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의 계절은 끝난다.

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16

by 최영훈

외모에 관심을 갖다.

열 살의 소녀가 외모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하다. 외모에 관심을 갖고 꾸미지 않아도 은채는 또래에 비해 키도 크고 피부색도 까무잡잡해서 눈에 띈다. 게다가 흔치 않은 숏 커트를 해서 반 친구 무리에 섞여 나와도 대번에 알아볼 수 있다. 또 보다시피 가방 색까지 요란해서 더 그렇다. 이렇게 눈에 띄면서도 더 예뻐지고 독보이고 싶은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생기고 있다.


얼마 전에는 삼촌과 잡화점에 갔을 때 싸구려 틴트를 사 왔다. 혹시 모를 아빠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틴트는 입술에 바르는, 립스틱 같은 것이다. 삼촌한텐 엄마 몰래 사는 것이니 비밀을 지켜달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우연히 영수증을 본 엄마한테 대번에 들켰다. 아내는 한번 발라 보라고 했다. 동백꽃보다 진한 붉은 입술이 됐다. 지우기가 쉽지 않았다. 아내는 그런 건 비싼 거 사야 한다면서, 나중에 때가 되면 엄마가 비싼 거 사줄 테니 몰래 싸구려를 사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런 분야는 여자들의 전문이라 모른 척 헛기침만 할 뿐이었다.


칭찬은 아무렇지 않게

그러던 어느 일요일, 아내가 금요일에 마트에서 사 온 닭갈비를 먹기로 하고 은채와 양배추를 사러 갔다. 일요일인데도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한터라 모처럼 모자를 안 쓰고 외출하는 일요일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지고 있는 햇살이 부녀의 오른쪽 뺨을 물들이고 있었다.

"아빠, 햇살을 얼굴에 받으니까. 피부도 좋아 보이고 빤질빤질하다."

은채가 내 얼굴을 보며 칭찬을 했다. 유분이 많은 얼굴이라 세수를 안 하고 나가도 햇살에 반짝이는데 세수를 하고 로션까지 발랐으니 유난히 반짝였던 모양이다.

"아, 그래? 오늘 오래간만에 샤워도 하고 로션도 좀 발랐거든. 티 나?"

"응 티나. 근데 아빠. 나도 세수하고 그러면 티 나?"


은채는 주말엔 대충 세수 비슷한 걸 하고 종일 잠옷 같은 편안 옷만 입고 지내는 터라 갑자기 궁금했던 모양이다. 별생각 없이 금방 답을 해줬다.

"너나 엄마같이 예쁜 사람은 뭘 해도 티 안 나. 씻어도, 화장을 해도 말이야. 엄마도 헤나 염색이나 해야 좀 티가 나지. 그러니까 얼굴에 칠하고 주렁주렁 달면서 예뻐진 거 티 내려고 너무 애쓸 필요 없어. 돈 들여 봐야 애초에 예쁜 사람들은 차이가 별로 안 나니까."


외모에 대한 대화를 할 때는, 그리고 딸과의 대화가 엄마한테까지 흘러 들어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걸 감안하고 은근슬쩍 엄마 칭찬을 곁들여야 한다. 업계에서 통용되는, 대부분 아는 용어로 말하자면 일종의 간접광고로 볼 수도 있고, PPL로 부를 수도 있겠다. 뭐 약간의 저렴한 비즈니스 용어를 쓰자면 팜 오일이나 기름칠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고 말이다.


엄마를 따라한다.

어찌 됐든 외모의 강박에서 자유롭게 해주려고 한다. 건강을 위해서 씻는 거지 예뻐지기 위해서 씻는 건 아니고 뭘 바르는 것도 피부건강을 위해서 바르는 거라고 가르쳐 왔다. 대 여섯 살 때부터 장난감 귀걸이나 목걸이, 반지 같은 걸 하는 걸 좋아했지만 그런 거 없이도 우리 딸은 충분히 예쁘다고 말해줬다. 다행히 자기 엄마처럼 아빠가 예쁘다고 하는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곧이곧대로 믿었다. 초등학교 2학년쯤 되자 아빠로부터 예쁘다는 말을 끌어내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부터는 예쁘다는 말을 기꺼이 좋아했다.


3학년 즈음부터 슬슬 질문이 구체화된다. 어떤 옷을 입었을 때 예쁜지 물으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예쁜지 말해야 한다. 색이 잘 받는지, 디자인이 잘 받는지 등등을 말이다. 딸 가진 아빠들이 알아야 할게, 일기 예보는 소풍 갈 때만 보는 게 아니다. 하루의 옷차림은 일기예보에서 결정된다. 특히 겨울엔 아주 중요하다. 은채도 아침에 일어나서 함께 뉴스를 보며 등교 준비를 하다 보니 엄마가 하는 짓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옷을 입으러 안방에 들어갈 때마다 “오늘 비가 온 단 말이지.”, “아하, 갑자기 추워졌단 말이지.”, “바람이 많이 분다고?”등의 말을 중얼거린다. 생각해보면 빌라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병원의 지하 주차장까지 가서 지하 2층의 사무실로 출근하는 사람이 굳이 아우터에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싶지만, 그게 또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종종 병원 밖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고, 근처 카페에 가서 테이크아웃도 하고 산책도 하니 날씨에 따라 겉옷을 바꿔 입는 건 무지하게 중요한 모양이다.


이런 엄마를 보고 자란 딸도 2학년 말 겨울부터는 일기 예보를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다른 점은 엄마처럼 중얼거리는 대신 나나 엄마에게 묻는다는 것이다.

“아빠, 영하 2 도면 새로 산 점퍼를 입어야 돼?”

“엄마, 비 오면 핑크색 방수 레인코트 입어야 되지?”

“아빠, 두꺼운 바지 입어야 돼?”

이런 질문들은 다시 장갑을 껴야 하는지, 머플러를 둘러야 하는지, 모자를 써야 하는지 등으로 이어진다. 심지어 양말 두께도 고민한다. 2학년 말에 맞은 겨울엔 북극한파가 몰려와서 부산도 영하 10도 언저리를 경험했기에 방한화도 사줬다. 이러다 보니 온도에 따라 어떤 신발을 좋을지, 까지 묻곤 한다. 그런 질문에 최대한 성의껏 대답해줘야 한다.


질문의 시간이 끝나기 전에

고등학생 딸을 키우는 동료 감독이 말하길, 중학교쯤 올라가면 삶의 모든 문제를 친구에게 묻고 답을 얻는다고 한다. 감독은 어느 순간 딸이 아무런 질문을 해오지 않자 말 그대로 멘붕에 빠졌다고 한다. 엄청난 우울감이 몰려왔고 말이다. 그러니 아빠가 세상의 모든 백과사전이자 알파고인 시간은 짧다. 그러니 섣불리 “너 스마트 폰 사줬잖아. 검색해 봐.”, “그건 저번에 사 준 책에 나와 있을 걸?”, “그건 엄마한테 물어봐” 따위의 대답을 하면 안 된다.


집에서 뭘 하고 있든 딸이 나타나서 질문을 하면 고개를 들어 딸과 눈을 마주치고 아주 천천히 대답해준다. 검색을 해도 같이 한다. 고민을 해도 같이 한다. 장갑이 서너 개 있고, 머플러도 서너 개 있어서 그 중 하나를 골라주는 것이 자장면과 짬뽕 중 뭘 먹을지 선택하는 것보다 백배는 어렵지만 그래도 함께 궁리 한다.


다시 말하지만, “질문하는 딸”이 늘 그럴 거라는 기대는 일치감치 접고 지금 질문을 갖고 오는 저 작고 귀여운 여자에게 눈높이를 맞추자. 그 문제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이나 카피나 홍보 영상 시나리오보다 훨씬 하찮은 것이고, 그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필즈상이나 노벨상 같은 걸 받지는 않겠지만. 대신 “와, 아빠는 정말 모르는 게 없어.”와 같은 칭찬 상을 받을 것이다. 딱 이때만 받을 수 있는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