 적잖은 편견을 바꿔놓은 첫 번째 인니인 이었다.
* 재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실 좀 놀라긴 했다.
와이프를 보낸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시점이어서 내 기준에서는 좀 실망스러운 결정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곳은 법적으로 몇 명의 아내를 가질 수 있는 나라다.
우리와는 다른 문화의 시선으로 받아들여야 할 문제인 거다.
유치원생이었던 아들은 종종 집에 돌아와 보조 샘이 자기만 사탕을 많이 줘서 먹었다고 말하곤 했는데,
이유 있는 사탕이었다는 걸, 조금 더 커서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