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뚜밥의 오늘의 단상
최근에 인터넷을 끊은 탓도 있지만 글쓰기가 선뜻 망설여지는 시기였다. 께베메르에괴물이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쓰고 난 이후로 두 가지 반응을 볼 수 있었다. 우물을 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케이스와 어떻게 그렇게 걸을 수 있냐는 반응들이었다. 한 개도국 국가에 우물을 만들어 줬더니 아낙네들이긴 거리 물을 길어 오고 가고 했던 시간이 그나마 친구와 수다를 떨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가까운 곳에 우물을 파고나니 남자들이 다른 일을 시키더라라는 사례였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럿 사람들이 내게 그 이야기를 하며 우물을 파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것인가에 대한 논점을 제시했었다.(결코 그 논점제시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릴 때 4년이라는 시간을 먼저 산 나와 동생이 잦은 비교로 스트레스를받아 할 때 해줬던 이야기들이 있었다. 비교라는 것은 모든 경우의 수를 같게 한 후 한가지만을 다르게해서 비교를 해야 확실한 비교치를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물을 판다는 그의 이야기에나는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그들의 사정을 다 알고 있는지 거듭 물었던 것이다. 어떠한 사례한가지를 가지고 그 사업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기가 쉽다. (그가 사업을 진행하려는마을의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해했다는 가정하에)나는 그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자기 신념을 가지고 걸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인 것 같다. 1년5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걸으며 또 걸으며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길 좋아하지 않는 그의 성격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했을지 또 홀로 신념이 오락가락한일도 물론 있었을 테다. 하지만 그 긴 시간 걸으며 적어도 이 사업이필요하다고 여겼기에 여전히도 그는 걷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이렇듯 참 타인의 시선과 말들을 이겨내는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타인의 말 한마디가 신념을 흔들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고 의지가 흔들릴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최근에 내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로 뒤죽박죽 엉킨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며 내가 가장 힘들었던 부류의 사람은 바로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딱 1일정도 만나는 것이 편하다. 그 이상의 시간을 함께 하다 보면 내게스트레스가 고스란히도 전해져 온다. 사람들은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 하면 착한 사람일 것이라 단정짓기쉽지만 사실 내 기준에서 가장 못 땐 사람이다. 스스로를 착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거짓된 말을 하고또 스스로가 착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타인의 입 속에서 나쁜 말이 나오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확실히도첫 인상에서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한 사람은 자칫 인상을 찌뿌리기가 쉽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그의 의지와 신념을 알고 나면 존중하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은 타인의시선을 너무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스스로의 신념과 의지가 확고하지 않은 경우가 꽤 많다. 께베메르에방문했던 괴물, 샬리를 만났을 때 호기심으로 시작되었지만 그의 확고한 의지에 의사소통을 할 때 답답함이있었다. 물론 내 말에 동조해주지 않은 그가 밉기도하면서 대화가 재미있기도 했다. 그는 내 의견에 또렷하게도 의사를 밝혀주는 것에 대해 오랜만에 소통을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는 상반된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낯설고 서툴기도 하다. 고등학교 3년동안 독서토론회 동아리에 들어있었다. 당시 토론회를 진행하며 다들의사가 뚜렷한 아이들만 모여서인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하지만 게 중 가장 즐거웠던 것은 나의 의사를분명하게 표출한다는 것이었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내 의사를 또렷하게 표출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가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얼마전 한 한인 분의 초대로 그분의 여자친구분인 스페인 적십자에서일하는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맥주를 한참 마시다 와인의 제안에 “아무거나 좋아요”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그 여자친구분은 혼란이 왔다. 아마도 속으로 ‘대체 와인이좋다는 거야 맥주가 좋다는 거야!?’라고 생각을 했을 테다. 나는그녀의 계속된 질문에 결국 ‘와인이 먹고싶어요’ 라고 대답했지만또렷한 의사전달을 하는 것이 서툰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항상 어른들이 말하는 ‘튀지마라 튀면 손해 본다’라는 말 때문인지 무채색의 내가 되기 위해부단히도 노력하며 자라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기관과 이야기 할 때도“이렇게 하고 싶어요”라기보다 “아무래도 좋아요”라는 내 말속에 기관사람들은 나의 말을 더욱 우습게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의 인권을 내가 무너뜨렸던 것이다. 우리는함께 살아가기 위해 타인을 존중해야 하지만 타인의 눈치를 보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또렷하게 말하기가 어려운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타인의 비판이 아닌 조언은 감사하게 받아들이되,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고있을 찰리와 같은 청년들을 응원하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