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꽃피우는 시간

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17

by 최영훈

복잡해진 시험

질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3학년이 되니 학업 관련 질문도 상당히 수준이 높아졌다. 2학년 때까지는 솔직히 문제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우리가 잘 아는 4지 선다형 문제가 나오더라도 보기의 문장은 심플했다. 시험이라고 해 봐야 받아쓰기가 그야말로 최고의 시험이고 나머지는 학력 평가를 위한 기본적 질문들이었다. 나 때와는 달리 산수라는 말 대신 수학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긴장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3학년 언저리부터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딸이 하는 수학 학습지에서는 4 각형이나 선을 이용한 나눗셈 문제도 나오고 2학년 때부터는 구구단을 통해 곱하기 나누기의 기본적 소양도 닦는다. 딸이 졸라서 사준 3학년 참고서를 미리 보니 보기가 보기다웠다. 사회나 국어는 제법 지문도 길어졌고 복합적이다. 보기도 맞는 답 두 개가 몇 번에 모여 있는지 찾는 문제도 나온다. 또 향교와 같은 제법 심도 있는 문화재에 대한 지식을 묻기도 한다. 물론 개학하면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겠지만 2학년과 3학년의 차이는, 뭐랄까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 어찌 됐든 성적의 차이가 제법 나겠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다.


건강이 우선

그렇다고 딸의 성적에 대해서 크게 걱정을 하냐면, 그것도 아니다. 나도, 아내도, 은채도 마찬가지다. 앞서 말했듯, 은채가 초등학교 들어가고 나선 늘 초등학생의 기본 소양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기만 해도 기본은 먹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얘기해줬다. 여기에 아침에 잘만 일어나면 학교생활에 큰 문제없다고 해줬다. 아이가 이 네 가지를 다 잘하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아이 키워 본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다행히도 은채는 음식을 가리지도 않고 큰 볼일도 내가 작은 볼 일 보는 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 안에 보고 나오고 잠도 “아, 오늘은 잠이 안 오는데 자꾸 일찍 자래.”하고 투덜거리다가 누워도 바로 잠드는 스타일이다. 그러니 나나 아내나 이런 쪽으론 걱정해 본 적이 없다. 물론 은채도 조심하는 것들이 있다. 색소 알레르기가 있어서 코팅된 초코볼 같은 건 안 먹는다. 뭐 그렇다고 기도가 붓거나 숨이 가빠지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고 두드러기 같은 발진이 살짝 나는 정도지만, 그래도 조심하고 있다.


얘기가 좀 옆으로 샜는데, 어찌 됐든 딸은 초딩의 기본 덕목을 잘 갖추고 학교에 간 터라 그것만 유지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은채는 유지, 그 이상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라 수업 시간에도 불꽃같은 집중력을 보여주고, 어른 같으면 견갑골이 뻐근할 정도의 횟수로 손을 드는 듯하다. 특히 2학년 때 선생님이 하루에 손을 드는 횟수와 발표 횟수의 할당량을 정해주셔서 아이들이 나름 열심히 해야 했지만 말이다.


앞서 말했듯, 2학년 때 선생님은 코로나19의 재난 속에서도 아이들이 최대한 학교생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갖은 애를 쓰셨다. 특히 학습 과정의 참여에 많은 신경을 쓰셨다. 뉴스에 많이 나오는 학습 격차 해소와 사회성 감소 최소화를 위해 그야말로 교육 일선에서 눈물겨운 투쟁을 하고 있다는 게 딸을 통해 전해졌다. 아이들 하교 때마다 선생님들이 일일이 통제해서 데리고 나오시고 2학년 겨울방학이 끝나자마자 3학년 때부터 하게 되는 온라인 수업에 적응하도록 줌 수업을 하기 시작하셨다. 은채도 이런 과정들을 열심히 따라갔다.



미술상의 정체

2학년, 한 해 동안 은채는 좋아하는 미술 학원에 가지 못했다. 그래도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여름 방학 때는 캐릭터 그리기와 같은 책을 사달라고 해서 두 권 사줬다. 열심히 따라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색칠을 하며 여름 방학을 보냈다. 그러던 2학년, 11월 첫 주의 금요일 학교 갔다 집에 오더니 이런 말을 했다.

“아빠, 나 월요일, 학교 갈 때 좀 일찍 가야 돼.”

“응? 왜?”

“저번에 애들하고 평화 공원 가서 동화책 내용으로 그림 그렸다고 했잖아? 그거 반 대표로 상 받아.”

“아 그래?”


저녁때, 퇴근한 엄마에게 같은 말을 했다. 이러저러한 상황을 물어보고, 우리가 대충 파악한 상황은 이랬다. 가을에 근처 공원에서 책을 주제로 글짓기를 했다. 그때는 대회인 줄 모르고 다들 열심히 그렸던 모양이다. 어찌 됐든 그중에서 은채가 반 대표작으로 선정됐고 월요일 아침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한테 직접 상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일찍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 교장 선생님한테 상 받은 적 있어?”

“나? 없지. 당신은?”

“나도 없지.”


약속대로 아내는 은채를 일찍 학교에 데려다줬다. 수업이 끝나고 은채를 데리러 갔다.

“어때, 상 받는 거 잘했어?”

“응 아빠, 그런데 반 대표가 아니라 학년 대표던데.”

“응? 진짜?”

“응. 아침에 교장실 가서 알았어. 한 학년에 한 명씩 왔더라고.”


그러니까 요약하면 은채의 상은 반대표상이 아니라 학년 대표에게 주는 상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은채의 설명을 다시 들으며 놀라워했다. 그러다 화요일에 학교 데리러 갔더니 자기 작품이 복도에 전시되어 있다고 말했다. 결국 수요일, 학교에 데리러 갔을 때는 내 스마트 폰을 주면서 그 전시된 걸 찍어오라고 했다. 학부모는 학교에 들어갈 수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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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어온 사진을 보니 전체 내용에 윤곽이 잡혔다. 요약하면 그날의 그림 행사의 공식 명칭은 <2020학년도 책사랑 글사랑의 날>이었고, 은채가 본의 아니게 출전한 분야는 2, 3학년을 대상으로 한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기> 부분이었다. 이 부분에서 은채는 우수상을 수상했고 그 시상식이 월요일에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은채의 작품이 2학년 중에서 상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 모양이다.



우리도 한 때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아내가 “이런 딸이 어디서 나왔나?”하면, 딸은 엄마의 도톰한 배를 만지면 “여기서 나왔지.”하고 맞장구를 친다. 뭐 딱히 나도 부정은 안 한다. 그렇다고 아내도 마냥 자기 닮았다고 우기지도 않는다. 우리 둘 다 비교적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아내는 장인어른이 직업 군인이었던 탓에 여러 곳으로 이사를 다녔다. 그러니 한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서 선생님 눈에 띌만한 시간이 없었다.


나 같은 경우는 초등학교 때부터 의정부 한 동네에서만 이사를 열 번 넘게 다닐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던 지라 과외활동은 물론이고 학업에 충실하기 어려웠던지라 학업으로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다. 중학교 때에는 그나마 글은 좀 잘 써서 국어 선생님들 눈에 좀 들었을 뿐, 대부분 도와줘야 하는 가난한 학생 중 하나였다. 덕분에 선생님들에게 제공되는 출판사의 고급 참고서나 문제집을 얻어 쓰곤 했다.


아내나 나나 대학에나 가서야 좀 두드러지기 시작했고, 특히 나 같은 경우엔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사회성도 높아지고 리더십 비슷한 것도 생겼다. 대학 졸업과 함께 IMF를 맞아 본의 아니게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더 했고, 석사 학위를 받았을 때는 2001년 경제 위기와 맞물려 있어서 취업엔 번번이 실패했다. 카피라이터 일도 그런 실패 끝에 들어간 이상한 온라인 신문사에서 생활정보지를 들추며 전화 걸 곳을 찾다가 본 구인광고가 눈에 들어와서 지원한 것이 계기가 돼서 시작한 것이었다. 막상 시작하고 나서야 내가 가래떡처럼 글을 잘 뽑아낸다는 것을 알고 천직으로 알고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도 제법 공부를 잘했던 때가 있었다. 어머니에게 “우리 아들이 천재가 아닐까?”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총명해 보였던 적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건 파주.에서 보냈던 초등학교 1, 2 학년 시절 한정판 나다. 3학년 때 의정부로 이사 한 후, 처음 받은 통지표에 <미>가 있는 걸 보고 어머니가 안정제를 드셨던 건 아직도 기억난다. 1, 2학년 때 두각이 평생 가실 줄 기대하셨던 모양이다. 그 뒤엔 워낙 집이 가난하다 보니 이렇다 할 기대를 안 하셨다. 그저 학교라도 졸업시켰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어느 순간부터 생기셨던 것 같다.

아내는 장녀의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다. 많은 걸 양보해야 했다. 아내가 예체능을 배운 건 피아노 학원 몇 개월 다닌 게 전부라고 한다. 졸업 후에는 바로 병원에 취업해야 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왔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예체능의 재능이나 대범함은 아내 쪽이 더 있다. 아내는 초등학교 때 치어리더를 할 정도로 사람들 앞에서도 긴장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물론 나도 스무 살 무렵에 배운 기타 덕에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앞에 종종 서곤 했고 대학에 가서 기숙사 행사 때 종종 앞에 서곤 했지만 무대 체질이라면, 역시 아내가 더 강하다.


어찌 됐든, 둘 다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하는 건 잘하는 편이다. 아내는 오랫동안 교육 프로그램을 해 왔고, 나 또한 대학 강사 시절에는 강의하면서 일주일에 스트레스를 푼다고 말할 정도로 강의 자체를 즐기는 타입이었다. 은채는 이런 엄마 아빠의 장점을 적당히 섞어 갖고 있는 듯하다. 흥이 많은 것 같지는 않은데 막상 어린이집 행사 때 춤추는 거 보면 열정적이다. 1학년 때는 자기 말로는 떨었다고 하는데 공개 수업 때 선생님 도우미 역할도 잘 해냈다.


딸이 학교에서 이런저런 두각을 나타내고 선생님들의 공식적인 칭찬을 건너 듣다 보면 기분이 묘해진다. 우리도 좀 집안이 여유로웠으면 이렇게 학교생활을 잘했을까? 우리도 미술학원이나 방과 후 교실에서 다양한 걸 배우고 경험했으면 더 좋은 어린이로 성장하고 더 괜찮은 어른과 인재가 됐을까? 이 답이 없는 질문을 아내와 나누곤 한다. 그러면서 이런 다짐도 한다. 우리가 못한 한을 풀겠다고 애를 닦달하지는 말자고. 지금의 성과를 계속 이어가라고 재촉하지는 말자로 말이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고, 잘 일어나고, 여기에 아프지 않아서 결석 없이 한 학기, 한 학기 학교 잘 다니는 것. 이것은 초등학교 저학년의 덕목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평생의 가장 큰 덕목이자 축복이라고 생각하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