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베이비

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21

by 최영훈

키우기 쉬운 자식이 효녀다.

딸은 키우기 쉬웠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쌌다. 영아기 때 이 세 가지 미션을 잘 해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러나 그것이 부모의 기대만큼 의외로 술술 되는 것이 아닌지, 자식을 키워본 이라면 다 알 것이다. 태생적으로 입이 짧은 아이도 있다. 잘 먹던 아이도 어느 순간 음식을 가리기 시작한다. 돌 지나면 밤새 좀 잘 자겠거니 하는 기대를 가지며 일 년을 버텼지만 그 후에도 잠을 안 자서 잠잘 때만 되면 애를 데리고 드라이브를 한다는 아내의 직장 동료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애가 변비라도 걸리면 엄마가 변기에 앉은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힘을 주고 장에 좋다는 푸성귀 박사가 된다. 유산균도 먹이고 물도 많이 먹이지만 좀처럼 안 나오는 그놈 때문에 배 마사지를 하고 관장을 하고, 심지어 응급실로 달려가는 엄마들도 많다. 그러니 분명히 저 세 개만 잘해도 애 키우는 건 수월해진다.


물론 모든 걸 잘 먹는 딸이기에 어떤 음식은 뒤로 미루거나 영원히 몰랐으면 하는 것도 있었다. 탄산음료나 젤리 같은 것도 안 먹었으면 했지만 어린이집을 가니 자연스럽게 친구들에게 배웠다. 심지어 탄산음료는 세 살 때 미국에 갔을 때 이모에게 배웠다. “미국에서 햄버거를 먹으면서 어떻게 탄산음료 없이 먹을 수 있냐.”며 말이다.


아빠 노릇? 그럭저럭 하게 되더라.

정성? 글쎄 내가 딸한테 들인 정성이 있을까? 딸이 안아달라고 할 때 안아줬다. 도와달라고 할 때 도와줬다. 가르쳐 달라고 할 때 가르쳐줬다. 배고프다고 하면 밥을 줬다. 은채가 밥을 먹기 시작하자 제철 음식을 해주고 싶었다. 한 번도 안 끓여봤지만 쑥이나 냉이, 아욱을 넣은 연한 된장국을 종종 끓여줬다. 딸이 좋아하는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를 더 잘하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한 적도 있다. 면을 삶을 때 타이머를 켜기 시작했고 더 맛있는 소스를 찾기 위해 여러 회사의 소스 앞에서 고민한 적도 많았다. 더울 땐 시원하게, 추울 땐 따듯하게 입혀줬다. 걷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유모차에 태우고 다녔다. 봄에는 벚꽃과 바다 채송화, 그리고 옆에 옆에 집 화단에 핀 술붓꽃을 보려 다녔다. 길가에 핀 많은 꽃들의 이름을 묻기 시작해서 꽃 이름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금강초롱과 낮달맞이꽃을 알게 됐다. 집 앞 공원에서 새를 구경했다. 딸이 어린이집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는 걸어서 십오 분 거리를 일 년 동안 거르지 않고 유모차에 태워 다녔다. 비가 오거나 쌀쌀한 날에는 커버를 씌워 다녔다.

크게 아픈 적도 없다. 돌도 안 됐을 때 갑자기 열이 나서 병원에 입원했었고, 1학년 겨울의 크리스마스 때 독감에 걸려서 아빠와 삼일 밤을 병실에서 지낸 게 다다. 살이 찐 거 같으면 운동을 시켰고 더 키가 크라고 엄마는 한약에 성장침도 맞게 해 줬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많이 놀아주셨고 많은 걸 가르쳐주셨다. 삼촌은 게임을 가르쳤고 고기 먹는 동료로 키웠다. 아기가 크면서 겪어야 하는 모든 단계를 수월히 넘어가 준 아이다.


나름의 역할을 충실히 했을 뿐, 정성을 들였다고 말하기에는 민망하다. 순리대로 크는 아이를 순리대로 보살폈다. 돌잔치 때 손님들에게 내가 했던 말처럼, 흙처럼 물처럼 무난한 사람이지만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 키우겠다는 다짐처럼 딸은 그렇게 커 줬다.


키우기 쉬웠던 아이가 초등학생이 됐다. 초등학생이 돼서도 때 되면 자고 일어난다. 공부할 때는 공부하고 쉴 때는 쉰다. 원하는 콘텐츠가 있으면 알아서 찾아가고 안 봤으면, 좀 적게 봤으면 하는 건 말하면 알아듣고 알아서 조절한다. 책도 좋아하고 운동도 좋아하고 음악도 좋아한다. 혼자도 잘 놀지만 친구와도 잘 어울리고 수업시간엔 집중한다.


무슨 복인지 초등학교 3학년까지만 놓고 봤을 땐 완벽한 아이다. 지금도 자기 방에서 옷을 골라 와서 뉴스 보는 아빠 옆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엉덩이를 실룩거리는 아이다. 아빠에게 안기는 걸 좋아하고 나도 안는 걸 좋아한다. 우리는 서로를 안은 채 한참 충전하고 휴식을 얻는다. 이제는 손 힘도 늘어서 어깨를 주무르면 제법 시원하고 몸을 떼려는 아빠를 확 끌어안아 더 꼭 안을 수도 있다. 퍼펙트 베이비의 epiphany, 현현(顯現)이다.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모든 자식이 그러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