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재질?

2부: 고백을 위한 언어 (글을 쓸 때 비로소)

by 비니루

저는 오랫동안 저 자신을 '깨진 유리' 같은 질감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속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지만, 그만큼 사소한 충격에도 쉽게 금이 가고 깨져버리는. 그리고 한번 깨지고 나면, 그 날카로운 파편은 의도치 않게 저 자신과 타인을 향해 뾰족함을 드러냈죠. 저는 저의 그 뾰족함이 저의 연약함이 남긴 상처라고만 여겼어요.


하지만 저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특히 상담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 저는 새로운 비유를 얻게 되었어요. 그것은 '깨진 유리'가 아니라, '바람이 통하는 안전 철장'이라는 견고한 이미지였죠.


깨진 파편의 뾰족함이 아니라, 저를 지키기 위해 단단하게 세워 올린 '경계'이자 '힘'이라는 것이었어요. 중요한 것은 그 철장이 꽉 막힌 벽이 아니라,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바람이 통하는' 틈을 가졌다는 점이었죠.

그것은 거대한 인식의 전환이었어요. 저의 '질감'을 다르게 보게 된 것이죠.


마치 누군가 '삶의 해상도를 높이는 것'이 나이 듦의 과정이라고 말했듯이, 저의 뾰족함을 '깨진 유리'라는 저해상도의 뭉뚱그려진 이미지로만 보다가, '저를 지키는 견고하고 유연한 경계'라는 고해상도의 선명한 '무늬'로 보게 된 것과 같았어요.


이 깨달음은 다른 감정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슬픔'이라는 거대한 감정의 덩어리(분자)를 예로 들어볼까요?

예전에는 그저 '슬프다'는 질감에 압도되었다면, 이제 저는 그 안을 들여다보며 '슬픔의 입자'들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어요.


이 입자는 '서운함', 저 입자는 '그리움', 또 다른 입자는 '억울함'이라고요. (<슬픔의 이름 붙이기>라는 책 제목처럼 말이죠.) 그렇게 감정의 입자들을 명료하게 알아차릴수록, 저는 더 이상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것은 저의 첫 에세이 제목이었던 <고인 물은 바다가 된다>는 은유와도 맞닿아 있었어요. 저의 '불안'과 '상처'는 저를 정체시키는 '고인물'처럼 느껴졌지만, 그 바닥을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이름을 붙이는 과정을 통해, 그것은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다'가 될 깊이를 얻어가고 있었죠. 그 깊은 물(상처)에 뿌리를 내린 연꽃이 더 고귀하게 피어나는 것처럼요.


어떠한 사회의기준은 '딱딱하고 획일적인 기준'이라는 재질이였어요. 납작했어요.


돈을 차곡차곡 모으는 것.


모두가 말하던 그 기준은 마치 진실처럼 들렸죠. 통장 잔고는 성실함의 증거였고, 소비는 무모함의 증표처럼 느껴졌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불안할 때마다 무언가를 채웠어요. 꼭 필요해 보이는 장비들, 저를 더 괜찮아 보이게 할 도구들, 그리고 마음이 조금 안심되길 바라는 소비들. 그렇게 어영부영 흘려보낸 돈들과 시간들. 돌이켜보면, 그건 기준에 맞추려던 소비가 아니라, 저를 붙잡으려는 감정의 몸짓이었어요.


서른이 가까워졌을 무렵, 저는 그 사회적 잣대에 닿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다급함은 사라졌어요. 대신,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불안이 밀려왔죠.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나는 왜 이렇게 된 걸까?”

그런데 그 불안의 중심에서, 저는 아주 낯선 감각을 느꼈어요. 기준에서 조금씩 멀어지자, 처음으로 제 안에서 울리는 파동이 들렸거든요. 느리고, 낮고, 흔들리지만 분명히 저만의 리듬이었어요.


저는 지금, 그 잣대 대신 저의 파동을 따라 걷고 있답니다.


이제 저는 알아요. 이 모든 과정이 저만의 고유한 '별자리'가 되어가는 여정이었음을.

이것은 저만의 특이한 이야기가 아니라, 상처를 성찰하여 승화시키는 '보편적'이고 '원형적'인 이야기일 거예요.


그래서 저의 이 '무늬'가, 밤하늘의 별자리를 올려다보는 누군가에게 작은 '공명'을 일으킬 수 있기를, 저는 간절히 바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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