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끊어내야 산다
하원 후 집에 들어설 때마다 아이가 말한다.
"엄마 택배가 왔네."
헛헛한 마음이 들어서인가. 아니다. 나는 꾸준히 뭔가가 계속 필요하다.
펜트리마다 들어선 햄, 참치 통조림, 누룽지, 샴푸, 하다못해 컵라면까지. 베란다엔 화장지도 많이 쟁여뒀다. 아마 전쟁이 나도 한 3년은 버틸 수 있을 듯하다. 쌀도 세 포대나 있다. 이러다 집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하다 산책길에서 뜬금없이 장미화분도 샀다. 화원이라 싸니까 두 개 해도 4천원이니 남는 장사라고 되뇌이며 샀다.
그러다 보니 집이 짐으로 가득 찼다. 미니멀리즘은 이번 생에서는 텄다. 결국 집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쌓인다. 나는 짐 위에서 자고 일어난다. 내일은 안 보는 책도 버리고 안 쓰는 장난감도 꼭 버리자. 일단 장난감은 아이가 없어졌다는 데 놀랄 수 있으니 아이한테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은지 물어본다. 대답은 뻔하다. 누구 주지 마 , 팔지 마, 버리지 마. DNA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짐은 더더더 많아지고 택배 상자는 끊임없이 재활용된다. 그리고 나는 또 뭔가를 산다. 왜 난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는 걸까. 아이 식판부터 각종 음료수, 간식. 사탕과 비타민 C는 왜 이리 많은지. 칸칸마다 오래 살려고 영양제도 쟁여놓았다. 박스째 사는 게 싸고 좋으니까라는 변명도 이제 그만. 육아와 미니멀리즘은 과연 공존할 수 있을까.
짐이 더 많아져 심지어 대용량 냉장고도 질렀다. 냉장고가 커지면 더 짐이 많아질텐데. 짐을 버리고 새 짐으로 채운다. 왜 다들 이렇게 쌓아두고 사는 걸까. 대형마트에 가면 그만큼 더 사고 냉장고가 커지면 거대한 물류창고가 된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놀랐던 건 아이가 원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찾을만한 걸 더 많이 사게 된다는 것이다. 하루에 필요한 건 하나만 사는 거야라는 규칙을 세웠지만 아이가 원하는 거 하나, 아이가 곧 찾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에 두세 가지의 물품을 또 쟁여두게 된다. 엄마의 극성인가 기우인가. 미니멀리즘은 이번 생에는 글렀다.
그러다 정작 아이가 필요할 때, 내가 필요할 때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쿠팡에서 로켓배송을 시킨다. 집은 점점 좁아지고 점점 더 답답해진다.
언제쯤이면 이 짐들에게서 해방이 될까. 채워두지 않으면 헛헛해지고, 채우면 답답해지고. 일을 하면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사랑을 하면 사랑이 떠날까 두려워하고, 택배를 시키면 또 다른 택배를 주문을 하고. 이 악순환을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나만의 '뭐가 더 필요할까'가 아닌 잡동사니 리스트를 써봤다.
1. 색조 화장품: 코로나 덕분에 쓰지 않아 어차피 유통기한도 다 됐다. 그리고 퇴사 후 화장할 일이 없다;;
2. 작아진 옷: 365일 다이어트 결심만 하고 실행하지 않아 작아진 옷들. 언젠가 다이어트 성공 후 입으리라 했는데 3년 동안 못 입었다. 1년 전 옷도 못 입는 몸땡이가 되었으니 버리자.
3. 자동차 장난감: 자동차홀릭에서 퍼즐홀릭으로 넘어갔으니 당근에 팔자. 자동차 경주하느라 집안 곳곳에 작은 숨어 있는 차들 덕분에 애꿎은 내 발바닥만 여러 번 아작이 났다.
4. '나 돈 버는 여자야'라는 마음 : 이름만 프리랜서라 통장이 텅장이 됐다. '나 돈 버는 여자야'라는 마음으로 부장이 쫄 때마다 쿠팡과 홈쇼핑을 질러댔다. 스트레스 해소용 소비는 이제 그만.
5. 쓸데없는 인간관계 : 조직에서도 결국 남는 건 사람이다. 일의 고리가 끊어져도 남는 사람은 있다. 자기 하소연만 하는 친구, 매사 부정적인 친구,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옛 동료. 내 에너지를 갉아먹으면 과감히 끊어내자.
리스트를 썼으니 이제 실천만 하믄 된다. 나를 위로해주는 건 물건들이 아니라 나 스스로 나를 돌보는 마음이다. 나를 돌본다고 물건을 사는 일은 이제 그만해보자. 사회생활용 미소를 남발하는 인간관계도 끊어내자. 끊어내야 산다. 몸도 집도 더 커져서 터지기 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