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48
친구가 더 좋아지는 나이다. 전화와 카톡으로 지들끼리 소근 댄지는 꽤 됐는데 요즘엔 직접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 한다. 수업이 끝나고 방과 후 교실까지 잠시 틈이 나면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건너편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로 놀러 간다. 학교 가는 길에 친구를 만나면 아빠를 얼른 집에 보내고 친구와 어울려 가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서운함보다는 다행스러움이 앞선다. 친구가 딸을 반기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이 날도 등굣길 중간쯤에 규랑이를 만났다. 규랑이는 은채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아담한 친구다. 별명이 감귤인데, 뭐 예상했다시피 규랑이라는 이름이 귤을 떠올려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우리 집하고는 걸어서 오 분 거리라 이렇게 등굣길에 마주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규랑이만 규칙적으로 일어나면 같이 학교 가기 딱 좋다.
"은채야."
"어, 안녕"
"안녕하세요."
이 날은 바이올린을 하는 날이었다. 학교 도서관에 빌린 책이 들었던 무거운 책가방은 내가 메고 딸은 신발주머니와 바이올린을 들고 집에서 출발했다. 가는 도중 그마저도 아빠가 들어주면 안 되냐고 했었다. 그랬는데...
"오늘은 짐이 무거워서 규랑이랑 둘이 못 가겠다."
"아냐. 괜찮아. 이리 줘."
그렇게 책가방 메고 신발주머니, 바이올린을 양손에 들고 규랑이랑 뒤도 안 돌아보고 갔다. 그렇게 바이올린 가방과 책가방의 무게도 잊을 만큼 친구와 함께 가는 길은 즐거운 모양이다.
사람이 모가 나서인지 친구가 없다. 함께 일하는 감독이 친구이자 동료이고, 아내 또한 연인이자 친구라면 친구다. 부산에 와서 교회를 다니면서 사귄 성악가 친구가 있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연락이 뜸해지고 사는 모양새가 서로 다르다 보니 서먹해졌다. 또 작년만 해도 무슨 이야기를 해도, 무슨 짓을 해도 마음이 편한 소울 메이트가 있었으나 그 이의 일상이 녹록지 않아 그 삶에 충실하라고 했다.
이렇게 빈곤한 인간관계의 핑계를 대자면 여기저기 떠돌아 살았다는 건데 이게 핑계가 될지 모르겠다. 때문에 동창회, 동문회, 향우회 같은 데 소속된 적이 없다. 아내 같이 큰 직장에 다니거나 협회 활동을 하면 그럭저럭 느지막이 업계와 학계 친구가 생기는 모양이던데 이 또한 나에게 해당사항이 없다. 동호회를 하고 여러 계모임 같은 것을 통해 인연을 만들고 이어가는 사람도 제법 되던 모양이던데 알다시피 취미가 독서요 혼자 맥주 마시기니 이런 동호회 찾기가 쉽지 않고 계모임을 만들 만한 토대랄까, 그런 게 없다.
물론 초등학교 시절엔 친구가 있었다. 몇 년 간 붙어 다녔던 친구도 있었다. 중학교 가서도 친한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 때는 의외로 삶의 갈림길이 일찍 찾아왔다. 친구 몇몇은 소위 건달의 세계로 일찍 진출했고 몇몇은 더 좋은 교육을 찾아 이사를 가버렸다. 미래 선택지가 뻔한 동네에 살게 되면 흔히 겪게 되는 일이다.
딸이 크면서 친구와 어울리는 모습은 언제 봐도 보기 좋다. 처음 어린이집 같을 땐 낯을 많이 가려 걱정했는데 그때 사귄 지유와는 아직도 친구로 지내고 예림이 와는 같은 반이다. 길을 가다 친구를 만나면 먼저 인사를 하는 것이 신기해 보였고 딸을 보면 반가워하는 친구를 보면 내심 기뻤다. 가장 좋은 건 이렇게 친구와 함께 학교 가는 모습이다. 어제 보고 오늘 또 보는 사이일 텐데 어김없이 반가워한다. 딸이 말하길 더 많은 수다를 떨기 위해서 일부러 더 걸어서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기도 한단다. 뭔 이야기를 하냐고 물으니 남자 애들 흉도 보고 공부 이야기도 하고 아이돌 이야기도 한단다. 그도 아니면 아침에 뭘 먹었는지, 그러다 좋아하는 음식이 나오면 그 이야기를 또 한참 한단다. 어째 아내가 친구들하고 대화한다는 내용과 별반 차이가 없지 싶다.
며칠 후, 몇몇 친구들과 미술을 같이 하는 동아리를 만들었다. 모임은 당분간 비대면으로 하기로 했다더니, 줌으로 지들끼리 잘도 떠든다. 그중 미술학원을 가장 오래 다닌, 리더인 여린이가 이런저런 과제를 내주면 딸, 지유, 수아 등의 멤버들이 수행하고 서로 보여주고 평가해준다. 제법 그럴싸하다.
"너네 모임 이름 있어?"
"음..."
"없으면.. 뭐 대천 그림단 어때?"
"촌스러워.. 우리 이름 있어. 아트 가든이야."
"야, 그것보단 평화공원 옆에 학교가 있으니 아트 파크가 낫지."
아트 가든으로 우기면서도 나한테 얘기할 땐 대천 그림단이라고 무심결에 얘기한다. 브랜드명은 촌스러워도 입에 붙는 게 최고다. 카피라이터 20년 차, 전문가의 견해다.