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기억

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19

by 최영훈

방한 텐트 속 대화

"누워보세요"

“네”

"안아 주세요"

“네”

무슨 80년대 멜로 영화 같은 대사지만 겨울밤마다 딸과 나누는 대화다.

겨울이면 딸은 보온 텐트에서 잔다. 건조해지지 말라고 그 안에 빨랫줄 같은 걸 만들어 수건을 적셔 걸어준다. 밤 열 시 언저리, 딸이 자러 들어가면 난 수건을 적셔 짜서 딸 텐트로 간다. 그러면 종종 저런 대화를 한다.

대화를 하지 않아도, 딸이 잠자리를 정리하고 누우면 잠시 후 나도 따라 옆에 눕는다. 들어가서야 실감한다. 텐트 안이 얼마나 아늑한지. 그 텐트에 딸이 있어서인지, 보온텐트의 효능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들어가 잠시 옆에 누워있다. 함께 이불을 나눠 덮고 “아이고 좋다.”, “아이고 따셔라.” 같은 감탄사를 서로 번갈아 가며 연발한다. 그러고 난 뒤, 딸은 꼭 “안아주세요.”라고 말한다. 몇 개월 전부터 안대를 쓰고 자는 버릇이 생긴 후 늘 잘 때마다 쓰는 빨간색 줄무늬가 있는 안대를 쓰고 아빠를 등지고 모로 누운 채로 말이다.


딸을 꼭 안아준다. 딸이 잘 자기 위한 행사인지, 아빠의 마음을 따스함으로 채운 후 그 온기에 힘입어 겨울밤을 잘 보내기 위한 행사인지 알 수는 없다. 그렇게 잠시 안고 있다 볼에 뽀뽀를 하고 얼굴을 부빈 후 “잘 자.”라고 말해준다. 딸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 둥근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말한다. 이미 목소리엔 잠이 찾아왔다. 딸에게 아빠는 거기 늘 있는 사람이다. 부르면 언제든지 올 거라는 의심 없는 존재다. 추억의 만화 <짱가>의 가사처럼 어디선가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빠는 언제나 달려와 줄 것 같은 존재다.



아비 노릇을 배운 적이 없기에

결혼하기 전, 연애할 때부터, 아내에게 애는 낳지 말자고 했다. 좋은 아빠 노릇을 본 적도 배운 적도 없어서였다. 내 아버지가 하나밖에 없는 딸, 그러니까 내 여동생에게 다정함을 보여준 기억이 없다. 무슨 말을 해줬고, 어떤 선물을 사줬는지도 기억에 없다. 안아준 기억도, 볼에 키스를 해준 기억도 없다. 여동생이 아버지에게 달려가 와락 안긴 기억도 없다. 아버지가 여동생에게 잘 자라고 말해 준 기억도 없다. 여동생이 애교를 부린 기억도, 아버지가 여동생이 귀엽다며 그 볼을 꼬집어준 기억도 없다. 물론 나와 아버지와 함께 만든 기억도 없다. 기억이 없기에 막연했고, 막연했기에 두려웠다.


아내도 동의했다. 결혼하고 5년은 그렇게 애 없이 살았다. 뜨거운 신혼도 아니었고, 잉꼬부부도 아니었지만 무난한 5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의 마음이 변했다. 아이를 낳자고 했다. 난 ‘네가 먼저 낳자고 말했으니 네가 책임져라.’라는 심정 끝에 승낙했다. 마침 처가도 손주를 기다리셨고 낳기만 하면 키워줄 태세였다. 아내의 직장이 좋으니 낳으면 어떻게든 키워지겠지, 그렇게 무책임한 생각 끝에 낳기로 했다. 합의를 끝난 후 아내는 적극적으로 노력(?)했고 결실은 빨랐다.


이때가 가장 예뻤다.

아내와 연애하기 시작한 후 20년 넘게 아내를 봤지만, 이때가 가장 예뻤다. 임신한 기간 동안 가장 아름다웠고 가장 사랑스러웠다. 아내는 마침 이 시기 차를 없애고 지하철을 타고 다녔는데 집 근처 지하철역에서 퇴근하는 아내를 기다리는 시간이 결혼 후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내는 지하철에서 병원까지 매일 십 분 정도 걸어 다닌 덕에 임신 전보다 더 건강해졌다.


딸이길 바랐다. 나 같은 아들이라면 꼴도 보기 싫을 것 같았다. 나 같은 사람은 나 하나로 족하다는 생각이었다. 태중에 아이가 딸인 걸 확인할 때는 산부인과까지 따라갔다. 딸의 태명은 강이었다. 건강하게 자라라고 그렇게 불렀다. 말 그대로 건강하게 자랐다. 돌콩이라고도 불렀다. 초음파 사진을 보니 모든 게 동글동글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은채가 태어나고 만 9년. 아이를 키우면서 아빠가 됐다. 깨끗한 옷을 입히고 싶어서 그리 했고,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어 그리 했다. 아늑한 잠자리에서 잠들기 바랐기에 그런 잠자리를 만들어줬고, 안전하게 학교 다니길 원했기에 함께 갔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래야한다고 말해주거나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리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듯 생겨 그리 아빠 노릇을 했다. 그렇게 아빠가 되어 가면서 딸에게 조건 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세상에 태어나보니 이 남자가 아빠여서, 아빠이기 때문에 사랑을 준다. 딸이 크면서 아빠는 딸을 위해 왕자도, 악당도, 괴물도, 로봇도, 디자이너와 만능 수리공과 제작소도 된다. 그리고 결국 쓸만한 아빠도, 쓸만한 인간도 된다. 배우지 않아도 딸의 사랑이 한 남자를 좋은 아빠로 빚어낸다.


딸이 묻는다.

“아빠, 나 동생 낳아주면 안 돼?”

엄마가 답한다.

“아이고 엄마가 이제 나이 들어서. 미안.”

“좀 일찍 낳지 그랬어.”

아빠가 답한다.

“너 같이 예쁜 딸이 나올 줄 몰랐지.”

그러면 딸은 빙그레 웃는다. 그리고 뭔가 또 꼼지락 거리며 뭘 한다. 작은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뭔가를 한다. 그 손과 얼굴, 그 얼굴 위로 흘러내린 짧은 머리칼을 번갈아 본다.



좋은 아빠나 좋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모든 것이 진행형이다. 아빠도, 남편도, 인간도, 카피라이터도, 작가도...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여전히 분투 중이다.


다시 미스터리다. 삼십 대 중반엔 아버지를 이해했다. 그러나 딸을 키우면서 아버지는 다시 미스터리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아니 어쩌면 그전에 없던 분노가 생겼는지도. 딸을 키우는 아빠라면 딸을 그렇게 대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 절감됐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