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05
“아빠, 나 오늘 스물여섯 번 손들었고, 서른 번인가 발표했어.”
“오. 그걸 센 거야. 대단한데. 너만 그런 거야?”
“우리 반 모두, 집에 갈 때까지 열 번은 손들고, 백번은 선생님과 눈을 마주쳐야 한다고 하셨어.”
코로나19로 미뤄진 등교가 듬성듬성이라도 이어지던 어느 봄날의 하굣길. 딸은 저렇게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저 자랑을 듣고나서 새삼 알았다. 선생님은 애를 쓰고 있다는 걸.
대학원 선배 중에 박사 학위를 받고도 강단에 서는 꿈을 접은 이들이 있다. 강의를 할 때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걸 뒤늦게 알고 교수의 길을 포기한 것이다. 물론 그 꿈을 갖고 있다고 해서 교수가 되는 건 아니고 학자의 길이 곧 교수의 길은 아니지만 학생들 앞에 서는 것이 공포여서 그 꿈을 접을 수밖에 없는 건 그 자리를 얻기 힘들어 보따리 장사로만 떠도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절망일 것이다.
어찌 됐든, 이런 사람들은 많다. 사람들 앞에서는 말 한마디 못하고 발표 자리에만 가면 작아지는 사람. 그래서 역설적이고, 당연하게도, 종종 광고업계에선 말 잘하고 프레젠테이션 잘하는 것만으로도 그럭저럭 연명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카피라이터나 AE 등 광고계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상당 수준의 말발을 장착하고 있지만 사무실과 술자리에서의 말발은 강단이나 대중 강연 등에서의 말발 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평소에 말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발표를 하면 떤다는 걸 뒤늦게 알게 돼서 당황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대학에서 강의할 때 그런 학생들을 자주 봤다. 그때마다 명색이 광고를 하겠다는 놈들이 자기 아이디어와 결과 발표하는 걸 그렇게 힘들어하면 어떻게 하냐며 더 많은 발표를 시키곤 했지만 스무 살 정도만 되도 자기 자신을 고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확인했을 뿐이다.
전염병 시국에 몇 개월 늦게 학교에 갔기 때문에 담임선생님과 더 빠르게 친해지기 위해 그런 방법을 생각하셨는지, 아이들의 자신감과 발표력 향상, 그리고 밀접 접촉이 어려워서 서로를 소개하고 친해지기 어려운 상황이라 공개적으로 자기를 소개하고 서로를 알아가라고 이런 방법을 쓰셨는지는 모르겠다.
40분간 이어지는 서너 번의 수업을 하면서 열 번 이상 손을 들고 발표를 한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횟수다. 한 시간 이십 분 정도면 대학 강의의 한 타임 정도밖에 안 된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대학생들에게 자유로운 질문의 기회를 주고 손을 들라고 해봐라. 아마 아무도 안 들 거다. 강의가 끝나고 “질문?”하고 학생들을 둘러보면 고개를 숙이거나 딴 데 보는 학생들이 거의 대부분이고, ‘질문은 됐고, 빨리나 끝내 달라.’는 염원을 담아 책을 살포시 덮으며 강사를 바라보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학생들이 나중에 혹시라도 기자가 되면 그 유명한 오바마 기자회견 사태를 발생시키겠지.
우린 언제부터 자신의 의견을 말하거나 궁금한 걸 질문하는 걸 두려워하기 시작했을까? 분명 처음 들어간 학교, 초등학교에선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대중 연설의 두려움과 대인 기피증, 모르는 걸 물어보는 두려움을 원천 봉쇄하고 그 싹이 올라오는 걸 차단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셨을 텐데 말이다. 도대체 어느 시점, 어느 인간이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이 애써 형성시킨 자신감을 깨부순 걸까?
뒤늦게 스피치 학원을 다니고 명품백을 들고 고가의 PT를 받으며 다이어트에 목을 매고 몸매 관리에 사활을 거는 것도 따져보면 다 이 부서진 능력을 다시 회복하려는 몸부림에 불과할지 모른다. 앞서 말했듯, 대부분의 어른들이 이미 초등학생 시절에 선생님들로부터 거의 무료에 가깝게 자신감과 자기 확신을 갖게 되는 교육을 받았음을 상기해보면, 저 뒤늦은 몸부림은 그야말로 비용도 시간도 세월도 이중으로 낭비하는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보니, 쉰이 다 되어가도 여전히 위태로워 보이는 나를 보시면 크게 낙심하며 안타까워하실, 내 초등학교 1,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 얼굴이 떠오르며 절로 죄송한 마음이 든다. 조수자 선생님, 죄송합니다. 중간에 제가 좀...
이제 눈맞춤 얘기를 해보자. 선생님은 왜 눈맞춤의 숫자까지 정해 놓으실 정도로 눈맞춤을 중요하게 생각하실까? 눈 맞춤이 중요하다는 연구나 그 중요성을 보여주는 현상은 많다. 0세에서 3세까지 눈맞춤이 가장 중요하다는 아동 심리학자들의 주장은 공통되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자폐증 환자 연기의 핵심도 타인과 눈을 맞추지 않는 것이다. 박노해 시인의 눈맞춤이라는 시는 우리가 어디에 시선을 뺏겨서 눈맞춤을 잊고 살고 있는지, 그래서 무엇을 놓치며 살고 있는지 말한다.
눈맞춤
입맞춤보다 중요한 건 눈맞춤
스마트폰만 들여다보지 말고
시크한 척 자기만 보지 말고
서로 눈맞춤하기
눈이 맞으면 마음이 맞아가
입맞춤은 절로 따라오는 것
눈맞춤한 다음 입맞춤한 다음
함께 앞을 바라보며 나아가기
눈맞춤 교육은 인간다움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인 상호작용 능력을 형성시키는 첫 번째 단추다. 모든 입맞춤 전에 눈맞춤이 있었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고 사는 어른들이 스마트폰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필사적으로 사람과 마주 보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선생님의 눈맞춤 교육은 그 흔한 눈높이 교육보다 중요하다. 눈맞춤과 마주 봄은 타인에게 나를 맞추고 타인을 내게 맞추는 도구가 아니라 나를 타인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나 또한 타인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위 사회화되면서 앞서 말한 자기표현과 자신감의 상실처럼, 성장하면서 저 방법, 타인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레,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방법을 잊는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연장자나 리더와, 학생이 교사와 눈을 맞춘다는 건, 심지어 그 상태를 유지하면 대화를 하며 더 나아가 표정의 변화까지 보여주고 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동성끼리 눈을 맞추며 대화하는 건 동등한 지위나 사회적 조건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남아 있다. 놀랍게도 말이다. 그러나 은채의 어린이집 시절에 마주쳤던 남자아이들은 서슴없이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짧고 하얀 머리칼을 한 마른 중년 남자와의 대화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쩌면 아이들이 클수록 그 시선처리조차 사회화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사회에 적합한 시선처리 말이다.
나 역시 대학 강사 시절 난감했던 일 중 하나가 남학생과 눈을 마주치며 대화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나란히 앉아 멀리 시선을 두고 대화를 하는 거였다. 그러면 대화가 끊기지 않고 담담히 이어진다. 술자리에서도 제자들이 고개를 돌리고 술을 마시는 게 영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딴 어른하고는 몰라도 나랑 마실 때는 내 얼굴을 보고 마시라고 했다. 잔이 비면 알아서 마실 만큼 마시면서, 다른 사람 잔이 비었는지 그 잔들 스캔하는 대신에, 지금 앞에서 대화하는 사람에게 집중하라고 했다.
선생님과 눈맞춤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집중의 맥락도 있다. 열정적인 설교자에서 눈을 떼기는 어렵고 노인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유재석 뺨치게 재미있는 다단계 판매자에게서 눈을 떼는 것도 어렵다. 우리의 흥미가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인지 흥미 있는 것이 우리의 시선을 붙잡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람과 사물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연습은 사람과 사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날카로운 시각을 획득하는 방법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이렇게 교육받은 아이들이 정작 집에서는 눈맞춤이 서툰 부모와 저녁 시간을 보낸다면 그 교육의 효과는 반감되거나 사라지지 않을까? TV를 끄고 저녁밥을 먹으면서 두서없는 대화라도 꾸역꾸역 찬밥 넘기듯이 하다 보면 우린 어느새 대화에 익숙해지고 서로의 표정을 눈으로 담아내는 것을 당연시할 것이다. 어느 광고의 카피처럼 "오늘이 아이와 가장 많이 대화하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클수록 대화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 기회가 줄어드는 것일지도 모르고. 애를 학교에 보낸 후에 알게 됐다. 학교는 무지하게 애쓰고 있다. 부모도 함께 애써야 우리 아이들이 단단하게 빛나는 존재로 세상에 나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