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콩 Dec 16. 2016

유서



지난밤 약 3일을 아팠다. 이게 차라리 몸살이나 고열로 시달림이라면 생각이라는 것을 할 힘이 없었을 테지만, 후두염 증상으로 목과 귀 연결고리쯤에 염증인지 음식을 삼키기가 어렵다던가 무언가가 나를 계속 괴롭히고 있었다. 그래서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뿐더러 기관에서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3일의 휴강을 해주었다. 누워 이리저리 뒤척이다 보니 갑작스럽게도 유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1월에 다가올 여행, 또 세네갈에서 근무를 끝내고 난 후 여행루트를 짜며 더욱 강하게 유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참 했던 것 같다. 최근에 세네갈에서는 한 단원의 큰 사고가 있었고 다행히도 큰 사고임에도 부상이 크지않아 곧 다 나을 예정이지만 남의 일이 아님을 다시한번 실감하는 요즘이었다. 늘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마음으로 지금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지만 내가 떠나고 나면 남겨진 이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꼭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는 늘 죽음 앞에 놓여 있다. 특히 히치하이킹을 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대화에 두렵지만 반가워하는 나의 모습, 또 열악한 교통환경에 쉽사리 노출된 이곳에서는 더욱이나 죽음이 문턱에 줄다리기하듯 서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향후 약 5년 안에 내가 불의의 사고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면, 이런 말들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자필로 쓸 것인지, 메일에 쓸 것인지 어디에 쓸 것인지를 몇 날 며칠을 고민해보니 자필로 쓴 종이는 쉽사리 잃기 쉬울 것 같았고 메일로 보내자니 타살의혹이 있지 않은 이상 누군가가 내 메일함을 정리해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장 안전하고 아주 많이 노출될 듯 되지 않은 곳이 그 어디에도 공유하지 않은 이곳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보았다.



 내가 변화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기 전 몇년전 언제쯤인가, 2D 평면의 정면만 바라보고 끝을 바라보며 살았었다. 하지만 늘상 그 끝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을 놓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끝은 언젠가 다가올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목표를 정하고 그 주변은 전혀 보이지도 않고 그 목표만을 바라보며 시간을 그저 허비할 뿐이었다. 내가 변화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 최근엔 그 평면이 4D가 되어 향기도, 촉감도 주변에 함께 공존하는 것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 그림속에 내가 주인공이었다. 예전엔 그 그림엔 내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림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분명 내가 변화하기 전에 죽음을 맞이했다면 그 어떤 감흥도 행복도 삶의 이유도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세상에 목표라는 것은 존재하지만 그 목표와 내 삶을 바뀐 삶은 나의 삶으로써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었던 것 같다. 늘 내게 질문을 던졌다. "이다음엔?", "그다음엔?", "무엇을 위해서?" 항상 그 물음의 답의 끝엔 죽음뿐이었고 이 삶을 영위하는 이유가 알고 싶었다. 그저 죽음을 향해 살아가기엔 너무 재미가 없고 무기력했다. 삶의 주인공을 목적이나 목표에서 이 순간의 내 감정으로 바꾸고 나니 더욱이 삶이 즐거워졌다. 더 이상 삶의 이유를 찾거나 무기력함을 느낄 수는 없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이야기들을 들으며 두려움에서 벗어날 때마다 새로운 세상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다치지 않을까, 죽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던 탓에 나 스스로를 너무나 아껴댔던 것이다. 여느 양가집 규수마냥 스스로가 스스로를 치마폭에 가두어 세상 밖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변화에 있어서 가장 스스로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은 당장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도록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여나 나의 죽음에 하고자 하는 일이 많았던 욕심꾸러기의 한이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신다면, 걱정 안 하셔도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내 욕구에 내 욕심에 만족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 중 한 명이며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보다 오늘 하루 너무 달달하게 살았노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떠남에 물론 다들 너무나 슬퍼하리라는 것을 알지만 언제나 그랬듯 또다시 새로운 여행에 떠났고 또 그곳에서 여느 때처럼 호기심에 세상 구경 중일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갑작스레 누군가와 어울리거나 갑작스레 누군가와 친분을 쌓거나 시간을 만드는 것에 대해 익숙하지 못했다. 언제나 모든 일에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함께 새로운 곳을 찾는 것은 너무나 서툴렀다. 그래서인지 혼자 놀러 다니는 것이 너무나 편하고 익숙했다. 더불어 두렵기도 했다. 혼자 달려 나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곳에 스며드는 것은 잘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너무 큰 미션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친구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빈 언니는 혼자 내버려두면 알아서 잘혀. 그냥 내버려두어~"(명재 너야.) 혼자서는 무엇이든 잘 개척해 나갈 것 같았지만 누군가와 같이 사는 일, 누군가와 인생을 동행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또 시간이 흘러 노인이 된다면 홀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서글플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적어도 혼자 아프고 싶진 않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독신주의에서 의무적 결혼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20대 후반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누군가와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은 여전히도 두려움이고 의미 없는 만남은 그만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주변 친구들의 결혼 소식에 당황스러움, 부러움, 조급함 이런 것들이 분위기를 타고 몰려왔던 것 같다. 하지만 최근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깔끔하게 정리를 했다. 당분간은 혼자 있는 것이 너무나 좋고 혼자 늙어 죽더라도 억지로 누군가에게 엮이지 않으리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지만 그것은 매년 생일이 다가오고 해가 바뀌고 크리스마스가 오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은 해도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던 나에게 조금 더 그 마음을 존중하고 시간을 주기로 했다. 예전에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혼자 놀러 다니는 일도 하다 보면 지치고 마음이 혼자가 아닌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언젠가 올 거라고. 다만 조금 늦어질지도 모르지만 조급해하지 말고 그 시간이 와서 후회하지 않게 이 시간을 즐기라고 말이다. 


 나는 사랑이 어려웠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너무나 낯설고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나 벅찬, 감히 내가 받을 수 없는 큰 사랑을 받아 봤다는 것이다. 그 사랑을 준 이들에게 매정 한말 나쁜 말 상처들을 주었던 것에 대해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사실 개개인에게 편지도 썼지만 새로 가정을 꾸린이도 있고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서로가 상처가 되는 이도 있기 때문에 전달되지는 않았다. 언젠가 당신들에게 그 편지가 전해질 수 있다면 좋겠다. 당신들이 꼭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함께 사랑을 나눌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했고 행복했다. 당신들이 준 사랑은 당신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잘 알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사랑을 줄 때 조금 더 나도 당신들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 생에서 우리가 함께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축복이고 행복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신들로 인해 나는 성장할 수 있었고 그 사랑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을 감히 말할 수 있다.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것 같다. 당신들은 내 삶에 있어서 성장판의 열쇠였다. 조금도 그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고 당신들을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천운이었다는 것을 꼭 말해주고 싶다. 특히 떠오르는 단 두 명에게 이 이야기들을 전하고 싶은데 그 두 명이 누구인지는 나의 친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친구들이 꼭 메시지를 전해주길 바란다. 


나에게는 소중한 친구들이 있다. 시크하고 쿨하며 애정표현이라곤 참 서툰 친구들이다. 너무 소중한 그들에게 무슨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힘들 때면 늘 곁에 있어주었고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도 결코 외면하지 않고 응원을 해주었다. 나와 맞지 않는 길을 걸을 때도 많은 조언과 질책, 잔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늘 내편이었다. 늘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돌이켜보니 내 주변에는 소중한 사람이 꽤 많았다. 내가 떠나고 나면 때때로 "미친년"하곤 웃어줄 수 있는 친구를 남기고 가서 참 다행인 것 같다. 당장은 슬프겠지만 나를 기억하며 함께 했던 시간들을 돌이켜 보며 웃어줄 수 있을 거란 믿어 의심치 않는다. 너무 많이 그리워하진 않되 잊히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친구라는 존재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울 것 같다 엄청 많이. 나는 늘 가난했던 탓에 친구들이 나에게 많은 것들을 베풀어주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나에게 전달되어 또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내가 했던 봉사나 여행, 선행들은 모두 내 친구, 지인들로부터 나온 마음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싶다. 다시 그들에게 다 되갚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사랑과 도움을 받았다. 돌이켜보니 대학 졸업 즈음, 첫 회사를 퇴사하고 두 차례의 수술을 할 때까지 옆에서 참 많이도 답답하고 화가 났을 텐데 언제나 곁에 있어줘서 너무나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 주고 싶다. 개개인의 메시지는 이 유서가 끝나고 나면 구글 드라이브에 다시 저장을 해야겠다. 내가 죽고 난 후 꼭 드라이브를 확인해 메시지가 전달되길 바란다. (혹시 그곳에 당신의 편지가 있을것이라 생각했는데 없다면 편지를 완성하기도 전에 사망한것이다. 오해하지마라. )


마지막으로, 차마 입에조차 담지 못할 우리 가족들. 얼마나 많이 슬퍼하고 있을지 얼마나 아파하고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떠 나니는 떠나면 그만이지만 남아있는 이들에겐 얼마나 큰 고통이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가까운 사람이 먼길을 떠나고 나면 함께했던 좋았던 시간보다 못해줬던 것, 아쉬웠던 것, 화냈던 것 이런 것들만 떠오르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게 미울 때가 있었던 것 같다. 사춘기 시절쯤. 사실 대학 때까지. 하지만 지나고 보니 엄마, 아빠, 은영이까지 나의 가족 이어 주어서 너무나 감사하고 다시 태어나더라도 우리 가족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엄마여서, 나의 아빠여서, 나의 동생이어서 너무나 감사하고 더 긴 시간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나의 빈자리가 얼마나 클지 상상이 가지 않지만 평소처럼 먼 여행을 떠났다고 기억을 해준다면, 힘들겠지만 너무 많이 아프고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떻게 내가 이 세상을 떠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디에서건 최선을 다해서 살았고 이 삶에 후회가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싶다. 아빠의 원하는 방향대로 살아드리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신념을 가지고 하늘에 한점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는 것을 꼭 이야기해드리고 싶다. 언제나 어떤 길을 선택하건 잔소리나 강압적으로 행동하기보다 믿고 의지하고 지켜봐 준 엄마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그 믿음이 내 삶의 길을 찾는 것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내가 맏이지만 언제나 맏이처럼 가족을 든든하게 지켜주었던 동생에게는 미안하다는 말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것 같다. 나의 동생이라 미안하고 고맙고 언제나 믿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오늘 하루 나에게 서운했던 것, 미안했던 것 그런 슬픈 기억들은 눈물과 함께 흘려버리고 웃고 떠들고 재미났던 기억만 떠올리기를 바란다. 먼 여행을 떠난 나를 떠올리며 눈물보다는 웃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되게 할 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나의 엄마여서, 아빠여서, 동생이어서 감사했고 당신들의 딸이고 언니여서 너무나 행복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사랑합니다. 


나는 그 어떤 인도주의적 삶이라는 것보다 최소한의 삶을 영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고 싶었다. 굶어죽어가는 이들에게 밥을 전해주기보다 텃밭을 키우는 법을 가르쳐주고싶었고 많은 사람들이 귀를 닫고 눈을 닫고 들어주지 않고 바라봐 주지않는 이야기들을 듣고 바라봐 주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인권이나 기아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세상에서 굶어죽는것이 가장 비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일을 찾아나서기 위해 이곳 저곳을 들쑤시며 다니지만 아직 내가 가진 역량이 너무나 부족해 큰 도움을 주기보다 내가 배우는 것이 크다는 것이다. 특히도 그들이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의 아픔을 보살펴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네갈은 사실 최빈국이지만 나의 기준으로는 국민성이 생각보다 높아 다들 발전하기위해 부단히들 노력하고 있다. 내가 이들에게 도움을 준것보다 내가 살아오면서 받은 상처들을 이들로 부터 치유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언어와 문화는 너무나 다르지만 그들이 내게 준 사랑은 넘치고 넘쳐 치유제로써 쓰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네갈에서의 삶은 내 인생에서 선택했던 것 들중 가장 잘한 일이었다. 


이곳 세네갈에서의 삶도 약 10개월 정도 남았다. 앞으로 내게 닥칠 운명들이 어떤 것들인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즐길 것이다. 죽음이 두려워 망설이지 않을 것이고 죽음 앞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 왔다. 나의 신념과 하고자 하는 길 기로에서 죽음과 마주한다면 나의 신념을 선택했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물론 앞으로의 기나긴 여정이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만은 않을 테다. 무섭기도 할 테고 외롭기도 할 테다. 하지만 언제나 내 자신을 믿고 행동한 것에 대해 알아주길 바란다. 혹여나 내가 어리석은 선택을 했더라도 너무 질타하지 말아 주면 좋겠다. 20대 초반에 선배들이 졸업하고나면 무얼할것이냐는 질문에 29세 겨울 12월31일까지는 열심히 놀꺼란 대답을 했는데 약 보름정도 남은 이시점에, 열심히 놀았음을 보고하는 바이다. 나의 선택에, 나의 삶에 언제나 지지해주고 응원해준 당신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2016년 12월 15일 세네갈 께베메르, 나의 아늑 한 집에서. 


-김은빈 올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