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바를 먹으면 여름
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43
by
최영훈
Jun 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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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이 면 한 봉지가 8인분이거든."
"응."
"근데 아빠가 반 좀 안 되게 삶아서, 좀 많나 싶었는데... 아니네."
“그런 걱정을 왜 해.”
후루룩 후루룩
딸이랑 소바를 먹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여름이다. 달력과는 상관없다. 밖의 온도와도 상관없다.
무를 갈고 파를 잘게 썰어 따로 접시에 담고 적당한 밥그릇에 가쓰오부시 장국 조금에 냉수 약간, 얼음 동동. 거기에 고추냉이를 풀어준 후, “후루룩후루룩” 면치기 장인이신 따님의 먹방이 시작된다.
얼굴은 다들 자기 닮았다고 지분 주장하는 사람들 많지만 면 좋아하는 거와 엄지발가락만큼은 확실히 날 닮았다. 그것뿐인가 담백한 맛을 좋아하는 것도 나와 아내를 닮았다. 같이 사는 사람끼리 입맛이 닮은 것은 유전이기보다 문화려나?
입맛이 닮았다.
5월 중순의 일요일이었다.
"저녁에 떡볶이?"
아내가 물었다.
"저녁 메뉴론 좀 그러니. 그냥 소떡소떡 합시다."
일요일 낮에 떡볶이를 해 먹으려 단골 떡집에서 가래떡을 사 왔는데 어쩌다 보니 저녁이 됐다. 결국 소떡소떡을 해 먹으려 했는데 아내가 다른 메뉴를 궁리했다.
"베이컨 있으면 팽이버섯이랑 대파랑 말아 구우면 되는데."
"어쩔 수 없으니 담백하게 갑시다."
주방에서 분주한 엄마를 돕는다고 곁에서 꼼지락 거리던 딸이 부리나케 내게 왔다.
"아빠. 아빠, 아빠. 와~~~ 엄마가 파 안에 팽이버섯을 넣고 있어."
"그래? 뭐 어때. 파에 버섯을 넣든, 버섯에 파를 넣든 만드는 사람 마음이니까. 우리야 뭐 맛있으면 되지."
딸은 우리 입맛을 닮아 채소를 좋아하고 양파와 파도 잘 먹는다. 아내는 이 날, 과감히 대파에 팽이버섯을 넣어 구워냈다. 채소를 좋아하고, 구운 파를 좋아하는 술꾼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은 안주는 없다. 구운 파는 단맛이 더 강해졌다.
"여보, 그 뭐고. 스페인인가 어디는 파도 구워 먹는다카더니. 우리 대파도 구우면 맛있네."
술꾼치고는 고기보다 채소를 좋아한다. 이런 술꾼의 아내가 새로운 요리를 창작해 냈다. 아내의 이 요리의 레시피는 간단하다. 굵직한 대파에 팽이버섯을 쑤셔 넣고 기름을 두르지 않은 프라이 팬에 적당히 구운다. 간은 안 해도 된다. 파의 단맛으로 그 맛이 충분하다.
개인적으로 단짠이든 뭐든 잔 맛이 섞인 걸 별로 안 좋아해서 그냥 그대로 먹었다.
아비가 그렇게 먹으니 딸도 그리 먹었다.
삼촌을 닮아 고기를 좋아하고...
아비를 닮아 채소를 좋아하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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