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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콩 Oct 26. 2016

께베메르에 괴물이 나타났다.

덴마크부터 께베메르까지 걸어온 청년의 이야기


 여행의 가장 매력적인 포인트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관광지, 새로운 광경 이런 것들도 물론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만 대부분의 관광지는 사진으로 보는 것과 같다는 것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그냥 보는 것에 대한 흥미보다 '낯선 곳에서 만난 어떤 누군가의 스토리'가 더욱 나에게 큰 의미로써 받아들여져 온 것이었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곳에서 지내며 여행을 하지 못했지만 다양한 세네갈 사람들을 만나며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욕구를 충족하던 무료 하면서도 무료하지 않았던 요즘이었다. 그러던 중 어제 늦은 오후 께베메르에 괴물이 덴마크로부터 걸어왔다. 꼭 아기가 타고 있을 것 만 같은 카트에  덴마크에서 온 charlie라는 친구의 이야기다. 어쩌다 보니  께베메르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엄청난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나는 그를 집으로 초대해 간단한 저녁을 대접할 수 있었다.

그는 내게 덴마크에서 걸어왔다는 놀라운 스토리로 본인을 소개했다. 올해 28세의 나이인 charlie는 2015년 5월 27세의 생일날 시작한 이 여행은 덴마크로 시작해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사하라 사막, 모리타니를 거쳐 이곳 세네갈로 온 것이다. 스페인에서 아프리카 대륙으로 넘을 때 탄 배를 빼곤 오로지 두발로 걸어서 왔다는 것이다. 나도 한때 필리그림으로 불렸지만 또 다른 색깔의 필리그림을 만나니 존경스러운 마음, 반가운 마음, 새롭고 설레는 마음이었다. 까미노길을 걸어봐서 알지만 저 카트를 끌고 걷는다는 것은 보통 정신력으로는 이겨 낼 수 없다. 7키로의 배낭만 매고 하루에 30키로 정도를 걷는다는 것 또한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더운 아프리카에서, 지난 우기 동안의 우기는 더욱 그러하리라.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사하라'라고 대답했다.


 그는 몇 년 전 탄자니아 방문을 통해 식수 사정이 매우 좋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단다. 수십 키로의 거리를 걸어 가 물을 길어야하고 또 그 물을 길어 수십키로를 걸어와야하는 마사이 부족의 모습들을 바라보고 이 여정을 결정 했다고 한다. 관광사업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냐는 나의 질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자니아 안에서 마사이 부족이 특히나 사정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탄자니아의 많은 사람들이 물을 길러 가기위해 30~40Km를 걷는 것을 보고 walking for water라는 아이디어를 짠것에 대해 대단하다고 생각 했다. 그런 이유로 덴마크에서 일하던 저널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결심한 것이다.  덴마크에서 시작한 이 필리그림은 탄자니아가 도착지이다. 내가 생각한 도네이션과 아프리카 개발 방법론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시선에서의 도네이션과 개발에 대해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는 작은 기업들이나 개개인의 후원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물론 그의 여정을 후원하는 것은 그 어떤 문제도 되지 않는다.) 큰 글로벌 기업으로부터 후원을 받아 제대로 된 식수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곳에서 몇 미터의 수도를 끌어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도울지에 대해 나름의 플랜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행적들이 미디어를 통해 홍보가 되고 또 이슈가 되어 기업으로부터 스폰을 받는것이 그의 목적인 것이다. 나는 항상 개개인 적인 문제를 마주했다면 그는 아주 기본적이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바라봤다는 것이 새로운 시각이었다. 후원을 기다리지만 말고 제안서를 써보는것이 어떻겠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이미 여러번 시도해 봤지만 아직 어떤 수확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포르투갈 등에서 TV인터뷰를 하는등 많은 일들이 있었고 또 앞으로 남은 시간동안 희망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미디어를 통해서라던지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의 행적을 조금 더 현명하고 확실하게 홍보를 할 수 있거나 그의 식수 시스템 사업을 돕기위해 해 줄 수 있는 조언이나 아이디어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좋겠다.

http://walkingforwater.dk/



 얼마 전 한 가정의 집이 우기로부터 무너져 펀딩을 준비한 적이 있었다. 이곳 로컬 화가 친구의 그림을 작은 엽서 사이즈로 만들어 동네 꼬마 아이들을 모아 손편지를써 한국에 각 구매자에게 편지를 붙여 발송하는 프로젝트였다. 클라우드 펀딩을 통해 판매해 수익금을 모아 그 가정을 도와주려 했었다. 우연히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면 그의 그림을 전시해주겠다는 미술관도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범했던 실수는 나의 월로프어 실력이 너무 미비해 제대로 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가정은 그 집을 새로 짓는 것이 필요했지만 이후 월로프어가 가능한 친구를 데려가 통역을 부탁했을 때 그들은 다른 집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소통의 부재가 얼마나 많은 상황을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여하튼, 그 프로젝트는 여전히 필요한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보류하기로 했다. 이 사례들을 이야기하며 그에게 많은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려반, 걱정반 또 그 또한 그들과 제대로 된 소통을 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또 그의 조금 더 깊은 생각들이 궁금했던 것 같다. 나는 당시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큰 기업으로부터는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나의 견해였다. 한 가정이 기업으로부터 홍보나 광고에 쓰임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기업과 연계하는 시선이 좋지 않다고 했더니 그는 그것이 왜 잘못되었냐고 되려 내게 질문을 던졌다. 한참 뒤 생각해보니 다는 개개인의 문제를 해결해주고자 했고 그는 한 마을의, 한부족의 식수문제를 해결해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선 펀딩의 방식이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작은 기업들이 아닌 큰 기업들로부터 스폰을 받으려 하는것이 아닐까? 어중이 떠중이식의 스폰은 되려 잘못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발론티어 프로젝트에 대해 사람들이 오로지 본인의 커리어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든다. 그런 내게 그는 '왜?'라고 다시 되물었다. 그것이 무엇이 문제냐는 것이다.  커리어로 사용되는 것은 문제 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순간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프로젝트를 통해 경제적인 이유로 본질이 많이 바뀌는 경우를 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항상 너무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좋은 의미로 시작한 일이 결국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 스며들어 변해버린 의미가 쓸쓸해 보였다. 여하튼, 우리는 참 다른 사고와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다시한번 했다. 이런저런 당황스러울 수도 있었을 나의 질문에 그는 확고하고도 똑 부러지게도 대답을 해준 charlie였다.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청년 셋이 모여 간단한 갈치구이에 육개장과 함께 간단한 한국식 식사를 한 후 우리는 옥상으로 향했다. 돗자리를 깔고 내 삶에서 그 어디에서보다 아름다웠던 아프리카 하늘의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며 우리의 사랑스러운 맥주와 함께 다양한 장르의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연애 이야기로 시작해 아시아 관계, 덴마크를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반도, 아프리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개도국의 개발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나는 한국의 급진적인 발전의 문제에 대해 야기했고 물론 잘 살고 누리는 것은 좋으나 우리가 당장 몇백 년만 살고 멸망할 것이 아니라면 천천히 정말 소중한 것을 잃지 않고 발전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봉사단으로써 이곳에 와 생활하지만 사실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에 대해 배우러 온 것이 더 확실하지 않냐는 말에 모두 공통된 마음으로 공감했다. 발전과 개발, 경제적인 것에 너무 집중되어 우리가 '한 사람'으로써 존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나는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그런 이유로 아프리카만큼은 선진국들이 에너지나 자원들을 뺏어가기보다 '휴머니즘'에 맞춘 개발로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이 바로 국제개발의 목표가 아닐까 생각해 봤다. 끊임없이 달랐던 우리의 견해에도 이 부분에서 만큼은 그는 내게 반짝이는 눈으로 공감해 주었다.  


 그는 떠나기 전 내게 몇 가지의 질문과 함께 인터뷰를 했다. 각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있다고 했다. 세네갈에서 한국여자애의 인터뷰를 한다고 생각하니 세심스래 재미있었다. 이곳 서아프리카에서 작디작은 티 도안 나는 작은 마을에 사는 한국에서 온 여자아이와, 덴마크에서 이곳까지 걸어온 동갑내기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사실 확률적으로 어려운것이 아닐까? 여하튼, 몇 가지의 질문 중 첫 번째 질문이 어떤 것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종종 행복에 대해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또,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그 상황과 어떤 케이스였는지 도무지 떠오르지도 설명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어떤 상황에서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할 때 행복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젯밤의 행복은 옥상에서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빛에 의지해 우쿨렐레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함께 했던 순간이 최근의 가장 큰 행복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너무 먼 미래를 바라보다 보면 당장의 행복은 쉽게 놓치게 되고 미래의 행복에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여러 가지 질문들 중 첫 번째 질문이 가장 기억이 나는 질문이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께 나 또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은 어떨 때 행복을 느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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