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41
누구나 자기만이 알고 있는 아픔의 리듬이 있다. - 바르트, 애도일기, 172.
삶에도 각자의 리듬이 있고,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슬픔과 아픔에도 리듬이 있다. 아픔의 리듬이란 단순히 어떤 통증의 방문 횟수만을 말하는 건 아닐 것이다. 또는 아픈 기억의 주기적인 부활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게 계절마다 찾아오는 아픔이 있다면 설령 그 아픔이 모두 다른 것들이라 하더라도 개별 아픔에 미리 대비할 수 있는 나름의 달력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내가 딸의 생일이 다가오면 형편 없어지는 컨디션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처럼.
나이가 어느정도 되면 24절기처럼 정확하지는 않아도, 때와 계절에 맞춰 밀려오는 아픔들이 있다. 오늘의 사건으로 아픔이 유발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 기억이나 상처들이 흐릿하게 남은 흉터처럼 마음 속에 저릿한 아픔을 불러 올 때가 있다. 어쩌면 바르트가 말한 리듬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련을 견뎌내며 제법 생을 살아낸 이만이 갖고 있는, 좋은 추억들의 플래쉬백처럼 때가 되면 밀물처럼 차오르는 아픔들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사회와 공동체에도 이런 공유된 아픔의 리듬이 있다. 잊고 있던 공통된 고통의 순간이 다가오면 환상통처럼 그 상실의 고통을 함께 겪는다. 없는 것을, 그 부재함을 응시하면서, 그 고통을 오롯이 느끼면서.
이렇게 아픔의 리듬이 일정하다면 그 고통에 대한 대비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는 아픔이 지난번과 같은 통증을 주리라 장담할 수 없기에 아픔과 고통은 매번 개별적이다. 결국 그 아픔의 림듬이 없어도, 일정한 리듬이 있어도 아픔이 주는 고통의 예측과 대비는 어렵다.
굳이 따져보자면 인생을 덮치는 대분의 아픔엔 리듬도 주기도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바다를 등지고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다 덮친 파도에 맥없이 휘청이며 쓰러지듯, 우리는 이 예고 없는 아픔에 쓰러져 한동안 못 일어나기도 한다. 자기만의 리듬이 확고한, 강한 사람이라면 아픔들로 인해 한 며칠 앓아누웠다가도 다시 회복한 뒤 자기만의 리듬을 찾을 것이다. 강한 태클에 중심이 흔들려도 이내 중심을 잡고 내달리는 손흥민 선수처럼 말이다. 그러나 평범한 우리는 인생이라는 필드 위에선 손흥민 선수 같은 월드 클래스급의 능숙한 존재이기는 커녕 서툰 아마추어이기에 휘청이며 앞으로 나아간다. 자신만의 리듬을 찾는 건 아주 긴 여정이 지나 서일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