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변화가 기적을 만든다" , 트레버
지난가을, 홀로 내려간 경주에서 만난 인연은 해를 넘고 가을을 넘어 살포시 내게 다가왔다.
말 그대로 '워크숍 진행'을 위해 홀로 내려간 1박 2일 동안 만난 KNOC분들은
따뜻하고 정스러웠으며 때론, 날카로운 눈빛으로 강의를 듣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기도 하셨다.
떠나기 전 단체 사진까지 찍어 드린 뒤, 다음 주에 진행할 "이병률 시인과의 북콘서트" 가 끝나면
정리해서 보내 드릴게요. 참고하세요. 라며 담당자 과장님과 인사했고 가끔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며
울산에서 잘 지내고 계시는구나, 다음에 안부 여쭤봐야지.라곤 생각했다.
이병률 시인과의 북콘서트는 성황리에 마쳤다. 공무원들과의 협업이 녹록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잘 흘러갔다. 시와 가야금의 조화로움은 가을밤에 잘 녹아들었고
퍼포먼스를 마친 뒤, 늦지 않게 아트 콘서트 제안서를 과장님에게 송부해 드리곤 난 그 회사에서 퇴사했다.
정확히 말하면 정직원으로 계약하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았다.
12월은 바삐 흘렀다. 반 년 가까이 놓고 있던 소소한 것들 (예를 들어 엄마와 꽃시장 가기, 평일 낮 가족과
점심 먹기, 서점에 가서 시간 보내기, 마음껏 늦잠자기)을 하다 보니 몇 주가 금세 흘렀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연말이 지나자 마음은 내 어깨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너 지금 그럴 때 아니야, 뭐하고 있는 거야? 얼른 움직여야지!라고.
여기저기 나름의 제안서를 보내야 하나? 싶다가도 아직은 준비가 덜됐다는 핑계로 날 다시 의자에 앉히고
그래도 어디든 걸어야 하는 거 아냐? 라며 벌떡 일어나 의자 주변을 빙빙 맴돌기를 수차례.
어느 날, 지난가을 KNOC 담당 과장님께서 카톡으로 "은별 씨,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라고 하셨고
곧이어 울산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급하게 승급자 교육 스케줄이 잡혔는데 한 세션에 아트 콘서트를 넣어 보고 싶다고 하셨고 그 날부터 난,
주말 내내 (하필이면 금요일 낮의 통화였다.)
머릿속을 부유하던 아이디어를 텍스트와 이미지로 뱉어내기 시작했다.
인상주의, 고흐와 드뷔시 이야기, 불가능을 가능케 했던 이야기, 문학 + 음악 + 그림, 이 셋의 조화로움을 위해
20시간 정도를 보낸 것 같다.
하지만 HR이 대부분 그렇듯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 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였기에
우리가 잠정적으로 결정한 책은 '트레버' , 영화 역시, '트레버'였다.
현악 4중주를 꾸렸다.
작년 ,진성이라는 철강회사에 함께 갔던 바이올리니스트와 통화를 했고
그와 함께 나의 이야기를 들었던 그녀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그들은 금세 원래의 팀을 내게 소개했고 나 역시 그들을 반겼다.
책을 다 읽었다.
구정은 고스란히 독서와 영화를 보는 시간으로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대략의 프로그램을 짰다.
곡은 총 12곡 정도 연주될 예정이었고 중간중간 책의 장면들을 낭독하는
"특별한 낭독회" 콘셉트가 가장 어울리는 것 같았다.
연기자를 섭외할까? 도 생각했고 성우를 섭외해볼까? 도 생각했지만 예산이 맞지 않았다.
우선은 내 한 몸으로 만족할 수 있는 퍼포먼스를 끌어내야만 했다.
세부적인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했다.
시나리오를 세분화시켜서 쓰기 시작했으며 컷마다 어떤 이미지를 넣을지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어느 정도
결정을 지어야 했다. 그래야 키노트로 작업할 때 수월 할 테니.
연주자들은 메시지에서 조차 매력적이었다.
예술가를 만날 때, 특히나 본인이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이들을 만날 때, 그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너무 맛있고 귀한 디저트 같아서
입 안에 넣기 전 눈으로 보면서 한 번, 코로 향을 맡을 때 한 번, 혀로 맛볼 때 또 한 번, 입 안에 우물거릴 때 한 번, 삼키기 아쉽지만 녹아버린 마카롱 같은 느낌을 느끼곤 한다.
그리고 그 달콤함은 내 기억에 남아 무엇을 하든 미소로 귀결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어찌 됐든 우린. 모두. 경주로 향해야 했다.
편의를 위해 하루 전, 보문단지에 있는 리조트를 예약했고 당일에 가서야 우리가 가야 할 경주가
보문단지에서 40km 정도 떨어진 산 속이라는 걸 알게 됐지만 그것 조차 나, 우리에겐 즐거움이었다.
어찌 됐든 트레버를 소개하는 특별한 낭독회는 내일, 열리게 될 테니 말이다.
KNOCK TO KNOC
그들의 마음을 두드리기 위해 우린
서울, 경기도, 대전, 부산, 천안. 정말 전국 각지에서 달려갔다.
경주의 밤과 아침을 만끽한 뒤, 여유로운 아침을 함께 먹고 산 속으로 향한 우리는
조금 일찍 찾아온 봄의 기운에 흠뻑 젖어 그저 웃고 있었다.
작년 11월, 재현 씨와 혜진 씨와 대부도에 있는 곳에서 아트 콘서트를 진행한 뒤 점심을 먹으며 이런 대화를 한 기억이 난다. 당시, 재현 씨는 2달, 혜진 씨는 파리에서 돌아온 지 2주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예술가로 산다는 거, 쉽지 않죠? 저도 작곡을 전공했고 끊임없이 변해가는 꿈,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거든요. : )
-네, 특히 한국에선 쉽지 않네요.
-그래서 전, 그런 예술가들의 삶이 일반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변화시키는 자극제가 되었음 해요. 그리고 그들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싶어서 이 일을 선택한 거고요.
-그럼 저흰, 무엇을 하고 지내면 되나요?
-음... 가을 하늘을 보며 이건 라흐마니노프 피협 2번 1악장 같네, 보라색 향이 나네, 내가 연주하는 비발디 여름,2악장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무슨 이미지를 떠올릴까? 뭐 이런 생각? 쉽진 않겠지만 꼭 필요하죠.
-네, 해볼게요.
희미한 대화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난 그들에게 다음 우리의 무대는
조금 더 화려할 것이고 조금 더 멋질 것이라고 약속 아닌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3개월 안에 지켜낸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이번 이벤트는 내게 조금 더
의미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유 없이 누군가를 도와준 경험을 갖고 있는가?
배식 순서를 기다리며 한겨울, 길고 긴 줄을 선 채,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주린 배를 채우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해 본 적 있는가?
물론, 나 역시도 그런 경험은 없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본 적은 있다.
어느 겨울, 값비싼 호텔에서의 점심 식사를 위해 운전을 해 지나가던 중
신호대기에 걸려 길에 서 있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줄로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몹시 추워 보였고 배고파 보였다.
지저분한 모습으로 대로변에 길게 줄을 선 그들의 눈빛은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보며 신호가 바뀐 것도 모르고 있던 내 옆에 한 사람이 다가왔다.
저 멀리에서부터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어온 그 청년은 내 또래처럼 보였다.
양 팔 가득 붉은 고무장갑을 들고 있었고 길가에서 신호 대기에 걸린 차 안 사람들에게
그 고무장갑을 팔고 있는 것이었다.
난 당장이라도 그의 그것을 사고 싶었다.
창문을 내리려는 찰나 나와 같은 또래의 그가 왠지 내게 파는 고무장갑을 창피해할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망설이다가 바뀐 신호에 출발했다.
출발과 동시에 후회했다.
내가 산 고무장갑으로 그는 따뜻한 밥을 먹을 수도 있었을 텐데
지나친 생각에 그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을 오히려 앗아간 것 같다고 생각되어졌다.
여기 한 꼬마가 있다. 그는 오히려 거리의 부랑자를 친구 삼아 집에 데리고 와서 씻을 공간을 주고 함께 아침을 먹으며 자기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어른인 그에게 차비는 있냐고 되묻는다.
로 시작된 아트 인 콘서트는 '냉정과 열정사이' 에 흐르는 음악으로 문을 열었고
시나리오대로 잘 흘러갔으며 두 시간을 꽉 채운 뒤,
아쉽게 그리고 홀가분하고 기쁜 마음으로 막을 내렸다.
함께 간 스텝이 없어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찍지 못했고 제대로 된 영상 한 컷 담아 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재현 씨 연주에 감탄해 마지않는 사람들의 눈빛을 보고
숨이 멎을 것 같은 탱고 음악을 듣기도 했으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꼬마의 메시지에 우리 모두 고민해볼 수 있기도 했고
조금은 보수적인 기업 교육에 예술이라는 콘텐츠를 얹어
인간에게 내제 된 영적인 감각,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심미안을
건드려 본다는 것만으로도
나, 우리, 그리고 모두에게 어느 정도 의미가 전달되는 시간이었음에 그저, 감사하다.
다음엔 조금 더 좋은 조명 밑에서
더 많은 관객과 소통하며
더 다양한 본인들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전달하고
또 다른 예술 장르와 융합된 모습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진정한 동기 부여의 시간으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길 바라본다.
그리고 그 현장에는
내가 사랑하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열정과 마음, 노력과 결과를 마음껏 풀어낼 수 있게 되길 !
기대도 하지 않던 곳에서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처럼
그리고 그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온 것처럼
곧 도래할 다른 일, 기회, 퍼포먼스, 작업, 공연이 생겨나길
오늘 밤에도 무릎 꿇고 아이처럼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잠들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