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04
“아빠, 오늘 또 박정애 선생님 만났어.
선생님이 1학년 애들한테 공부 잘하고 씩씩한 언니인데 더 컸다고 날 소개했어.”
1학년 때 은채의 담임이셨던 박정애 선생님은 또 1학년을 맡으셨다. 코로나 시국에 막 접어들었던 은채의 2학년, 학년별로 등하교 방법과 입출구가 따로 정해졌는데 1, 2학년은 모두 정문으로 등하교를 했기에 은채는 1학년 때 담임선생님과 자주 만났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함께 등교하는 선생님반의 1학년 애들한테 은채를 소개하셨다. 초등학교 선생님은 아이들의 자존감 높이는 노하우를 백 개쯤 갖고 계신 걸까? 이것보다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까? 감독이 나를 고객에게 소개할 때마다, 명함에도 없고 어느 광고 대행사나 광고홍보 프로덕션에서도 쓰인 적 없는 수석 작가라는 명칭으로 종종 소개하는 것보다 백배쯤 효과적인 방법이지 않을까?
어른은 자기 위치 확인과 이를 토대로 쌓아지는 자존감 획득을 목적으로 타인과 세상에 자신을 그럴듯하게 소개하가 위해 갖은 애를 쓴다. 그리고 그 애씀의 여정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다. 중학교만 들어가도 브랜드를 입고 신어야 하고 자랑할 만한 아파트에 살아야 자기소개가 편해진다. 한 때 유행했던 등골 브레이커 현상도 다 이런 과시적 자기소개의 욕망에서 발생한 부작용이다. 고등학교 때부턴 내가 누구인지 말하는 법, 그 공식을 배워야 한다. 또 그 공식을 써먹어야 할 곳, 그러니까 사적인 소개의 장을 넘어 공공의 장, 경쟁의 장도 점점 많아진다. 당연히 경쟁력 있는 소개와 그 효과를 높여주는(그런다고 자신하는) 자기소개서 컨설팅과 대필 회사도 많아졌고 그 시장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
성인이 되면 그 경쟁은 더 심해지고, 그 양식은 더 규격화된다. 자기표현은 좋게 말하면 세련되고, 나쁘게 말하면 정형화되고 더 과시적이게 된다. 대학에서는 열심히 스펙을 쌓고 과잠을 입고 취업 준비도 열심히 한다. 평생을 하는 다이어트도 이때 시작되고 성형의 유혹도 찾아온다. 그뿐인가 명품도 사고 철마다 좋은 옷도 사 입는다. 운동을 해서 몸도 가꾼다. 어렵게 취업을 하면 신분증이 담긴 택을 받아 걸고 명함도 좋은 걸로 판다. 몇 년 참으면 승진도 시켜주고 자리도 바꿔준다. 그에 따라 차도 바꾸고 유명한 아파트로 이사도 한다. “난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하기 위한 우리의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한 애씀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내가 존경하는 어른이나 유명인이 나를 이렇게 간단하고 명확하게 소개해주는 것이, 나에 그 수많은 애씀보다 더 강렬하게 자존감을 높여주고, 더 확고하게 내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이 방법의 천재들인 초등학교 시절의 담임선생님들은 우리 자신이 충분히 멋진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해 놓으셨을 것이다. 어른이 된 나와 당신에게 선생님이 만들어 놓으신 그것, 그 마음이 없어져 버린 건 아마 우리가 삶의 어느 순간 선생님들이 공들여 만들어놓은 그것을 툭 하고 어딘가에 던져버렸거나 인생의 어느 순간 내게 닥친 누군가, 또는 뭔가가 그것에 큰 상처나 균열을 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선생님이 애써 만들어 놓으신 “내 마음”이 더 이상 손 써볼 수도 없이 훼손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복구하기 위해 저렇게 동분서주하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것일 테고.
그렇게 아무리 애를 써도 내가 찾고 싶은 내가, 내가 만나고 싶은 내가, 내가 만들고 싶은 내가 도저히 찾아지지도, 만나지지도, 만들어지지도 않을 때, 우린 떠올린다. 무한정 내 존재를 받아주고 나를 격려해주던 어떤 존재를. 우리가 힘들 때마다 고향이나 어머니와 할머니의 품을 떠올리는 건,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뛰 놀던 그 소란스러운 운동장을 떠올리는 건, 그 자존감 높이기에 특화되어 있던 어린 시절의 소중한 사람들, 그들과 보냈던 시절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인지도 모른다.
난 군사정권 시절에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고 검정고시 공부를 했다. 초등학교 시절까진 괜찮았다. 우린 다 가난했고 다 비슷한 옷을 입었다. 브랜드도 없었고 자동차도 없었고 아파트도 없었다. 온 식구가 한 방에서 자는 집도 흔했던 시절이었다. 중학교는 좀 달랐다. 군사정권 시절의 중학교는 완전히 우수한 존재가 될 능력이 없으면 흠이 안 잡힐 조용한 존재가 되는 것이 학교생활을 원만히 하는 방법이었다. 푸코 식으로 말하면 선생님은 살아있는 파놉티콘이었고, 학교는 당시의 사회를 지배하던 그 엄혹한 규율 권력에 순응하며 살 수 있는 존재를 만드는 기관이었다.
실수를 줄이고 잘못을 안 하고 적당히 공부하고 말썽 안 부리는 소년만이 욕을 먹지 않았다. 칭찬? 그건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봤듯이 공부 잘하는 친구, 거기에 “품행이 방정”한 친구에게나 해당되는 거였다. 학교 빠지지 않고 어머니가 원하시는 대로 교회 잘 나가고 착한 교회 오빠로 사는 것이 날 향한 어른과 이웃의 시선에 부합되는 존재가 되는 삶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에 들었던 몇 안 되는 칭찬들은 훈장처럼 남아 평생을 따라다닌다. 그런 칭찬들은 부모에게서도 듣기 힘든 칭찬, 흔치 않은 칭찬이기에 더 소중히, 평생 간직하며 사는지도 모른다. 그런 보석 같은 칭찬을 제외하면 내 십 대 시절의 삶은 긍정의 삶은 아니다. 주체를 형성하고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저 밖에 존재하는 어떤 시선, 규범, 규칙, 잣대에 맞추기 위해,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탈선의 존재라는 낙인을 피하기 위한 삶이었다. 부정의 평가를 피하기 위한 자기부정의 삶이었다.
학기마다 받아오는 은채의 성적표를 보면 아이 한 명 한 명에 담임선생님이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잘한 부분을 찾아 칭찬하고 격려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아이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물론 지금도 학교에선 아이의 실수나 잘못, 부족함에 대해서 체크하고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교육의 목적이 한 인간을 규범적 존재로 만들기 위한 과정과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고유한 주체로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여기는 시대인 것 같다.
은채의 친구들 이야기를 듬성듬성 들어보면 아이들에겐 벌써 나름의 아픔이 있다. 딸의 반 친구들 중엔 싱글 맘이나 싱글 대디가 흔하다. 내 어린 시절 같았으면 그것만으로도 벌써 소외당했겠지만 이제는 그런 가정이 워낙 많다 보니 그것이 어떤 낙인으로 작용하는 것 같지는 않다. 또 성적표에 “수우미양가” 같은 가시적 서열 체계가 명시되지 않고, 1등부터 꼴등까지 순서 매김과 그 공표도 없으니 자기들끼리는 누가 얼마나 더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지 구분을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시험을 못 쳐도 크게 낙담하지 않고 쿨하게 넘기는 애들이 많아서 내가 오히려 놀라곤 한다.
어쩌면 지금의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가정에서 미처 완성되지 못한, 만들어주지 못한, 챙겨주지 못한 마음속 뭔가를 만들어주기 위해 애쓰고 계신지도 모른다. 특히 코로나19 시국에서는 그 필요성을 더 절박하게 느끼셨는지도 모른다. 온라인 수업 때마다 아이 한 명 한 명을 불러 질문하고 답을 유도하는 선생님의 투쟁과 같은 수업을 엿들을 때마다 그 수고로움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집에 어른 없이 홀로 있는 아이에게 넌 지금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주기 위한 메시지가 쉴 새 없이 이어졌고, 아이의 투정 어린 하소연도 인내심을 갖고 들어주셨다.
어쩌면 아이들은 코로나19 시기의 담임선생님을 더 깊이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이름을 수업 내내 끊임없이 불러주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평생 잊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누가 이렇게 내 이름을 간절하게 불러줬던가? 누가 그렇게 내게 한자라도 가르쳐 보려고 내 이름을 불러 흔들어 깨웠던가? 아이들은 저 수많은 선생님들 덕분에, 이 시국에도 그 마음 한가운데 나름의 자존감과 자신감, 정체성을 잘 키워가며 크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