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44
5월 말, 일요일 오전, 농구장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딸이 물었다.
"아빠는 나 유학 가면 따라와서 같이 살 거야?"
"응?"
"아니, 그 비자인가 시민권 같은 거 받아서 미국 와서 같이 살 거냐고."
"은채야 아빠가 그때까지 살면 생각해볼게. 아빠가 내일 죽을지 언제 죽을지 어떻게 아냐? 오늘 하루 행복하게 살자. 재미있게."
농구를 한 시간 정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침에 엄마한테 혼났던 게 생각났다.
"아까 엄마한테 왜 혼났어?"
"...."
"왜 물을 안 엎질렀다고 한 거야? 실수한 거 말하는 게 왜 싫어?"
"..."
"왜? 완벽해 보이고 싶어서? 뭐든 잘하고만 싶어서?"
"그냥 혼날까 봐."
"너 뭐 실수해서 혼난 적 없잖아. 네가 그걸 감추려고 해서 혼나지."
말을 이어갔다.
"아빠가 좋아하는 스테픈 커리 알지?
"응."
"그 사람도 삼점슛 성공률은 40퍼센트 정도야."
"저번에 TV에 나온 허웅인가 하는 선수도 38퍼센트가 그랬어."
"그래.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
"뭔데?"
"열 개 던지면 네 개 정도 들어간다는 거야. 보통 선수는 30퍼센트 정도야. 그런데 여섯, 일곱 개 안 들어간다고 슛을 안 던지면 서너 개도 안 들어가. 일단 던져야 돼. 아빠가 좋아하는 마이클 조던도 그랬어. 자기도 무지하게 슛을 실패했다고. 실패나 실수를 부끄러워하지 마 그건 일단 슛을 쐈다는 증거니까."
"아빠 인생은 실수와 실패 투성이야...
그리고 앞으로도 그걸 안하리라는 보장은 없어.
왜인 줄 알아?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어."
"뭔데."
"첫째는 세상이 변해. 어제 내가 산 세상과 오늘, 그리고 내일 사는 세상이 달라. 그러니 어제의 경험으로 오늘과 내일을 살다 보면 당연히 실수를 하게 되지.. 두 번째는 오늘이 처음이야."
"응?"
"은채는 열 살을 두 번 살 수 있어?"
"아니."
"아빠도 마찬가지야. 오십이든, 오십 하나든 한 번뿐이야. 그러니 우린 다 서투르고 실수해.
엄마랑 아빠가 네 곁에 있는 동안은 네가 어떤 실수나 실패를 하든 바로 말해. 어떻게 하지 망설일 시간에 빨리 수습해서 또 도전하고 새롭게 뭘 하는 게 더 나아."
...
딱딱해진 분위기에 농담을 풀었다.
"너네 엄마는 아빠에 비하면 완벽한 사람이야. 크게 실패한 적도 실수한 적도 없어. 아마 네 엄마 인생에서 최대의 실수가 아빠랑 결혼한 거 아닐까? ㅎㅎ"
농담은 진지해졌다.
"아빠 인생에선 자랑할만한 건 두 가지밖에 없어. 너하고 너 네 엄마.
어디 가서 마누라 백병원 다닙니다. 우릴 딸 반장입니다. 하면 폼 나잖아.. 하하"
기분이 풀린 딸은 내게 질문을 했다.
"아빠는 그럼 초등학교 때 꿈을 뭐라고 적었어?"
"글쎄 그건 기억 안 나고.. 중학교 때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꿈이었어. 거 왜 있지. 시골에 학생이 열 명도 안 되는 그런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조용히 사는 게 꿈이었어. 그런데 영어 선생님이 아빠 시를 읽고 나서 영문과 가서 교수하라고 하셨어."
"응? 왜?"
"애들이 네 정신세계를 이해하겠냐고..ㅎㅎ..
아빠 평생 가슴에 품고 사는 말이지."
"고등학교 때는 꿈이 뭐였어?"
"아... 그게.. 뭐 너도 이제 좀 컸으니까. 사실 아빠는 고등학교 안 갔어."
"응? 아빠도 그 어제 <놀면 뭐 하니>에 나온 임원희 아저씨처럼 고등학교 떨어진 거야?"
"하하. 그건 아니고... 그냥... 집에 돈이 없었어. 그래서 검정고시 봤어.
그래서 대학도 늦게 갔지."
"몇 살에?"
"스물넷."
"그럼... 스무 살에 보통 대학 가니까. 다른 사람 졸업할 때네?"
"그렇지. 여학생이라면... 어제 유재석 아저씨가 91학번이라고 했잖아."
"응."
"그게 91년도에 대학에 입학했다는 말이거든. 그 아저씨랑 아빠가 동갑이니까. 아빠도 제대로 갔다면 91학번이지."
"아빠는 그럼 몇 학번이야?"
"95학번. 아빠가 입학한 대학 광고홍보학과 1기였어. 대학 졸업하고 십몇 년 후에 대학 시절 교수님이 말해줘서 알았는데.. 과수석이었고. 1기에 과수석이 이러고 사니. 이것도 참 후배들한테 미안하지.
어쩌면 집이 좀 평범했다면 아빠도 썩 괜찮은 아들이었을지 몰라. 공부도 적당히 하고, 운동도 적당히 하고, 음악도 적당히 하고. 수도권에 있는 적당한 대학에 적당한 학과 들어가서 적당한 회사 들어가서 적당히 연애해서 결혼하고. 평범하게 나이 들었을지도. 이런 칼럼을 쓰는 작가니 카피라이터 같은 거 안 했을지도 모르지."
이 대화 뒤 한 달 후, 무더위 속, 딸을 방과 후 영어교실에 데려다주던 길이었다.
"아빠, 스무 살의 아빠에게 해주고 싶은 말 있어?"
"음... 한 세 개 정도?"
"뭔데?"
"교회 그만 나가라. 연애 많이 해라. 책 많이 읽어라."
"또?"
"지금 네가 생각하는 거보다 글 잘 쓴다. 그쪽으로 나가라."
"아빠, 몇 살부터 카피라이터 했는데?"
"서른 넘어서"
"그 전에는?"
"잡다한 거."
...
설명하기 힘든 일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일은 했지만 경력이라 말할 수 없는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열 평도 안 되는 원룸에서 매일 밤 TV를 켜 놓은 채 잠이 들었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삶에 아무도 없을 때가 있었다. 낯선 도시 부산에서 일 년쯤 버틴 후 찾아온 이른 봄, 우연히 생활 정보지에 난 카피라이터 모집을 보고 대행사를 찾아갔고 면접을 보고 카피라이터가 됐다. 그전까지 단 한 번도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 적 없던 직업이었다.
출근한 다음 날부터 뭔가를 쓰기 시작했고, 써졌고, 계속 써져서 직업이 됐다. 결국 이 일을 사랑하게 돼서 더 잘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다. 사수는 없었고 부산의 업계 사람들하고는 접점이 없었다. 결국 수 없이 많은 마케팅과 경제학, 카피라이팅 관련 책을 읽었다.
일 년쯤 후, 스카우트 비스름한 걸 당해서 이직을 했고 그 해에 강의 제안이 들어와서 강사 노릇을 시작했다. 가르치다 보니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결혼 한 뒤 무책임하게 회사를 그만두고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부산과 서울을 오가는 긴 시간이었다. 힘들었다. 체력적으로도, 공부의 수준과 양도 힘들었고 학회는 어색했다. 졸업 시험의 특정 과목은 계속 떨어졌다. 학위 논문 제출 기한이 몇 년 안 남았을 땐 집 주변 높은 빌딩들을 머릿속에서 더듬어보기 시작했다. 힘들어서 못해먹겠다고 하소연할 사람이 없었다. 꼴에 남자라고 그렇게 속을 감추며 살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결국 학위를 스스로 접었다. 삶의 의미도 접었었다. 딸, 은채가 아니었으면 더 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은유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부부 관계로든. 그렇게 살게 해 준 딸을 키우며 사랑하며, 이 별 볼일 없는 아빠를 한 없이 사랑해주는 딸의 눈망울을 보며 겨우 나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결심했다. 내 이름으로 글을 써야겠구나. 잘 쓰든 못 쓰든 뭐라도 써서 손에 들 수 있는 책을 만들어 아이에게 꼭 쥐어줘야겠구나. 이렇게 아빠로 살게 해 준 딸에게 꼭 아빠의 이름이 써진 책과 글을 쥐어줘야겠구나. 그렇게 다짐을 하고 아무 글이나 썼다. 첫 번째 잡 글을 모아 놓은 원고를 부산 지역 수십 곳의 출판사에 메일을 보냈고 그중 정말 무명의 출판사에서 책이 나왔지만 다시 보면 부끄러워 몇 년 전부터는 어디 가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비 출판이 아니라는 것에 위안을 삼을 뿐이다.
딸의 1학년 생활을 담은 책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베스트셀러를 낸 제법 유명한 출판사와 계약했지만 코로나19와 그 회사에 이상한 사장이 느닷없이 오는 바람에 계약이 파기됐고 결론적으로 계약금만 벌게 됐다. 그 후로도 이런저런 글을 쓰다가 석사 시절 동기와 인연이 닿아 칼럼도 쓰기 시작했고 브런치의 문도 열려 이렇게 글을 남길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아직 꿈이 뭐냐는 질문을 받았으면 한다. 아직 꿈이 남아 있으니. 딸이 언젠간 아버지의 책을 학교에 들고 가 “우리 아빠 작가다. 내 이야기를 책으로 쓰셨어.”라고 자랑하는 날이 오길. 그게 내게 남은 꿈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