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에서 일 핑계를 대고 책을 뒤적이고 있는데 딸이 들어와서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져 있었다.
'나는 글 쓰는 게 힘들고 지치던데 아빠는 어떻게 글을 써서 돈을 벌어요. 대단해요.'
이런 칭찬에 적절한 반응도 예시되어 있었다. 칭찬을 들으면 그 칭찬에 고마워하거나 겸손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뭐라고 써야 하나 좀 고민하다 결국 이런 문장을 답으로 달았다.
'그나마 가진 재주 중에서 이게 제일 쓸 만하니까. 많이 읽고 빨리 쓰고 오래 고쳐서 그럭저럭 원고료가 아깝지 않은 걸 쓰는 거지'
써 놓고 보니 겸손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마워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딸도 어이가 없는지 살짝 웃고 나서 추가 질문을 제시했다.
"아빠는 언제부터 글을 쓰고 책을 많이 읽었어요?"
이 질문엔 아주 쉽게 답할 수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서른이 넘어서 제대로."
그 과제엔 칭찬에 맞장구치는 방법도 써져 있었다.
'밝게 웃으며 신기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히 높은 목소리로 맞장구를 친다.'라고 말이다.
이게 그러니까, 온라인 학습자료 과제다. 애들한테 상호작용이 왕성한 대화법을 가르치려는 건지, 원만한 사회 생활을 위한 효과적인 대화법을 가르치려는 건지, 그 의도는 정확히 모르겠다. 표면적으로는 서로 칭찬을 하고 그 칭찬을 받아들이고, 그 칭찬에 감사를 표현하는 법을 가르치려는 것이 목적인 듯하다. 그렇다면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린 칭찬을 받으면, 흔히 말해 몸 둘 바를 모른다. 내년이면 카피라이터 이십 연차로 접어드는데도 여전히 “카피 좋네요.”같은 칭찬을 받으면 멋쩍게 웃고 나서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게 다다. 뻔뻔하게 “아, 그렇죠? 이번 카피는 제법 신경을 썼더니 괜찮더라고요.”와 같은 반응은 아직 하지 못한다. 더 솔직하게, 그나마 푼돈이라도 버는 재주는 이것밖에 없어,라고 말하려다 이 정도로 순화시켰다. 손 글씨는 정말 어렵다.
<2020년 12월 18일>
새로운 걸 배워도 되는 때는 언제일까?
잘 버리는 편이다. 책도 들어온 만큼 나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옷도 일 년 동안 한 번도 안 입은 옷은 바로 버린다. 애지중지하며 못 버리는 거라고는 십몇 년 된 오렌지색 등산 점퍼와 촬영 현장에 입고 가는 오래된 미군 파카, 가죽 항공 점퍼 정도다. 악기도 제법 있었다. 기타도 두 개 있었고, 일렉트릭 베이스에 야마하 브랜드의 건반도 있었다. 2002년, 부산에 오면서 평택의 교회 후배들한테 골고루 나눠주고 왔다. 그때 오면서 책하고 음반, 운동 기구 따위도 나눠줬었다.
집에 있는 통기타는 이렇게 다 퍼주고 온 나를 불쌍히 여긴 여자 친구-지금의 아내-가 생일인가, 크리스마스에 사 준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음악을 손 놓고 보니 잘 치지 않게 됐는데, 그렇다고 뭐 팔기도 뭐해서 계속 갖고 있었다. 은채가 크면서, 이 기타에 흥미를 보이기에 몇 번 치면서 노래를 불러준 적이 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기타를 가르쳐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난 3학년이 되면 가르쳐주겠다고 약속했고, 결국 3학년이 다가왔다. 게다가 3학년이 되면 농구도 가르쳐주겠다고 했으니 걱정이었다.
기타 C 코드를 가르쳐 주고, "야 이거 네 방에 갖다 놓고 연습해라. 꾸미고 싶으면 맘껏 꾸며도 돼." 하면서 기타를 딸 방에 버렸다. 이 표현이 맞는 것 같다. 딸은 기다렸다는 듯이 알록달록한 스티커를 붙여서 자기만의 커스텀 기타로 탈바꿈시켰다. 그다음 날, 딸이 또 "아빠, 코코의 기억해줘 부를 수 있어?" 하기에, 악보를 찾아서 둘이 불렀다. 손가락이 아파서 두 번 밖에 못 불렀지만.
몇 년 전부터 새해 계획 같은 거는 잘 안 세운다. 우리야 뭐 연예인처럼 선택받는 직업이니까, "아, 우리가 제대로 된 프로를 불렀구나." 뭐 이런 기분을 고객이 느끼게 하려고 평소에도 날을 잘 세우며 살 뿐이다. 그러나 딸은 계획적이어서 이렇게 3학년 때 하기로 했던 것들을 미리 시작했다. 난 글을 쓰고 광고와 홍보 일을 하는 늙은 아빠다. 맥주 많이 마시고 돈 많이 못 버는 건 빼놓고는 그럭저럭 데리고 살만한 남편이라고 혼자 믿고 있다. 이런 스스로에 대한 믿음, 더 심하게 말하자면, 자기최면마저 없었으면 벌써 집을 나갔을지도 모른다. 아내는 황당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이런 나와 무탈한 가정을 그럭저럭 유지하며 사는 거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딸과 아내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야심과 목표다.
그저 감독의 루비콘 조수석에 실려 이리저리 바쁘게 다니길 바라고 있다. 그렇게 마이 페이스로, 마이 스타일로 늘 하이넥 재킷과 실켓 폴라티, 자라 청바지와 트렉스타의 발 모양을 빼닮은 가죽 신발을 신고 열심히 일하고 싶을 뿐이다. 굳이 새해 계획이 있다면 맥주를 좀 줄이고 달리기를 다시 하고 몸무게는 유지하고. 책 갖고 수다 떨만한 사람 찾는 거?
<2020년 12월 31일>
2021년, 딸은 우리 나이로 열 살, 3학년이 됐고, 난 우리 나이로 쉰 살, 18년 차 카피라이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