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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콩 Oct 24. 2016

1주년의 단상

더이상 하얗지 않은 하얀세네갈래의 이야기


영원히 오지않을것 같았던 시간이 왔다. 얼마전 이곳으로 와 정착을 하고 울고 웃고 많은 일들이 있었던것 같다. 화가나는일도 많았고 홀로 서럽게도 눈물로 보낸시간도 많았다. 또 함께 웃고 자지러지게 행복한 시간도 많았다. 서럽고 슬펐던 시간도 나의 시간이었고 자지러지게 웃음으로 함께한 시간도 나의 시간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따로 없었지만 최근 이유모를 스트레스로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것이 겉으로 들어나 10월 한달은 아파서 내내 골골대는 시간들이었다. 2014년 완치했던 갑상선이 재발하는듯 증상들이 나타나 병원에가 검사해보는 헤프닝도 있었다. 다행히 수치가 정상으로 나왔고 피로감과 날씨탓으로 돌릴수 있었다.  나만의 긍정에너지가 그 빛이 희미해져가는 순간들이었다. 2015년 9월 24일, 1년뒤에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었다. 아마도 2015년 9월 24일에는 지금의 나보다 더 현명하고 어른스러웠나 보다. 지나간 시간에 내 기억속에 남은 편지의 내용은 '혹시 버티고 있다면 그것이 내가 원하는 길은 아니니 그만 한국으로 돌아가렴'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2016년 10월24일에 읽은 편지에는 그 내용보다 다른 내용이 더욱 마음에 와닿았다. "너무 욕심 부리지마. 흘러가는대로 내버려두렴" 이말이 왜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와닿았다. 자연스럽게 스며들고싶었는데 가끔 나도모르게 억지를 부려 스트레스를 만들어내는 일이 종종 있었다. 관계도, 일도 자연스레 두면 될것을 자꾸만 억지를 부리니 일이 더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나의 욕심으로부터 비롯됨인것이다. 예전에 여행중에 만난 일본에서 온 히로미라는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곤 했는데 우리는 그 책에서 나오는 'Maktub'에 대해 매우 큰 공감을 했었다. 마크툽은 사실 아랍어로 '이미 쓰여졌다'라는 뜻이지만 우리는 그 뜻을 종교를 벗어나 모든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운명이라는것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이루어질 일은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예를 들면 오늘 내가 수도를 가야하는데 그어떤 차도 없고 히치하이킹도 안된다면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오늘 수도를 갈 수 없는 운명인것이다. 하지만 차가 한대도 없었지만 내가 꼭 수도를 거야하는 운명이라면 어디선가 차가 짠!하고 나타날것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일어날 같은 상황이지만 스트레스를 받고 화를 내는것이 아니라 생각을 조금만 바꾸어보면 스트레스가 없는것이다.  어찌보면 이곳 사람들이 말하는 미래는 신만이 안다는 뜻의 'inchalla'와 비슷하긴 하지만 또 물론 한국인의 정서와 잘 맞지 않는 마인드지만 그 운명론은 결국 될일은 다 되더라 라는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 포기를 했을 때 큰 사고를 피한 경우도 종종 있었고 말이다. 내가 욕심부린다고 되는 일은 없다. 일전에 누군가의 '너가 그것밖에 안되는 사람은 아니었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예전엔 그것밖에 안되는 사람이 되지않기 위해 억지를 부리며 나를 괴롭혔다면, 이제는 '응 당신이 그렇게 바라본다면 나는 그것밖에 안되는 사람이에요'라고 말 할 수있는 내 자신에대한 애정이 생긴것이다. 타인의 기준에 맞추기위해 내 자신의 치부를 숨기고 스스로를 질책하고 싶지 않아진것이다. 타인이 내게 실망했다면 나는 그것밖에 안되는 사람이었음을 인정하게 된것이랄까. 여튼 이런 낙천적인 사고를 시작하고 부터 꽤 많은 스트레스 수치를 낮출 수 있었다. 하지만 예전의 완벽주의적 사고가 종종 튀어나오며 내 자신을 종종 괴롭히기도 했다. 이많은 짜증과 피로감 괴로움은  우기가 끝나고 건기가 찾아오며 뒤늦게 찐더위가 찾아온 탓도 있으랴.


봉사단원으로 파견되 꽤 많은 생각들을 가졌던 시간이었다. 먼저, 봉사단원이라는 단어의 문제점이었다. 봉사라는 이름으로 내가 이들을 꼭 케어라도 해줘야하는 것 마냥 사고가 생겨져 오는 것이었다.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공생하는것이 아니라 내가 우월하기라도 하듯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게끔 했던 것이다. 차라리 저보수 공생사업정도가 어떨까 생각을 했다. Volunteer라는 뭔가 자진해서 한다는 의미보다 봉사라는 말이 내 머릿속에 편견이 있었던 것 같다. 나의 무지함에서 오는것일 수도있고 많은 이들이 가진 편견일수도 있다. 그래서 초반에는 한국 정부로부터 이곳에 도와주러 왔다는 인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그로인해 기관사람들에게 "도움"이라는 잦은 단어로 무례한 말들을 뱉았을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사실 세네갈래들은 우리가 저보수로 이곳에 자진해서 왔다고 생각하기 보다 "우리보단 돈 많은 일하러온 외국인"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현지인들이 버는 보편적인 보수에 비해 꽤나 안정적인 생활비와 주거비를 받는것 또한 사실이다. 한국에서 벌던 돈에비해서는 턱없지 적은돈이지만 이곳 실정에서는 결코 적은돈이 아니다. 그 관계에서 스스로 사고의 마찰이 잦았던 것 같다. 나의 존재에 대해 내가 해야하는 일이 어떤것이 있고 나의 포지션에대해 많은 혼란이 있었다. 1주년을 맞이해 집을 이사하려 했었다. 내가 가진것들에 대해 다 놓아보고 싶었다. 지난1년간 안전 문제로인해 아무래도 동네에서 꽤 튼튼하고 좋은집에서 머물었고 살아왔던 습관들 때문에 내 삶에는 너무 많은 잡다한것들이 필요했다. 깨끗해야하고 세탁기를써야하고 많은 전기를 써야하고 등등.  남은 1년은 조금더 이들과 가까운곳에서 살아보고싶다 생각했지만 쥐4마리의 습격덕분에 마음이 싹 사라졌다. 아직 많은것을 내려놓기엔 너무나 부족한 사람인가보다. 더구나 주변 친구들의 말이 어리석은 나의 고민을 그만하라 했다. 한국에서 크게 다르지않은 이곳에서의 삶이 조금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요즘에 이사는 아쉽게도 무산되었지만 다른것들로 하나씩 줄여나가보기로 했다.

 

이곳에서의 삶을 통해 많은 생각의 변화가 있었다면 한국에서의 나는 정말로 욕심꾸러기였구나 라는 것이다. 내 삶에는 많은것들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되게 많은 짐들로 내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에서 한 기사로 1년동안 옷을 한벌도 구매하지 않은 가족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들의 1년삶에는 옷을 사지 않았음에도 다떨어진 옷을 입거나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무의미한 쇼핑을 하며 살아가고있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우리는 마음의 욕구를 채우기위해 마음이 부족한지도 모르고 어깨에, 등에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살아가는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사실은 물건을 사고 치장을 하는 등 물질적인 것들로 채울수 없는 것인 우리의 마음을 먼저 채워야 하는데 말이다. 한번도 내 자신이 부유하다고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이곳 세네갈에서 내가 가진것들을 바라보며 부족한 마음에 부끄럽다고 느꼈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나름 한국에서 몇달씩 핸드폰을 안써보기도 하고 기계나 물질만능에서 멀어져 보겠더며 공생하고싶다고 그렇게 살아가고싶다고 되뇌었지만 나는 이미 가진것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지고싶은것이 너무많은것이 부끄러웠다. 사람과 사람을 대하는 법보다 기계와 소통하는법에 더 능통했다. 남은 1년는 기계와 소통하기보다 사람과 더많이 소통하고 살아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1주년이 다가오자 설렘반 짜증반 화남반이었다. 10개월차가 지날때 쯤 옆집 꼬맹이들이


"빈따 언제 한국 돌아가?"

"내년 10월! 왜?"

라는 말에 서운하다며 가지말라며 엉엉 우는 마미의 맘씨에 괜스레 씁쓸하고 벌써 이별이야기하는 그들이 야속하기도 했다. 지난1년은 어디에 홀린것마냥 눈깜짝하니 지나가 있었다. 하지만 괜스레 리셋되어 1년이라는 시간을 다시 시작한단 이상한 사고에 화나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1년전에도 2년전에도 어떻게 살고싶냐는 이름모를 사람들의 질문에 한결같이 "지금처럼"이라고만 대답했다. 남은 1년도 딱 지금처럼만 지내다가 떠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1년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뿌듯해 했으면 좋겠다. 여전히 변하지 않고 나로써 잘 살아가고 있다고. 그리고 1년뒤에 나에게 또 편지를 써봐야겠다. 수고했다고. 사랑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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