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흉내 내지 않아도 괜찮아
미국 현지 영어 이야기
난 대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 직장을 따라 경기도 안산으로 이사를 갔다. 전학 간 학교에서 첫날, 그전까지는 전혀 느껴보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내가 말 한마디를 할 때마다 반 아이들이 계속 웃었던 것, 대구 사투리가 진하게 섞인 나에게 다가와 한 번만 더 얘기해보라고 신기해했다. 놀린다기보다는 반 친구들은 정말로 신기해했다. 난 한 순간에 '시골에서 온 애'가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 큰 백화점 하나도 없었던 안산이 나에겐 더 시골 같았지만 친구들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괜히 주눅이 들어 사투리를 하루라도 빨리 고치려고 애썼고, 부모님이 어색하다며 집에서는 사투리 써도 괜찮다고 할 정도였다. 여하튼 내 신기한 사투리 덕분인지 난 친구들을 금방 사귀어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미국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고치고 싶었던 건 내 한국식 억양이었다. 한국에서 영어 공부를 나름 부지런히 하긴 했지만, 서른에 미국에 첫 발을 들인 난 여전히 한국식 억양이 꽤 남아있다. 처음엔 빨리 고치고 싶어서 미국식 발음 훈련 책도 사고 따라 했는데, 친구가 왜 굳이 너 악센트를 바꾸려고 하냐고 되물었다. 내 억양이 그렇게 강한 편도 아니고 어디 출신인지 감이 안 온다고 했다.
"너 만의 독특한 억양이 있는 것 같아서 좋아. 굳이 미국식을 따라갈 필요는 없고 여기 사람들도 미국 사투리 써" 라며 웃으며 얘기했다.
내가 이름에서부터 억양까지 이방인임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덕인지 일하기 시작한 처음부터 정말 많은 도움을 이곳저곳에서 받았다.
미국인이 영어를 들을 때 잘 알아듣는 기준은 '적절한 표현'이지 억양(accent) 자체는 크게 문제가 안 되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그렇지 않나? 부산에서 30년을 산 사람이 서울에 가서 얘기할 때 소통에 큰 문제가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때로는 익숙한 서울말보다 부산 사투리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억양은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다양하다. 나이트 쉬프트 간호사 중 텍사스 출신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 사람 이름 보다도, "southern accent lady"로 얘기하는 걸 들었다. 아마 반대로 여기 출신이 다른 미국 지역에 가면 "midwestern"이라는 얘기를 들을 것이다. 외국인의 억양은 그것대로 수많은 억양 중 하나일 뿐이다.
내가 일하는 곳은 트레블 널스나 외국인 간호사 비율이 높은 편이다. 의사들은 인도 출신이 꽤 많다. 인도나 아프리카에서 온 동료들은 정말 억양이 강하지만 미국에서 나고 자란 현지인들도 찰떡같이 잘 알아듣는다. 특히나 다양한 문화에 노출이 많이 된 미국인일수록 더 잘 이해한다. 미국 동부에서 서부를 횡단하며 여행을 즐긴 사람이, 인구 100명도 안 되는 정말 작은 동네에서 자라 그 동네를 벗어나지 않는 사람보다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고 서로 간의 차이에도 관대한 편이다.
타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인정하려 들지도 않는 사람이 있다면 굳이 그 사람을 위해 나 자신을 맞출 필요는 없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로 새로운 문화에 관심 가지고 귀 기울이는 사람이 훨씬 많다. 한국인으로서 영어를 접할 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은 한국어는 주로 한국에 거주하는 사람들만 사용하지만, 영어는 전 세계의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이고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뚜렷하게 정의 내리기도 어렵다. 어떤 영어가 맞다고도 말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굳이 어떤 한 틀에 나 자신을 맞출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미국에 와서 처음 영어 이름을 만들까 고민했던 적이 있다. 내 이름이 미국인이 발음하기도 좀 어렵고, 줄여서 한 단어로 하기에도 애매해서였다. 계속 고민하다가 시간은 흐르고 그냥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내 한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나 공식적인 기록에는 항상 철자를 두 번씩 불러줘야 하지만 그 이후로는 크게 불편한 것도 없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 중엔 더 길고 복잡한 영어 이름도 많아서 그런지 이제는 더 이상 영어 이름의 필요성도 크게 못 느끼며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내 정체성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