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실버라이닝 Jul 03. 2022

번아웃은 한번 오면 계속 온다

 

번아웃은 한번 오면 계속 온다. 너무 자주 와서 집에 누워 있어야 하나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럴 거면 그냥 일을 하지 말자라는 생각에 퇴사도 하고 여행도 다녀왔다. 


여행은 좋았다. 그러나 중간중간 비집고 들어오는 '이제 뭐 먹고 사나'라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미처 치유되지 않은 몸과 마음으로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동료와 일하다 보면 잠시잠깐 괜찮다가 다시 번아웃이 찾아왔다. 

살면 살수록 일하면 일할수록 번아웃이 찾아오는 주기는 점점 짧아졌다. 구질구질한 생각이 들어 일단 술집으로 도망부터 쳤다. 


"왜 나는 번아웃이 이렇게 자주 오는 거지? 집에 그냥 누워 있고 싶어. 다 귀찮고. 그래도 여기 코젤맥주는 진짜 맛있다. 그지?"

"야,  넌 번아웃이 아니라 그냥 놀고 싶은 거네. 번아웃이 핑계냐? 코젤 맥주 마실라믄 회사 가야지."


맞다. 코젤 맥주를 마시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여름만 되면 코젤 흑맥주가 땡긴다. 영혼이 아는 맛이다. 목을 타고 들어가는 시원함이 내 묵은 귀차니즘, 무기력을 다 쓸고 가는 듯했다. 사람 많은 서촌에 꾸역꾸역 오는 이유는 단 하나 먹태에다 코젤 맥주 마실려고! 먹태까지 있으니 천국이다. 

왜 나는 번아웃이 이리 자주 오는 건가


서른이 넘어서부터는 내 몫의 번아웃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행복은 셀프, 번아웃도 셀프. 술 먹고 주정도 한두 번이지 꼴값 한다는 소리 듣기 전에 엑시트를 찾아야 했다. 


처음 엑시트는 드라마였다. 노희경 드라마를 다 찾아봤다. <괜찮아 사랑이야>의 대사가 맘에 꽂혔다. 


누가 그러더라. 세상에서 제일 폭력적인 말이 
남자답다. 여자답다. 엄마답다. 의사답다. 학생답다. 
뭐 이런 말이라고. 
그냥 다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라서 서툰 건데 
그래서 안쓰러운 건데
그래서 실수해도 되는 건데. 


실수해도 괜찮은데, 욕먹는 게 싫었다. 회사에서는 기획서, 보고서를 쓸 때 셀 높이 하나 다르면 안 되는 분위기에 숨이 막혔다. 자꾸 주눅들다 보면 일은 그르치기 일쑤였다. 다 내가 부족해서라는 결론에 다다르면 점점 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은 별일도 아닌데 화가 났다. 엄마한테 전화오는 것도 싫고 통화하다 '아 고만해, 좀' 이런 말이 나와버렸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나면 후회했다. 


'노처녀 히스테리, 분노조절 장애, 예민하다' 등등 이야기가 들리는 듯했다. 뭔가 엑시트가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민폐녀 등극은 시간문제였다. 나를 못 살게 하는 건 나였다. 


나만이 나를 구할 수 있다.  


내 엑시트는 내가 찾는 것이지, 누가 찾아주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말았으면 좋겠다. '팀장님'이라는 소리에 소스라쳐 놀랄 지경에 이르러 나는 하나의 결단을 내렸다. 철저히 혼자 있는 시간을 업무 시간 내에 무슨 일이 있어도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었다. 


시작은 점심시간이었다. 외부 미팅이 있다는 핑계로 김밥집에서 김밥을 하나 사서 일단 회사 뒤 조그만 언덕에 올랐다. 몸이 몸이 아니라 몸뚱이가 된 지 오래라 60개도 안 되는 계단에 오르는데 숨이 턱까지 찼다. 계단 끝에는 세상과 단절된 듯한 초록이들로 가득했다. 나무 아래 앉아 있으면 온갖 시끄러운 것들이 고요해졌다. 왜 아저씨들이 그렇게 산에 오르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아무도 나를 안 찾고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산이었던 것인가. 나만의 공간을 발견했다는 기쁨으로 그날 이후 나는 매일 점심 시간을 혼자 보냈다. 그 시간이 있어야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넉다운이 취미 번아웃이 특기인 나의 회사생활은 '혼자 산책'이라는 엑시트를 발견한 이후 조금은 빛이 생겼다. 아침 팀장 미팅 때나 부장 회의가 끝난 후 스트레스를 버리러 쏜살같이 뒷산에 올랐다. 그리고 혼자 아무 말 없이 초록이들과 만나고 나면 한결 가벼워졌다. 비가 오면 빗소리때문에 더 좋았다. 잔뜩 충전하고 오는 길에 아이스아메리카노 하나를 마시고 책상 앞에 앉으면 그 힘으로 오후를 살아냈다. 


번아웃은 한번 오면 자주 온다. 지나가도 또 온다. 다음에 오면 또 다른 엑시트를 또 찾아낼 것이다. 

나만이 오직 나를 구할 수 있으므로. 그래, 무엇보다 행복은 셀프다. 

이전 10화 우리는 왜 세상과 멀어지는 걸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