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34
"아빠. 오늘 도덕 시간에 선생님이 "운동회에서 달리기 1등 하고 있는데 2등으로 오던 친구가 넘어지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물어보셨는데 여자애들은 다 친구를 부축해서 보건실에 가요. 넘어진 친구를 도와줘요. 함께 천천히 걸어가요. 이런 대답을 했거든? 근데 남자 애들은, 도와주고 금 하나를 달라고 해요. 보건실에 데려다주고 맛있는 걸 얻어먹어요. 업고 뛰어서 내가 먼저 들어가요. 질질 끌고 가서 내가 1등 해요. 이렇게 대답하는 거야. 어떤 남자 애는 아싸 개꿀 이러고 1등 해요라고 대답했다니까."
그러고 나서 반 친구들이 다친 친구와 함께 들어오는 영상을 함께 봤다고 한다. 단원 제목은 <너, 나 우리 함께>였다. 단순히 생각해 보면 여자 애들은 정답을 말했고 남자 애들은 정답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의 질문이 맴돌았다. 남자 애들은 정말 공감 능력이 없는 걸까?
흔히 여자 애들이 남자애들보다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아들 키우는 법을 조언해주는 전문가들도 그렇게 얘기하고. 그런데 이 공감능력이 일반화시킬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또 어떤 이들은 공감을 해도 그 표현력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딸의 반에도 공감 능력이 좋아서 여자 애들과 대화를 잘하는 아들이 있다. 예를 들어 딸 뒤에 앉은 아들은 "네 뒤에 앉아서 좋다. 다행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딸이 과제 내용을 설명해주거나 미술시간에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어떤 친구는 딸에게 다가와서 "야 넌 발표 잘한다. 어디 학원 다니니?"같은 접대용 멘트도 할 줄 안다. 또 어린이집 친구였던 재하도 엄마에게 상냥하고 엄마가 필요한 걸 귀신같이 눈치채고 미리 갖다 주는 아들이다. 이런 아들을 흔히 딸 같은 아들이라 칭한다.
문제는 이 공감 능력이 눈치와 별 다를 게 없는 의미로 사용되거나 바디 랭귀지나 표정과 같은 비명시적 텍스트의 해석 능력의 차이를 말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2학년 성적표에 선생님이 가정에서 보내는 글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질문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 올바른 대답을 한다." 이런 질문이 수학이나 과학이 아닌 도덕이나 윤리 같은 토론에서의 질문일 경우 딸들은 선생님의 질문 의도를 더 빨리, 정확하게 파악하는 거 아닐까? 비명시적 텍스트 해석 능력에 차이가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의문의 기원엔 딸의 입학식이 있다. 입학식에 가 보니 남자 선생님이 거의 없었다. 딸도 지금까지 담임선생님은 다 여자분이셨다. 알다시피 의사소통에서 비언어 의사소통이 차지하는 비율은 65퍼센트 이상이다. 여기엔 눈빛, 표정, 손짓, 몸짓, 말투와 톤 등이 포함된다. 당연히 딸들은 이 비언어적 메시지 해석 능력이 뛰어나다. 비명시적 텍스트, 즉 말, 글을 제외한 텍스트 해석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딸 같은 경우 선생님의 옷차림까지 기억한다. 이렇게 여자 선생님과 여학생이 대화할 때 소통의 누락이 제로에 가깝다면 여자 선생님과 남학생이 대화할 때 소통의 누락 비율은 어느 정도일까?
그래서 이런 질문을 이어할 수밖에 없다. 아들들은 정말 선생님의 의도를 몰랐을까? 이 날 밤에 곰곰이 이 상황을 상상하며 시뮬레이션해 봤다. 단원의 제목은 이러하고 선생님의 질문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정말 남자 애들은 소위 올바른 답을 몰랐을까? 심지어 몇몇 여자 애들이 적당한 답을 해서 선생님의 칭찬까지 들은 뒤였는데? 그 뒤에도 어떤 대답을 해야 선생님이 만족하실지 모를까?
서울에서 태어나서 경기도를 비롯한 수도권에서 서른까지 살다 이후 부산에서 살고 있는 남자로서, 그리고 최근 몇 년간 울산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경상도 남자의 어떤 대화법, 표현법이 느껴진다. 뭔가 도와줘도, 선물을 해줘도, 마음을 표현해도 그냥 하는 법이 없다. 그 액면 그대로의 마음 표현을 겸연쩍어한다.
예를 들어 상가 집에 갔다고 해보자. 그럼 뭐 이런저런 위로보다 한마디로 정리한다.
"야, 니, 밥은? 잠은?"
"괜찮다. 뭐하노? 앉으라. 밥 묵자."
뭐 이런 식이다.
돈을 꿔줬다. 그럼 생색을 낸다.
"니 그거 두 배로 갚으래이. 안 갚으면 콱 마."
그런데 나중엔 꿔 준 것도 잊어버린다.
얼마 전에 사무실 인테리어 공사를 감독의 후배이자 종종 협업도 하는 인테리어 감독에게 맡겼다. 한 날은 이 후배가 인테리어 공사를 위해 청소와 같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감독과 내가 도와줬어야 했는데 마침 그날 고객 미팅이 있어서 그 준비가 마무리될 무렵에서야 사무실에 갈 수 있었다.
감독과 후배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졌다.
"야~, 니 욕봤다."
"행님, 일찍 온 다매?"
이게 다다. 다 치우고 갈 때는 더 대화가 짧았다.
"행님. 거 내일 더 해야 되니까. 그짝 거 저짝으로 치워 노소."
어쩌면 아들들은, 특히 경상도 아들들은 아버지의 화법을 알게 모르게 배웠는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낯간지러워서, 여자애하고 다르게 보이려고, 여자애들이 말한 정답을 비틀어 말하거나 가볍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혹시라도 이런 대답들로 인해 아들들이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거나 심지어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고 오해를 사는 건 아닐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광고 학계와 업계에선 소비자의 정보처리에 대한 관여도와 이성적 광고와 감성적 광고를 무 자르듯 구분했다. 이런 제품은 관여도가 높으니 이성적으로 광고해라. 저런 제품은 관여도가 낮아 감성적으로 해라 이런 식으로 가르쳤고 배웠다. 그러나 요즘엔 수학도 내러티브를 이해해야 하고 도덕과 윤리도 경제학적이다. 때문에 남학생과 여학생이 두루두루 소통해야 감성과 이성, 좌 뇌와 우 뇌, 지덕체 등등이 균형 잡힌 성인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 끝에 쉰 언저리 유부남들끼리, 특히 딸 키우는 아빠들끼리 하는 농담이 생각난다. 딸 가진 아빠가 더 바람을 잘 피운다는 속설을 둘러싼 농담. 일리 있는 말이다. 딸과 대화하다 보니 비언어적 의사소통 능력이 높아졌다. 맞장구 스킬이 상승하고 경청의 스킬도, 아이 컨택 능력도 딸을 키우면서 엄청 늘었다. 말은 적게 하고 오래 듣는 자세가 형성됐다. 덕분에 미팅 자리에 가면 입을 여는데 까지 2,30분은 기본이다. 눈을 마주치며 오래 듣고 찬찬이 듣기 때문이다.
그러니 딸의 사춘기까지 성공리에 겪어낸 아빠라면 어지간한 여자하고의 대화쯤은 그야말로 식후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는 것만큼 쉽지 않을까? 반대로 얘기하면 엄마하고 대화를 많이 하는 아들들, 또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비언어적 의사소통이 뛰어난 아들들이 연애를 더 잘하지 않을까? 누나가 없거나 엄마와의 대화가 부족한, 내가 겪어본 대부분의 부산의 아들들은 수줍음이 많다. 커뮤니케이션이 서툴고 낯간지러운 말엔 투박한 단어와 톤을 입혀 내보낸다. 그 단어와 톤에 속아 그들의 마음속에 섬세한 감정들과 타인과 소통하고 싶은 간절한 갈망이 없다고 섣불리 속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제 하굣길의 조각공원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울산에서 전학 왔다는 은채의 반 친구, 사내 녀석이 앞에 가고 있었다. 딸은 그 친구에 대해 설명했고 우리의 대화는 그 친구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러자 그 친구는 아예 길을 벗어나 공원 잔디밭으로 들어가 버렸다. 결국 내가 다시 불러냈다. "어이 친구야. 이 길로 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